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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12화 (21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12 - 고려의 이름

황보제공은 암담한 눈으로 거란군의 진형을 바라보다가 동생인 황보금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놈들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습니다.”

황보금산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보 형제와 호흡을 맞추고 있던 박수문, 박수경 형제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이 이끄는 패서의 군사들은 거란군의 진형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돌격했으나 실패했다.

황보제공은 거란군의 측면 쪽을 바라보았다. 왕무의 명을 받은 여진기병들이 멀리서 화살을 쏘아대며 거란군의 측면을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거란군은 동요하지 않았다.

굳건한 거란군의 모습에 오히려 여진기병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의 처자가 고려 영내에 있지 않았다면 진작 달아났을 것이다.

“에잇. 기껏 힘써서 저들을 데려왔는데. 여진 기병들도 거란군에게는 안 되는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황보제공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한편 고려군을 총지휘하는 왕무의 본영에도 갑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직은 아군이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세라면 결국 거란군이…… 무슨 수를 내야 하는데.”

박술희가 어두운 표정으로 왕무에게 속삭였다. 그런 박술희에게 왕무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계속 지시를 내렸다.

“침착하게 남은 병력들을 투입하라.”

“예, 폐하.”

박술희가 군례를 올리며 물러났다. 왕무는 박술희가 나가자 소매 속에 감춰두고 있던 연우의 서신을 꺼내 다시 읽었다.

“수를 낸다면 서둘러야 해. 연우야.”

왕무는 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 * *

“으으. 추워.”

나는 흠뻑 젖은 몸을 막사 안의 모닥불에 말리고 있었다. 석공들 말대로 부교를 놓지 않고 부석을 일종의 튜브처럼 이용해 강을 건넜다. 그래서 나는 온몸이 젖었다.

다른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부여진으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닥불도 피우고 속을 덥히기 위해 죽을 끓여 먹으란 지시를 내렸다.

군사들의 체력을 회복시키고 대오를 갖추고 진군해야 했다.

얼추 몸이 다 마르자 나는 막사 밖으로 나섰다. 송화강에서는 여전히 군사들이 꾸역꾸역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도하를 마치고 송화강 서편에 모여 있는 군사들은 2천 명쯤 되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장수들을 소집했다.

“지금 모든 군사들이 도하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기병 2천 명이라도 먼저 이끌고 거란군의 후미를 치겠다. 2천 군사들의 몸이 다 마르면 부여진으로 간다. 남은 군사들은 대오를 정비하고 나서 뒤쫓아 오도록.”

나는 부여진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고려군이 오래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런 결단을 내렸다.

“명을 받듭니다. 왕후 마마.”

여러 장수들은 일제히 군례를 올리며 외쳤다. 그때 여진족장인 각랍라영신, 필제특아공이 한 걸음 나서더니 말했다.

“마마. 저희들을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저희들이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습니다. 은밀히 거란군의 배후에 접근해 저들을 무너뜨리겠습니다.”

그동안 불안해하고 동요하던 여진족들이 이리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기세를 탔다고 생각해서 이러나?’

어쨌든 나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대들이 선봉에 서라!”

여진족장들도 군례를 올리더니 여진 기병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장수들이 군사들을 준비시키는 사이 나도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삼태사 중 하나인 장길을 부른 내가 명을 내렸다.

“그대는 이곳에서 남은 2천 명의 기병들이 도하를 마치면 그들을 이끌고 서둘러 부여진으로 달려와라.”

그리고 왕규와 최지몽을 부른 나는 그들에게도 상세한 지시를 내렸다.

“석공이며 목수 등 참전할 수 없는 인원들과 여기서 대기하라. 그러다가…….”

그리고 왕규와 최지몽이 물러나니 나는 또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외쳤다.

“글씨를 잘 쓰는 문관들이 있나? 좀 해줘야 할 게 있어.”

어쨌든 부랴부랴 준비를 마친 후군 기병 2천 명은 마침내 부여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각랍라영신과 필제특아공이 이끄는 여진 기병 3백 명이 선봉에 섰다.

멀리 보이는 거란군의 진영을 보고 내 곁에서 말을 몰던 김선평이 기뻐하며 외쳤다.

“송화강 서편의 거란군은 배후의 습격을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지금 거란 태후가 강 서편에 있습니다!”

과연 송화강 서편의 거란군 진영에는 거란 태후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뭐 거란군은 강 서편을 안전한 곳이라 여기고 태후를 보내놓은 것이다. 설마 우리가 이리 강을 건너 그들의 배후를 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겠지.”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거란군의 진영을 살폈다.

거란군의 주력은 송화강을 건너서 강 동편에서 고려군 주력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강 서편에는 2천 명 정도의 경비 병력들이 거란 태후 술률평을 지키며 대기하고 있었다.

‘숫자는 비슷하지만 저쪽은 아예 전투준비를 안 하고 있어. 말에 타고 있지도 않아!’

그사이 선봉을 맡은 각랍라영신과 필제특아공은 자기들끼리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거란군 진영에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명적을 쏘아 올리더니 거란군의 진영에 뛰어 들어가 날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여진 기병들이 사방으로 화살을 쏘아대며 거란군 진영을 유린했다. 애초에 강 서편의 거란군은 강 동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력 간의 결전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전혀 상상치 않은 방향에서 고려군이 급습을 가하니 제대로 대응조차 못 했다.

여진 기병들의 첫 공격에 거란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도 간다!”

권행과 손긍훈도 함성을 지르며 고려 기병들을 이끌고 여진 기병들의 뒤를 받쳐주기 위해 달려 나갔다.

나는 김선평과 100기 정도 되는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후방에 남아 전황을 살폈다.

* * *

“으하하하. 이제는 거의 승기를 잡았다! 조금만 밀어붙이면 고려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

자신의 진영에서 거란 승상 술률노속은 통쾌하게 웃으며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외숙의 힘입니다.”

함께 따라 나온 황자 야율이호가 말했다.

“황자 저하의 복입니다. 허허허. 상경 임황부를 지키고 있다가 고려 도적들이 진출했다는 소식에 다 함께 달려 나왔는데. 이런 공을 세우게 됐습니다. 이번에 우리 후방을 어지럽히던 고려, 정안, 여진의 도적들을 일거에 소탕했으니 황자 저하의 공이 큽니다.”

술률노속이 은근한 어조로 야율이호에게 말했다.

“외숙!”

야율이호는 기뻐하며 부르짖었다.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야율이호는 거란의 차기 황권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때 전령 하나가 거란군 수뇌부를 향해 달려오더니 외쳤다.

“태후 마마께서 급보를 보내셨습니다. 지금 고려군이 송화강 서편에 나타나 태후 마마의 거처를 습격했습니다. 지금 사태가 심각합니다. 태후 마마를 호위하던 병력들은 급습을 당해서 거의 무너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고려군이 무슨 재주로 강 서편에 나타나? 지금 송화강을 건너려면 부여진을 거쳐야 하는데! 어떻게 고려군이 태후 마마를……”

야율이호가 놀라서 외치는데 술률노속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황자 저하! 저하께서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 태후 마마를 구해주십시오! 그러고 지금 강 서편에 나타난 고려 도적들을 몰아내 주십시오! 그곳이 고려군 손에 들어가면 우리 거란 대군의 퇴로가 끊깁니다!”

“알겠습니다.”

야율이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기병들을 이끌고 송화강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술률노속은 군령을 내렸다.

“고려의 도적들을 급하게 몰아붙이지 마라. 후방의 잔적들을 소탕하고 나서 총공격을 하겠다.”

술률노속은 갑자기 배후에서 적이 등장하니 놀라서 공세를 늦추었다. 거기에 야율이호가 3천 병력을 이끌고 빠진 만큼 거란군의 공격력도 약화되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거란 태후의 저항이 끈질깁니다. 그대로 달아날 줄 알았는데 버티다니. 우리가 강 서편을 쉽사리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곁에서 김선평이 안타까워하며 외쳤다.

고려군은 기습의 효과를 봐서 강 서편의 경비 병력들을 거의 궤멸시켰다. 그러나 거란 태후를 중심으로 남은 수백 명의 거란군이 발악하듯 저항하니 끝을 못 내고 있었다.

“흐음.”

나는 신음을 내며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김선평이 내 곁에서 송화강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강 동편에서 3천 명 정도로 보이는 거란군이 도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서편으로 건너오면 지금 우리 후군의 전력으로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강을 건너올 태세를 갖춘 거란군 3천은 몹시 정예해 보였다. 후군의 기병들은 거의 부상병이나 노쇠한 군사들이었다. 거란 태후를 호위하던 병력들이야 기습의 효과로 무너뜨렸지만 거란 정병들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에는 무리였다.

“준비했던 계책을 펼칠 때다! 군사들은 가져온 기구를 모두 띄워라!”

나는 그런 명을 내렸다. 군사들이 재빨리 기구를 펼치더니 불을 붙였다. 그리고 기구 3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구들의 기낭에는 ‘고려(高麗)’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송화강을 건너고 나서 글씨를 잘 쓰는 문관들을 시켜서 크게 써놓으라 시켰다.

고려의 이름이 적힌 기구들이 하늘 높이 떠오르니 거란 군사들이 술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강 동편에서 준비하고 있던 3천 기의 거란 기병들이 황급히 도하를 시작했다. 빨리 고려군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왕후 마마!”

김선평이 초조하게 나를 보며 부르짖었다. 나는 그런 김선평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리천의 구름 같은 것은 사람이 다시 띄울 수 없지만 이런 기구는 충분히 가능하지.”

* * *

부여진 남쪽 20리 지점에 기술자들과 대기하고 있던 왕규와 최지몽에게도 고려의 이름이 적힌 기구의 모습이 보였다.

“왕후 마마께서 약속하신 신호를 보내셨다! 밧줄을 끊어라! 그리고 부석들을 흘려보내라!”

왕규와 최지몽이 명을 내렸다.

왕규와 최지몽도 이곳에서 대기하며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술자들과 함께 부석들을 뾰족하게 다듬거나 혹은 부석에 구멍을 뚫어 못 쓰게 된 화살이나 창촉을 박아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떠오른 기구를 보고 왕규와 최지몽은 그 날카로운 부석들을 물살을 따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 * *

야율이호는 하늘 높이 떠오른 고려의 기구를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저게 도대체 뭐냐?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강 서편의 고려 도적들을 토벌하고 하늘에 떠 있는 저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지금 결전을 벌이고 있는 우리 거란 정병들도 저것들을 볼 텐데. 서둘러라!”

거란 군사들 입장에서는 열심히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등 뒤에서 적국의 이름이 하늘로 떠오른 격이었다.

지금 상황이 거란 군사들의 사기에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야율이호는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군사들을 독촉했다.

거란 정병 3천 기가 부랴부랴 송화강을 건너고 있을 때였다.

강을 건너던 거란 기병 하나는 왼쪽 옆구리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강물로 굴러떨어졌다. 충격과 함께 뭔가가 그 기병의 옆구리를 푹 쑤시고 들어와서 피가 강물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기병 하나만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한창 강을 건너던 거란 기병들이 푹푹 쓰러지기 시작했다.

왕규와 최지몽이 흘려보낸 부석들이 마침내 물살을 타고 부여진까지 당도한 것이다. 거란군에게 해를 끼칠 목적으로 날카롭게 다듬고 화살 등을 박아놓은 부석이었다. 거기에 부석 자체의 무게도 있고 물살을 타고 와서 가속도가 붙어 있었다.

“뭐냐? 대체 왜 우리 군사들이 픽픽 쓰러지는 것이냐?”

도하 작전을 지휘하던 야율이호는 크게 노해서 외쳤다.

“지금 바윗덩어리들이 떠내려와서 강을 건너던 우리 군사들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상황을 살피고 온 척후들이 외쳤다.

“아니. 이놈들이 제대로 상황을 살피지 않고 돌아와서! 바위가 떠내려오다니! 그게 무슨!”

야율이호가 척후들을 꾸짖는데 척후들이 강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바위들이 끝도 없이 떠내려오고 있습니다.”

화가 나서 척후들이 가리킨 방향을 보던 야율이호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이런! 이런!”

* * *

내 곁에서 상황을 살피던 김선평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왕후 마마의 계책대로 거란의 무리들이 달려올 길이 끊겼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약간 초조해졌다.

“왕규와 최지몽이 시간을 벌여줬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전에 거란 태후를 사로잡고 강 서편을 장악해야 한다!”

그때 남쪽에서 또다시 함성이 들려왔다. 다름 아닌 장길이 인솔하고 달려온 후속 기병 부대 2천 기였다.

아마 내가 띄운 기구를 보고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행군 속도를 올린 것 같았다.

“바로 거란군을 쳐라!”

나는 장길을 보고 손짓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장길도 시간이 급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바로 거란 태후 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 * *

한편 하늘 높이 떠오른 고려의 이름은 거란군과 결전을 벌이고 있는 고려군사들에게도 보였다.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뭐냐? 대체 무슨 일이? 우리 고려의 이름이!”

황보제공은 갑자기 거란군 배후에 떠오른 고려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만 황보제공은 놀람과 함께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황보제공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고려의 장수들과 군졸들이 모두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경주도독 윤신달이 부르짖었다.

“왕후 마마. 왕후 마마께서 거란군의 배후에 오셨다. 내가 경주에서 봤어! 천사옥대를 숨겨놓은 황룡사 중들과 대결할 때 왕후 마마께서 저 기구도 고안해 내셨다. 왕후 마마께서 오셨다.”

그리고 직접 기구를 본 적이 있는 경주도독부 군사들도 악을 쓰듯이 외쳤다.

“왕후 마마께서 거란 대군의 뒤를 끊었다. 내가 저걸 본 적이 있어.”

“거란 대군의 퇴로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 고함이 고려 군사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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