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11 - 우회
‘그리고 지금 부여진에는 아버님과 오라버니, 상산 사람들도 가 있는데?’
내 뇌리에 이제는 많이 늙은 임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왕무는 임희와 임연객도 후군에 배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 임희가 나서서 왕무에게 말했다.
“외척인 우리 상산 임씨마저 안전한 후군에 가 있으면 군심이 동요할 것입니다. 소신도 부여진에 가겠습니다.”
임희의 말이 옳았기에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부여진에서 패하면 진짜 내 곁에 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야. 물론 왕무를 비롯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승패는 알 수가 없어. 그런, 그런 운에 모든 걸 걸 수는 없어. 뭔가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뭔가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해서 더 괴로웠다.
그러는 사이 부여진의 상황을 살피고 온 전령들이 속속 나에게 보고를 올렸다.
“부여진에서 우리 군사들과 거란 군사들은 여전히 대치만 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계속 부여진을 오가며 전황을 살펴라.”
나는 그런 명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군에 기다리고 있는 나도 이렇게 압박을 받는데 부여진에 가 있는 사람들은 더 할 것이다.
그런만큼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전령이 막사를 나서자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이 후삼국 시대에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왕건이나 유금필이 살아 있을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때는 내가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저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렸다. 나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다 보니 결국 그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내 뇌리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움직여야 해. 양군이 아직 대치하고 있는 이때!”
나는 벌떡 일어나 막사 밖의 군사들을 불렀다. 서둘러 군사들을 시켜 후군의 장수들을 소집해야 했다.
왕규, 김선평, 권행, 장길, 손긍훈, 최지몽 등 후군의 장수며 문관들이 속속 달려왔다.
“마마. 결국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까? 그간 왕후 마마께서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김선평이 말했다.
“그렇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군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우리 모두 부여진으로 달려가 싸움을 거들면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선평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소신도 가서 싸우겠습니다! 부여진의 일전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데 이리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거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최지몽도 소매를 걷어붙이며 그리 나섰다. 후군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냥 부여진에 달려가 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남쪽으로 간다! 백두산 쪽에 가까이 다가가면 답이 있다! 답을 찾아 가지고 가야지. 서둘러라! 부여진에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움직이자!”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북쪽의 부여진이 아니라 남쪽의 백두산 쪽으로 간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왜요?”
왕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시간이 없다. 속도가 빠른 기병들만 준비시켜라. 보병들은 이곳 진채를 지키게 하고. 말을 몰고 가면서 설명하겠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장수들을 닦달했다. 내 등쌀에 쫓긴 장수들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부여진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고려 대군과 거란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 며칠이 흘러갔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란의 무리들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으니 우리에게 달려들 것인데 어떤 식으로 달려들지?”
박술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다른 고려군 장수들도 박술희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군이나 거란군이나 며칠 동안 쉬며 행군의 피로를 모두 풀었다. 이제는 문제는 보급이었다. 양측 합쳐 10만이 넘는 기병들이 대치하고 있는데 하루에 소모하는 군량이 엄청났다.
고려군의 군량도 이제는 아슬아슬했다. 발해 유민들이 협조해서 군량을 대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거란도 부랴부랴 달려왔으니 군량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검차벽을 전진시켜 거란군을 압박한다. 그러면 거란군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달려 나올 것이다. 그때 대기하고 있던 우리 기병들이 반격한다!”
왕무가 그런 군령을 내렸다.
“명을 받듭니다.”
여러 장수들이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그리고 고려군의 검차벽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전진한 검차들은 다시 멈추고 고려군은 그 지점에서 수비를 굳혔다.
이런 식으로 고려군이 야금야금 전진하면 거란군은 등 뒤의 송화강으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의 움직임에 거란군도 상당한 위협을 느낀 듯했다.
둥둥둥-
거란군 진영에서 거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거란 기병들이 마침내 자신들 진영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쳐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려군도 검차벽 뒤에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 기병들은 검차벽을 우회하려는 거란 기병들을 막아섰다.
* * *
나는 송화강변을 따라 말을 달리며 장수들에게 외쳤다.
“지난날 대장군은 불과 80기의 기병들을 이끌고 서라벌에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선필, 김선평 두 장수의 군사들과 합류하자마자 백제 대군을 공격해서 물리쳤다. 백제군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때 소장이 유금필 대장군을 따라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허를 찌르는 것이 병법의 기초이긴 합니다만…….”
그때 서라벌 전투에 참전했던 김선평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후군의 전력이 미약하지만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친다면 거란 대군도 물리칠 수 있다.”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거란군의 어디를 공격해야 허를 찌를지? 그리고 지금 왜 우리 후군이 남쪽으로 말을 몰고 있는 것입니까?”
김선평이 말을 몰면서 난감한 얼굴로 캐물었다.
“우리 후군은 부여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송화강을 건넌다. 그리고 그대로 거란 대군의 배후를 친다! 우리 후군이 송화강 서안에 모습을 드러내서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저들은 그대로 무너진다!”
내가 당당하게 외쳤다.
“아…….”
내 말을 들은 김선평이 입을 쩍 벌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왕규가 대신 나서더니 말했다.
“아니 왕후 마마! 우리가 다른 곳에서 송화강을 건넌다면 물론 그게 가능하겠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면 왜 저 많은 군사들이 부여진에 가 있겠습니까? 부여진에서만 도하가 가능하니 다 그곳에 가 있는 것 아닙니까? 송화강은 큰 강이라서 부여진 쪽이 아니면 맨몸으로 헤엄을 쳐서 건널 수도 없습니다.”
“부교를 만들어서 강을 건넌다!”
내 말을 듣고 왕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대체 뭘로 부교를 만듭니까? 지금이 초봄이기도 하고 원래 송화강 인근은 커다란 수목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고려 군사들이 가진 목재는 두만강에 부교를 놓느라 다 소진했습니다. 발해 땅 깊숙이 들어오면서 무거운 목재를 들고 행군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교를 그리 쉽게 놓을 수 있었으면 거란군이 거기에 대해 경계를 했을 것입니다. 아니 백두산 근방에 가도 지금 그곳 초목들이 모두 숯덩이가 되었습니다.”
“어서 내가 찾으란 것이나 찾아!”
나는 왕규에게 호통을 치며 강변을 둘러봤다.
‘송화강 역시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강이다. 백두산 대폭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내가 찾는 것이 반드시 있다. 내가 지금 4천 명의 기병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데. 반드시 찾아낸다!’
그리고 내가 보낸 척후들이 달려와 외쳤다.
“왕후 마마 말씀대로입니다. 강변에 지형이 이상하게 변한 곳이 있습니다! 암석들이 무슨 반죽인 양.”
“어서 그곳으로 안내해라!”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나와 일행들은 척후를 따라 움직였다.
“이거 강변의 풍경이…… 굉장히 불길하고 찜찜해 보입니다.”
왕규가 주변을 둘러보며 또 그랬다. 그러나 나는 환희에 차서 강변을 바라보았다.
‘백두산에서 나온 용암이 강을 따라 흐르다가 굳어져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여진족장 각랍라영신과 필제특아공이 말하기도 했어. 자기들이 두만강 인근에서 탈출할 때 회색 물결에 휩쓸려 돌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회색 물결은 용암과 물이 섞인 거지. 송화강을 따라서도 그게 분출됐을 거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돌조각을 주워 내가 가지고 다니는 수통에 집어넣었다.
돌조각은 가라앉지 않고 수통의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겨우 눈물을 삼키며 나는 좌우를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이 인근의 바위들을 가지고 간다. 그 바위들로 부여진 근처에서 부교를 만들어 그대로 송화강을 건넌다. 서둘러라!”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장수들은 내 명대로 움직이지 않고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최지몽이 나서더니 말했다.
“이 바위로 부교를 만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바위는 부석(浮石)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에 뜬다.”
“소신이 왕후 마마와 함께 부석사(浮石寺)에 간 적은 있습니다. 그곳에서 관혜가 화엄종의 종정이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때 왕후 마마의 신묘한 계책은 일찍이 봤습니다만. 그때는 무슨 신통력 덕이 아니라 지혜로 돌을 굴린 것 아닙니까?”
“나도 그때 일을 회상하다가 이 부석을 떠올렸다.”
나는 최지몽이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자 반가웠다. 다만 지금 최지몽이나 여러 장수들이 하고 있는 생각도 읽고 있었다.
‘바위가 물에 뜬다고 내가 말하니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이거 참. 화산이 폭발하면 물에 뜨는 부석이란 돌이 생긴다고 설명을 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 내가 세세한 원리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호통을 쳤다.
“지금 시간이 없다. 서둘러 움직여.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군령으로 다스리겠다. 어서 이 인근의 바위들을 모아 말에 실어라! 부여진에서 싸움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도하를 해야 한다.”
확실히 권력이 좋긴 좋았다. 내가 격노하자 장수와 군졸들은 깜짝 놀라서 납득을 못하면서도 우선 돌을 캐기 시작했다.
* * *
와아아아!
부여진에서는 엄청난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결국 거란의 무리들이 검차벽을 모두 무너뜨렸습니다.”
척후들이 달려와 왕무에게 보고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을 출진시켜 정면을 막는다. 여진 기병들은 어떻게든 측면 쪽으로 우회해서 적을 치라고 해라.”
왕무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예, 폐하.”
척후들이 명을 전하기 위해 다시 흩어졌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어조와 달리 왕무의 마음은 무거웠다. 왕무의 예상보다 검차벽이 더 일찍 무너진 것이다.
‘우리 고려의 군사들이 삼한통일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을 쌓았다고 하지만. 그건 거란도 마찬가지다. 저들도 쉴 새 없이 전쟁을 치렀으니. 게다가 기마술 자체는 거란군사들이 더 뛰어나다.’
전황을 살피는 왕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고려나 발해 출신 기병들은 장수들을 따라 이를 악물고 거란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확연히 움직임이 거란군이 비해 느렸다.
그나마 여진기병만은 기마술에 있어서 거란군사들보다 뛰어났다. 다만 여진족들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부족별, 씨족별로 생활을 하다가 고려의 명을 받아 겨우 모였다.
거란군에 비해 여진족들의 조직력이 많이 밀렸다. 측면을 찌르라는 왕무의 명을 받고도 여진 기병들은 거란군의 진형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지금 남은 군사들을 투입하는 것이.”
왕무의 곁에서 지휘를 돕는 박술희가 그리 말했다. 그나마 고려군은 거란군에 비해 수가 많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병력을 후방에 남겨두고 있었다.
“잠시 더 전황을 살피자.”
결단을 못 내린 왕무는 그리 말하며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 * *
나는 전령으로부터 부여진의 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받으며 말을 몰고 있었다.
“이미 부여진에서 우리 군사들과 거란군이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서둘러라! 전투가 끝나기 전에 강을 건너야 한다. 부여진 남쪽 20리 지점에서 부교를 만들어 도하한다. 지금 진채에 대기하고 있는 대장장이, 석공, 목수들도 거기 가 있으라고 해.”
나는 그런 명을 내렸다. 말에 부석 바위를 실은 기병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속도를 올렸다. 그 덕에 우리는 겨우 부여진 남쪽 20리 지점에 집결했다.
내 명대로 후군의 기술자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자 이제 가져온 바위들을 강에 띄워라. 이 바위들을 이어서 부교를 만들어라.”
내가 발을 구르며 외쳤다.
“마마. 아무리 폐하가 걱정돼도. 바위를 물에…….”
왕규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보며 외쳤다. 그런데 그 순간 군사들 사이에서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짜 바위가 물에 뜬다! 바위가 떠!”
“엥 뭐야?”
그 말을 듣고 왕규가 강 쪽을 바라보고 입을 벌렸다.
“서둘러라!”
나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연이어 호통을 쳤다.
‘이미 교전이 시작됐다니. 설마 하루 만에 전투가 끝나지는 않겠지? 왕무에게 아예 전령을 보내서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소식을 전해야겠어.’
나는 말 위에서 부랴부랴 내가 거란군의 후방을 칠 테니 시간을 끌라는 서신을 적어서 전령에게 건넸다. 자세하게 뭔가를 적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내 호통소리를 듣고 기술자들도 부랴부랴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몇몇 군사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선묘룡이다! 선묘룡이 이곳까지 왕후 마마를 따라왔다! 그래서 바위를 띄워주고 있다! 부석(浮石)이다”
“의상 법사와 선묘 아가씨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사벌주에서 온 군사들이 그리 부르짖고 있었다. 사벌주 출신 군사들 중에는 부석사에서 내가 벌인 일을 보거나 들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걸 또 교묘하게 연결지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서둘러라.”
내가 독촉을 하는데 석공들이 달려와서 말했다.
“정식으로 부교를 만들면 한참 걸립니다. 그러니 이 신통한 돌들을 목걸이처럼 꿰어서 늘어놓아 물살을 느리게 만든 뒤, 군사들이 남은 돌들을 붙들고 몸을 띄워 강을 건너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더니 석공들이 여러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런 건 알아서 해. 어쨌든 오늘 안에 강을 건너야 한다!”
내 호통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부랴부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