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05 - 신라도
어전에서 대광현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초봄 무렵에 삼한의 군사들이 상경 용천부로 나아가면 딱 좋습니다! 지금이 겨울이니 군사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몇 달 준비를 하다가 가면 때가 맞습니다.”
“굳이 봄까지 기다려야 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왕식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겨울에는 북방의 큰 강이 모두 얼어붙어 거란 기병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상경 용천부가 10여 일 만에 무너진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야율아보기의 기병이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니 우리 발해는…… 봄만 돼도 강물이 녹으니 거란군이 도하작전을 펼치기 힘들 것입니다.”
대광현은 발해가 멸망할 때의 일을 떠올리자 서글픈지 고개를 떨구었다.
“과연.”
왕식렴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에게 귀부해 온 여진족들을 안정시키고 그들을 훈련시키는데 이번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거기에 지금 동북 지역은 여전히 홍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게 진정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결국 봄 무렵에 우리 고려 군사들이 옛 발해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군사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박술희가 말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는 왕규가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중원에서는 진나라 황제 석중귀가 거란을 상대로 엄청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남하하는 거란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진나라에서 연이어 사신들이 달려와 서둘러 출병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봄까지 기다렸는데 진나라가 그대로 무너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흐음.”
장내의 중신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역사에선 올해 겨울 진나라가 거란 손에 멸망당한다. 내가 전쟁이 시작될 무렵 시간을 끌라고 해서 여태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힘든 모양이군. 어떻게든 시기를 잘 맞춰야 해. 진나라군이 거란군을 붙들고 있을 때 고려가 상경 용천부에 진출해야 해.’
이때 왕무가 나서서 결단을 내렸다.
“이미 준비된 군사들 중 기병 5천, 보병 5천을 동원해 청천강 북쪽으로 나아간다. 우리 군사 1만 명이 압록강에 당도하면 거란이 크게 놀랄 것이다. 그러면 진나라가 한숨 돌릴 수 있다.”
“맞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고려가 강동 땅을 점거하면 확실히 훗날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서경에 오래 주둔해서 북방의 지리에 익숙한 왕식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상, 견권은 명을 받들라!”
“예, 폐하.”
염상, 견권은 왕무가 호명하자 바로 나서서 대답했다.
“그대들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강동 땅을 점령하라. 지금 거란의 주력이 중원에 가 있으니 우리에게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기병으로 적을 방비하며 보병을 동원해 요충지마다 성을 쌓아라! 그리고 대광은 이 소식을 진나라에 즉시 알려라. 진나라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힘을 얻을 것이니.”
왕무는 염상, 견권에게 명을 내리고 나서 대광 왕규에게도 지시를 했다.
“바로 출병하겠습니다.”
염상, 견권은 군례를 올리더니 즉시 어전을 나섰다.
‘무가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이런 결단을 내렸구나.’
곁에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제 북벌을 하게 됐는데 이긴다는 확신이 없다. 그러니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놔야지. 만약 우리가 북벌에 실패하면 거란이 보복에 나설 텐데 그때 강동 땅을 거쳐 고려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 그러니 미리 그 통로를 고려가 막아놔야 해. 우리가 북벌에 실패하면 염상, 견권이 고려를 지킬 것이다.’
염상, 견권의 왕건의 심복이자 개국공신이었다. 두 사람 다 나이가 많았다.
‘그 두 사람은 나이나 성격상 딴 마음을 먹지도 않을 거고. 후방을 맡길 만하지.’
나는 고려 조정이 북벌을 결심한 직후부터는 딱히 논의에 끼어들지 않았다.
‘구체적인 전략, 전술을 짜는 데는 무나 전쟁 경험이 있는 중신들이 더 나으니. 이제 미래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내가 끼어들어 봤자 한계가 있어.’
그 생각에 나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전 한가운데 펼쳐진 커다란 지도를 보고 왕무와 중신들은 어떤 순서로 부대를 움직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발해는 신라도를 통해 오랫동안 옛 신라와 교류해 왔습니다. 발해가 무너지고 나서 이 신라도를 20년 동안 관리하지 못했으나, 군사를 동원해 길을 수리하면 금방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이 길을 통하면 고려의 대군이 빠르게 용천부에 갈 수 있습니다.”
대광현이 지도의 한쪽을 짚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신라도로 나가는 도중에 주의해야 할 나루터나 고갯길에 대해서 알려줬다.
군사를 움직이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고려 중신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확실히 북벌이 시작되니 대광현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나는 이마에서 땀까지 흘리며 말하는 대광현의 모습을 보고 슬쩍 왕무에게 눈짓을 했다. 어제 대광현을 어떻게 대우할지에 대해 왕무와 미리 의논해 놓은 것이 있었다.
“태자가 북벌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공이 크다. 그러나 지금같이 발해 태자의 작위로는 발해 땅에 웅거하고 있는 발해제장들을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발해태자를 발해 지군국사(知軍國事)에 봉하려고 한다. 어찌 생각하는가?”
왕무가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태자의 공이 큽니다.”
고려 중신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아직 거란을 상대로 싸워 공을 세운 일이 없는데 어찌 그런 작위를 받겠습니까?”
대광현은 왕무의 말을 듣고 놀라서 손을 휘저었다.
발해 지군국사는 발해의 군사, 국정을 모두 담당하는 작위였다.
‘사실 대광현을 발해국왕에 봉해서 발해유민들의 민심을 모으고 싶었지만, 그러면 정안국왕 열만화가 난감해지니.’
열만화는 이미 옛 발해 땅에 정안국을 세우고 국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고려 조정이 대광현을 덜컥 발해국왕에 봉하면 열만화는 엄청난 위협을 느낄 것이다. 자신이 역적으로 몰리는 게 아닌가 싶어 고려에 협조를 안 할 수도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대광현에게 지군국사 자리를 권하는 것이다.
“지군국사! 어서 상석에 오르십시오.”
고려의 여러 중신들은 어전에서 일제히 대광현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계속 난감한 표정을 짓던 대광현은 결국 우리 부부 바로 아랫자리에 와서 예를 갖추었다.
나와 왕무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 * *
오늘 해야 할 일을 마친 우리 부부는 그대로 처소에 돌아왔다.
“나도 가는 것 맞지?”
나는 처소에서 왕무에게 물었다. 왕무가 나더러 개경에 있으라고 할까봐 겁이 났다.
“이번 전쟁은 황보제공의 말이 맞아. 고려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모아 단기간에 결판을 내야 해. 연우 네 지략도 중요해. 결정적일 때 연우 너의 지략이 필요한데 전장에 네가 없으면 안 되니. 함께 가자!”
왕무가 담담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장성한 다른 태자들도 다 데리고 가야 해. 한 사람도 개경에 남겨두면 안 돼.”
나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이 하나라도 개경에 남아 있으면 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왕건의 아들들은 모두 끼고 다녀야지.’
내 말을 듣고 왕무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당연해. 이만한 전쟁에 왕실의 가족들이 모범을 보여 모두 참전해야지. 북벌은 아버님의 꿈이기도 하고.”
왕무는 나와 다른 이유로 태자들을 참전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이를 위해서는 왕만세를 남겨놓자.”
왕만세는 우리 부부의 심복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고 왕족이기도 하고 또 안타깝지만 수군은 이번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어. 왕만세는 남아서 현이의 후견인 역할을 해줘야지.’
내 말에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영해공을 개경에 남길 생각이었어.”
여기까지 대화를 하고 나자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일리천 전투 직전에 왕건이 왜 그리 가슴을 졸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전을 벌인다는 것이…….’
왕건이 삼한통일 직전에 벌벌 떨며 온갖 요란을 떠는 모습을 보고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런데 그 심정을 지금 나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여러 가지 계책을 써서 고려가 이길 확률을 높이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거란과 야전을 벌여 이겨야지 의미가 있지. 만약 지면 모든 것이…….’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몸이 벌벌 떨렸다.
“연우야.”
왕무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나를 품속에 안아주었다. 나도 힘껏 왕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 있으니 겨우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겨야지.’
* * *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북벌을 위해 군사를 모으고 나니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국왕 왕무는 6만에 이르는 대군을 일으켰다.
이중 기병이 5만 명이고 보병은 1만 명에 불과했다. 거란과의 결전을 벌일 때 보병은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고려군 수뇌부의 판단이 있었다.
그래서 기병 위주로 군사들을 편성했다. 고려군 수뇌부는 신라도를 총집결지로 지정했다. 신라도를 타고 그대로 발해 수도인 상경 용천부를 수복할 계획이었다.
나와 왕무도 개경과 패서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도로 가야했다. 그런 우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왔다.
“아버님, 어머님. 반드시 거란을 평정하고 돌아오셔요.”
정윤 왕현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나와 왕무에게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어린 아들을 두고 전쟁터로 향해야 하다니!’
그러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 현이 곁에서 영해공 왕만세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온 힘을 다해 정윤 전하를 보좌하겠습니다.”
“영해공! 그대는 수군을 이끌고 개경을 지켜달라. 만약 강동땅에 버티고 있는 염상, 견권 등이 힘들어지면 적절히 수군으로 지원을 해주고.”
왕무는 왕만세에게 그런 당부를 했다.
그사이 나는 나주 태후와 오지수, 동양원 부인, 해량원 부인 정혜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잘못되면 이들이 왕실의 어른들로서 현이를 지켜줄 거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와 인연이 있었던 왕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동양원 부인은 내 손을 잡더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정말 지금 같은 때 든든했을 건데.”
“정말 그래요.”
나는 한숨을 쉬며 동양원 부인의 말에 동의했다. 유금필만 살아 있었다면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에 나섰을 것이다.
“저도 따라가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한림원령 김악이 우리 부부에게 말했다. 그러나 김악도 나이가 꽤 들어서 전쟁터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김악도 남아 있으면 현이를 잘 지켜주겠지. 왕건이 끝까지 김악을 믿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네. 이런 상황이 되니 김악이 뒤에 남아주길 바라게 되니.’
나와 왕무가 김악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는데 곁에서 최지몽이 끼어들었다.
“소신이 폐하를 잘 보좌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허.”
그런 최지몽의 모습을 보고 김악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왕무가 말 위에 오르며 명을 내렸다.
“이젠 신라도로 가자!”
나도 현이를 다시 한번 슬쩍 보고 왕무를 따라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고려 군사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개경 인근에는 백성들 역시 군사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폐하! 반드시 거란을 토벌하고 돌아오십시오.”
“도선국사의 노래대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백성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내가 진작 퍼뜨린 도선비기의 노래 덕이었다. 백성들의 환호소리를 들으며 나와 왕무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도를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