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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04화 (204/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04 - 배수진

황보제공의 입에서 북벌이란 말이 나오자 어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럴 만도 하지. 북벌은 곧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뜻하니.’

지난 몇 년간 암암리에 북벌을 준비해 온 나도 거란과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다른 중신들은 더 부담을 느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최소한 중신들의 태반은 북벌을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여러 중신들은 북벌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벌을 하자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북벌을 하자고 말할까? 아니야. 조금 더 지켜보자. 될 수 있으면 중신들이 논의를 거쳐 자발적으로 북벌을 결의하는 것이 좋다. 여기까지 유도를 해놨는데.’

나와 왕무는 나서지 않고 기다렸다.

갑갑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왕규가 한걸음 나서더니 말했다.

“지금 거란 황제 야율덕광이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기 위해 남하했다고 합니다. 진나라 황제 석중귀 역시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습니다. 중원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왕규는 나와 왕무의 심복으로 우리가 북벌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나라와의 군사동맹 체결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지금 왕규는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상 북벌을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란 황제 야율덕광이 중원에서 싸우는 사이 고려군이 진격하면 거란을 궁지에 몰 수 있었다.

“상황에 우리에게 유리한 건 맞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만약 우리 고려가 북벌을 하게 된다면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하니. 어설프게 약간의 군사로 나가면 의미가 없고. 그리고 우리가 만약 거란과 싸우게 된다면 승부는 단시간 안에 날 텐데. 그, 그런데 그 결전에서 지면 고려의 명운이 기우는 격인데. 그걸 누가 책임질 수…….”

황보제공이 왕규의 말을 듣고 나서서 한마디 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말끝을 흐렸다.

나는 어전에서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제공의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다. 거란과의 싸움은 단시간 내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결전이야.’

역사 속 사례를 보면 거란이 전쟁을 벌이는 기간은 굉장히 짧았다.

‘발해도 멸망할 때 10여 일 만에 무너졌다.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 고려를 침공한 거란군도 길어봤자 2~3달 정도 싸우다가 퇴각했지.’

거란이란 나라가 지구전을 감당할 보급능력이 없었다.

‘고려군도 북벌을 할 때 장기전을 벌일 보급역량이 없다. 비록 왕건 시대부터 북방에 식량을 비축하기는 했지만 고려 대군이 소모하는 군량을 대는 데는 한계가 있다. 현지에서 발해인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쳐도 오래 못 버틴다. 시간을 끌면 고려군은 식량이 부족해서 제풀에 무너진다.’

고려와 거란 모두 옛 발해령에서 지구전을 벌일 능력이 없었다. 결국 결전을 한판 벌여 승부를 봐야 했다.

‘고려에 상당히 유리한 형국이긴 하지만 만에 하나 그 싸움에서 지면 고려가 입는 타격은 엄청나다. 그러니 아무도 선뜻 북벌을 하자고 나서지 못하고 있어.’

따지고 보면 우리 부부의 심복인 왕규도 북벌을 하자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했다. 중원 쪽의 정세를 전하는 척하며 에둘러서 북벌의 운을 띄웠을 뿐이다.

‘앞장서서 북벌을 주장하다가 거란과의 결전에서 패하면 그 책임을 져야하니. 누구도 북벌을 하자고 말을 못 하고 있지. 하나 그렇다고 고려가 북벌을 포기할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장내의 논의를 지켜봤다.

“우리가 북벌을 하지 않으면 지금 민심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하늘의 북소리와 검은 깃발의 의미를 이제는 삼한 사람들 모두가 깨달았을 테니. 도선국사가 남긴 노래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고 현실적 정세도 우리 고려에 유리한데 이걸 무시한다면…… 허허허.”

유긍달이 쓴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마 정세가 고려에게 불리했다면 도선국사의 노래보다 더한 예언이 돌아도 유긍달은 북벌에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언에 더해 상황 자체가 고려에 유리하니 유긍달은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늘이 진짜 북을 울릴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입니다.”

왕식렴도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참요를 지어 퍼뜨린 순간 나도 고려도 배수진을 친 것이나 다름없다. 도선국사의 노래를 무시하고 북벌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에잇 왕건의 압박 때문에 나도 이런 수를 쓰긴 했는데.’

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젠 나 자신도 북벌이란 대의를 거스를 수 없게 됐다.

어느 순간 중신들은 자연스럽게 나와 왕무 쪽을 바라보았다. 왕과 왕후가 결단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마 지금 나와 왕무가 북벌을 명해도 중신들은 그대로 따를 것이다.

“북벌에 대한 이야기는 나라의 중대사이니만큼 급하게 정할 수 없다. 며칠 더 논의를 한다. 오늘은 우선 모두 돌아가서 쉬도록. 또한 개경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전력을 다한다.”

왕무는 결론을 내지 않고 그리 마무리 지었다.

‘고려의 운명을 건 전쟁이니만큼 최대한 논의하고 국론을 최대한으로 응집시켜 나가야 해. 거기에 며칠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들어오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전을 나서는 중신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 * *

며칠 뒤 동해의 호족들이 보낸 급보가 속속 개경에 당도했다.

-여진의 무리 수만 호가 우리 고려에 귀부했습니다. 백두산이 갑자기 허물어지고 강이 범람해서 여진족들이 도저히 그들의 터전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동해의 제장들은 폐하의 명에 따라 전선을 이끌고 나아가 그들을 구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우선 동해 연안에 분산시켜 돌보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찌 마무리 지을지 조정의 명을 기다립니다.

한림원령 김악이 동해의 호족들이 보낸 서신을 읽어나갔다.

“허허허. 이거 참. 때마침 여진족이 귀부해 왔습니다. 그들을 가려뽑아 전장에서 기병으로 활용하면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박수경이 허탈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가 여진의 무리들을 구하는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들을 믿기가…… 전장에서 그들이 딴마음이라도 먹으면.”

황보제공이 걱정스레 말하는데 박수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 저들이 처자까지 거느리고 우리 고려 영내에 들어왔으니 우리의 명을 조금도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터전 자체가 무너졌으니 처자를 자신들 부락에 남겨둘 수 없었겠지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여진 무리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처자를 우리 고려 땅에 둬야 할 판입니다. 그러면 절대 우리를 거스르지 못합니다. 어찌 일이 이리 절묘하게.”

그러자 황보제공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태조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예측하셨다는 말인가? 태조께서 동해의 호족들에게 배를 만들어놓으라고 닦달할 때만 해도 이해가 안 갔는데.”

“태조께서는 도선국사의 제자이셨으니.”

박수경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상황이 고려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여진 기병들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단마저 생긴 것이다.

중신들은 북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발해의 태자가 우리 고려에 머무른 지 오래되었고, 거란 황제는 중원에 나가 있고, 여진 기병들은 우리 고려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고, 북방은 여러 재해로 혼란스럽습니다. 설사 도선국사의 노래가 없었다 쳐도 한번 진격할 기회입니다!”

마침내 박술희가 달아오른 분위기를 타고 과감히 나서서 외쳤다.

“그렇긴 하지. 이 정도 기회라면! 여진족 중에서도 우리 말을 잘 안 듣는 무리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황보제공 역시 박술희에게 찬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벌을 하자는 쪽으로 중지가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황보제공이 무심코 한 마지막 말을 듣고 장내의 시선은 갑자기 나에게 쏠렸다. 나를 바라보는 중신들의 시선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기묘했다.

고려의 말을 듣지 않은 여진족들은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 중신들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이런 오해를 받아도 할 말 없나? 하긴 이번 일은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할 거야. 왕후가 되고 난 후에는 나도 눈치를 안 보고 내가 편한 대로 일을 처리했으니.’

나는 최대한 많은 여진족들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모든 여진족을 살리고 싶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여진족들을 선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중신들의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전에서 왕후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중신들은 잠깐 나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북벌 논의의 결론을 내렸다.

“폐하. 소신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 고려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북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중신들의 대표로 왕건의 개국공신이기도 한 염상이 나서서 말했다.

“내 생각도 같다!”

왕무는 즉시 동의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지난 몇 년간 국론을 모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그것이 드디어 성과를 낸 것이다.

‘고려는 북벌을 결심했다. 어전에 모여 있는 중신, 대호족들은 모두 실질적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결심했으면 군사는 순식간에 모인다. 물자와 군량은 왕건 시대부터 북방에 비축해 놨고. 이젠 정말 가는구나!’

곧 수많은 군사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진격한다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떨렸다. 나와 왕무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다.

그런데 문득 중신들 사이에서 유긍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정확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신이 왕후 마마께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여기까지 와서 질문을 던지려는 유긍달에게 의아함을 느꼈지만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고려가 이번 북벌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유긍달이 진지한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어전에 모인 모든 중신들이 나를 바라봤다. 내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런 걸 왜 하필 지금 물어? 궁금하면 진작 묻지.’

나는 유긍달의 질문을 듣고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백두산이 대폭발하며 예언자로서 임연우의 역할도 끝나 버렸다.

‘그동안은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이용해 나는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 밑천도 다 털렸어. 고려가 북벌에 나서면 역사를 크게 바꾸는 일이라 내 역사 지식이 아무 쓸모도 없다. 백두산 폭발 같은 재해는 수천 년에 한 번 있는 일이고. 이젠 일개 대학원생으로서 왕무를 도울 수밖에 없어.’

그런데 유긍달과 중신들은 이젠 밑천이 없는 나에게 희망을 품는 것 같았다. 다만 이 상황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 고려가 무조건 이긴다. 그리고 발해 땅을 대부분 회복할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유긍달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휴우.”

여기저기서 중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혼자만 안심하지 못하고 마음고생하게 생겼네.’

나는 그런 중신들의 모습을 보니 심란해졌다. 그리고 중신들은 즉시 구체적으로 군사를 동원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발해 태자 대광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폐하. 대광현을 어전에 불러 함께 일을 논의해야 합니다.”

왕식렴이 왕무에게 그리 권했다.

이제 북벌을 결심한 만큼 거란과의 전쟁 경험이 있는 대광현의 조언이 필요했다. 거기에 발해 땅의 민심을 움직일 때 대광현이 나서줘야 했다.

“서둘러 사람을 보내라.”

왕무 역시 기민하게 왕식렴의 뜻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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