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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00화 (200/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00 - 대비

“그래. 어쩔 수 없어. 유긍달을 사면시키는 수밖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나는 결국 왕무의 말에 수긍했다.

‘거란과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 숙청을 할 수는 없어. 그러면 전장에 나서는 대호족들이 우리를 못 믿을 거야. 에잇. 유긍달 그 사람도 웃겨. 괜히 똑똑한 척을 해서 사람 마음 불편하게. 다만 군영에서 내가 감시를 잘 해야지. 수상한 짓을 저지르면 군법으로…….’

내 말을 들은 왕무는 기쁜 기색이었다.

“연우 네가 그리 말해주니 고마워.”

“유긍달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고맙다니?”

나는 황당해져서 왕무를 바라보았다.

‘착해도 너무 착한 거 아니야? 누가 보면 왕무 외할아버지가 유긍달인 줄 알겠어.’

“꼭 유긍달 문제뿐만 아니라. 북벌도 결국 나를 위해…….”

미안한 표정을 짓는 왕무를 보고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건 고려를 위한 북벌이야.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도 이 북벌은 해야만 하고.”

나는 역사학도인만큼 향후 수천 년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북벌을 해서 옛 선조들의 땅을 회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지금이지. 이후엔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니. 나는 이런 대의를 따를 수밖에 없어.’

물론 전쟁이 무섭긴 했다. 왕무와 함께 알콩달콩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서면 더 큰일 난다. 끝까지 밀어붙여야 해.’

그런 계산을 하며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내 결의를 왕무도 느낀 것 같았다. 왕무 역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

“그래. 어쨌든 우리가 유긍달을 풀어주면 북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더 좋지. 아마 유긍달이 우리 속내를 읽었던 것처럼 중신들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읽을 거야.”

나는 일을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무슨 일이 곧 일어난다고 서서히 전운을 고조시켜야지. 그래야 막상 북벌의 때가 됐을 때 사람들이 놀라지 않아.’

* * *

나와 왕무는 유긍달을 사면시켜 줬다. 확실히 이 사면령의 반향은 컸다. 여러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드디어 945년이 됐다.

‘드디어 내년엔 백두산이!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리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북벌 준비를 밀어붙였다. 어전에서 일을 마치고 처소에 쉬고 있는 나에게 시녀들이 달려왔다.

“상산백께서 왕후 마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버님이? 그래.”

임희가 나를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도 이제는 우리 부부의 의도를 아셨구나.’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임희가 넌지시 나에게 말했다.

“잡찬이 사면됐다더구나. 그리고 왕규는 이 소식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평소 왕규의 성격을 고려하면 반드시 격하게 반응했어야 하는데. 요사이 왕규는 중원의 소식을 듣느라 정신이 없다. 내가 왕규를 통해 들었는데 이제는 진나라와 거란이 마침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가지를 암시하는 듯한 임희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임희는 내 모습을 보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마. 태조께서 평생 꿈꾸셨던 일을 우리가 이루게 됐다! 연우 네가 나를 첫 번째로 놀라게 했던 때가 떠오르는구나.”

“그게 언제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연우 네가 산에서 구덩이에 빠져 다치고 난 뒤의 일이다. 내가 그 이후 항상 너를 걱정했는데 어느 날 연우 네가 발해가 망할 것 같다고 말했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야율아보기에 의해 발해가 무너졌다.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그 이후로도 연우 너는 놀라운 식견으로 태조 대왕과 폐하를 보좌했다.”

임희가 나를 칭찬했다.

“그건.”

나는 임희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했다.

‘그건 미래에서 역사서를 읽고 와서 가능했던 건데. 이걸 아버님께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런데 임희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나라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야 할 때 같은데 연우 너의 재주를 믿겠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임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북벌이 시작되면 나는 일개 대학원생으로 돌아가는 건데. 밑천이 다 떨어진 셈이야. 그래도 아직 밑천이 남아있는 것처럼 굴어야 사람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겠지.’

* * *

임희의 방문 뒤에는 왕규도 입궁했다. 지금 중원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그에 대해 나와 왕무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석중귀가 이끄는 진군이 거란군의 침입을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역시 진나라의 저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왕규는 신이 나서 우리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래 진나라가 선전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거란군도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란군은 여름 무더위에 익숙하지 않으니.”

왕무 역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왕무는 스스로 군사지휘 경험도 있고 대광현과의 대화를 통해 거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름 정확히 승부의 맥을 짚고 있었다.

“어쩌면 진군이 자력으로 중원 땅에서 거란군을 섬멸시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고려군이 쉽게 옛 발해 땅을 접수할 수 있지요!”

진나라군의 분전에 흥분한 왕규가 외쳤다. 왕규는 외교통이기도 하고 진나라에 친한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상황을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글쎄? 그건 어렵다. 진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으니 인구도 많고 땅도 커서 호락호락 무너지진 않지만 거란이 워낙 막강하니 결국은 거란이 이길 것이다.”

나는 왕무가 오판을 할까봐 재빨리 개입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몇 년 동안 꾸역꾸역 버티다가 진나라가 패했다.

“그, 그럴까요?”

내 말을 듣고 왕규는 실망한 어조로 물었다.

“왕후의 말이 옳은 것 같다. 어쨌든 서경에 어느 정도 군사는 준비시켜두고 상황을 살펴야겠다. 우리 고려가 내년에 군사를 내겠다고 진나라 측과 약조를 해놨다. 하지만 전황이 어찌 흘러갈지 모르니. 만약 진나라가 크게 밀린다면 일부 군사들은 압록강으로 진격시켜 거란의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왕무가 내 말을 듣고 그리 방침을 정했다.

확실히 왕무의 말이 옳은 것 같아 나는 내심 흐뭇했다.

‘내가 개입해서 진나라와 거란 사이의 전쟁 시기를 좀 늦췄어. 종합적인 국력을 고려하면 진나라가 몇 년 버틸 확률이 높지만 상황이 진나라에 불리하게 돌아갈 가능성도 있어. 그때는 우리도 일부 군사를 예정보다 일찍 압록강으로 보내서 거란을 놀라게 해야지. 그리고 거란의 시선이 그쪽에 쏠릴 때 우리가 두만강을 건넌다면! 역시 전장에선 왕무의 판단을 믿어도 되겠어. 전쟁에 상당히 능하니.’

왕무의 말을 들은 왕규 역시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소신은 중원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더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진나라 쪽의 사정이 어려워지면 즉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라. 진나라 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서경의 군사들을 진출시키겠다.”

왕무의 말을 들은 왕규는 절을 하며 그대로 물러났다.

‘이제는 슬슬 구체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준비해야 할 단계까지 왔어. 여진족 문제도 처리해야겠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왕무를 보고 말했다.

“북방에 가서 여진족들을 살피는 유긍, 유관유를 불러야 겠어. 개경에 있는 유경도 부르고. 여진족을 포섭하는 일은 유금필 대장군의 아들들의 도움을 받아야지.”

“그래 이젠 그럴 때지. 내일 바로 명을 내릴게.”

왕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 * *

궁안의 전각에서 유긍, 유관유, 유경 삼형제는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폐하와 왕후 마마를 뵙습니다.”

“그래. 멀리서 달려오느라 고생이 많다.”

왕무가 우선 그들을 격려했다. 나와 왕무, 그리고 유씨 삼형제 사이에는 커다란 지도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두만강과 그 인근의 지세가 그려진 지도였다. 여기저기 살고 있는 여진 부족들의 이름이 적힌 패가 지도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다. 여진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하려고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지도가 정확한가? 한림원 학사들이 그대들로부터 온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왕무의 말을 듣고 삼형제의 대표로 나선 유긍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세합니다. 저희들이 북방으로 돌아갈 때 이 지도의 사본을 하나 더 만들어서 가져가고 싶습니다. 그럼 북방의 일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유긍은 지도를 보고 욕심이 나는지 냉큼 말했다.

“그러도록 하라.”

왕무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나도 끼어들었다.

“여진족들이 배도 타고 다닌다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이 두만강이나 동해에서 고기잡이도 합니다.”

“그럼 여진 부락들이 가지고 있는 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여진 부락 인원들이 다 탈만 한가?”

내가 그 점을 캐묻자 유긍이 손사래를 쳤다.

“고기잡이는 여진 부락 내에서 하는 사람들만 합니다. 그 사람들의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배도 그냥 조각배 수준입니다. 여진족의 인구가 적은 편이지만 다 타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럼 우리 고려에서 여진족들을 위해 큰 배들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찌 생각하나? 그들이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을까?”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진족들에게 선물을 주려면 차라리 쌀이나 생필품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큰 배는 그들이 쓸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여진족들에게 선물을 더 준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 고려를 더 따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먹고 살게 지금 수준으로 물자를 공급하며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 말을 듣고 유긍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데 나는 여진족들에게 배를 선물하고 싶은데?”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예? 배는 쓸모가 없는데…….”

유긍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곁에서 동생인 유관유가 슬쩍 유긍의 소매를 당기더니 말했다.

“왕후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유긍도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되는지 납작 엎드렸다.

“그래. 개경에서 이 일을 지휘할 목수들을 파견하겠다. 인부들은 현지에서 모집하라. 아예 여진족들에게도 생필품을 좀 쥐어주며 이 일을 거들게 해. 최소 50명 이상이 탈 수 있는 배를 건조해라. 태조 이래 북방에 계속 군량을 비축했으니 일부를 헐면 비용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예 붓을 들고 펼쳐진 지도의 이곳저곳에 점을 찍었다. 이곳에 배를 건조하라는 의미였다. 점이 찍힌 위치들을 본 유긍은 더욱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유긍은 슬며시 왕무 쪽을 바라봤다.

“왕후의 말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라.”

유긍에게 왕무가 그런 명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예, 그러니까 왕후 마마께서 지정하신 곳들을 적어놓겠습니다. 지필묵을 좀.”

“지도의 사본을 만들 때 이 위치들을 표시해서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왕무가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나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한이 정해진 일이니 서둘러라. 내년 5월 전에는 반드시 일을 마쳐야 한다. 실제로 배가 뜰 수 있도록 정성껏 만들어라. 그리고 그 이후에는 여진족들에게 배의 관리를 맡겨라! 배를 완성한 이후에는 굳이 고려의 관리들이 그것을 살필 필요 없다.”

“명을 받듭니다.”

기한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유씨 삼형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입을 모아 힘차게 대답했다.

“기한이 촉박한 만큼 물자는 넉넉하게 대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해진 나는 그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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