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9 - 사면
최언위의 장례에는 고려의 유력한 호족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다. 나와 왕무도 직접 최언위의 저택에 방문했다.
“언니. 선생님께서도 떠나시다니. 요새 이런 일이 너무 잦아요.”
우리를 따라온 오지수가 살짝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왕건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최언위마저 이리되자 마음이 괴로운 것 같았다. 함께 온 김장명이 그런 오지수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조문을 끝내고 나서 나와 왕무는 잠시 최언위의 저택에 앉아 있다가 가기로 했다.
‘예의상 그냥 조문만 딱 끝내고 갈 수가 없으니.’
그래서 나와 왕무는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며 조문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저택의 하인이 살며시 들어와 외쳤다.
“왕요 태자 저하, 왕소 태자 저하께서도 조문을 마치셨습니다.”
“…….”
장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왕무가 왕위에 오른 후 왕요, 왕소는 충주원에 틀어박힌 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최언위는 왕요, 왕소도 가르쳤다. 스승의 죽음은 외면할 수 없는지 왕요, 왕소 태자도 조문을 온 것이다.
“들어오라고 하라.”
왕무가 흔들림 없는 어조로 그런 명을 내렸다. 비록 왕요, 왕소와 어색한 사이라고 해도 장례식장에 와서까지 그런 티를 내기 싫은 모양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장내에 들어선 왕요와 왕소가 왕무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래 오래간만이다.”
왕무는 활짝 웃으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나는 왕요와 왕소를 보고 큰 위협을 느꼈다.
‘어느새 저리 자랐는지.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지. 왕요가 이제 20대가 됐으니. 그나마 유긍달이 날아가면서 원래 역사에서처럼 유력 호족들과 혼인을 못해서 다행이다. 허나 충주의 세력 자체가 크니.’
어쨌든 왕요와 왕소 모두 왕족으로서 서열이 높았다. 조문객들이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서 왕요, 왕소 형제는 우리 부부 바로 아래 앉았다.
나는 더욱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답답하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
그런데 나와 달리 왕무는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요새는 뭘 하고 지내니?”
“충주원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왕요가 왕무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오지수도 곁에서 끼어들어서 얼핏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역시 다 형제, 남매지간이라서 말이 통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속이 너무 좁은 건가? 하긴 유긍달 문제도 이젠 슬슬 처리해야 할 때지. 이 상태를 지속할 순 없어. 나와 왕무가 북벌에 나설 때 유긍달이 연금 상태라도 개경에 있으면 대단히 위협적이다. 그냥 왕규의 말대로 제거해야 하나? 아냐. 그러면 난리가 날거다.’
충주 세력은 유긍달이 실각한 뒤에는 일체 활동을 중단하고 숨을 죽이고 지냈다. 왕요, 왕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치면 역풍이 엄청 날거야. 거기에 애초에 거란과의 결전을 앞두고 숙청을 할 수도 없어. 결국 유긍달도 전장에 데리고 나가야 해. 왕요, 왕소까지 포함해서. 군영에 데리고 있어야 통제가 쉽지. 다만 그러기 위해선 유긍달의 가택연금을 풀어줘야 하는데.’
그리고 애초에 나와 왕무가 거느린 세력으로 고려를 통제할 수는 있었지만, 북벌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전 고려의 힘을 모아서 거란에 도전해야 했다.
‘결국 충주 세력도 북벌에 동참시켜야 해. 동남 3주의 물자와 병력을 개경 인근으로 집결시키려면 충주 세력의 도움이 필요하다. 왕건이 괜히 유긍달을 중용하고 그들이 세력을 키울 수 있게 묵인한 게 아니야.’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왕무와 오랜 세월 같이 지내서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왕무는 딱히 위선적인 성격도 아니고 왕건이 생전에 한 말도 있고 해서 정말 형제들과 잘 지내려고 하고 있어. 조만간 유긍달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해 봐야지. 어쨌든 최언위도 세상을 떠나고 944년도 거의 끝나가는구나. 946년에 백두산이 폭발하니. 북벌까지 얼마 안 남았어. 나와 왕무의 힘만으로 북벌을 하는 거야!’
나는 새삼 두려워졌다. 왕건, 유금필, 최언위 같은 어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우리 대신 결단을 내려줄 사람도 없고 역사를 바꾸는 북벌이니 기존 역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 오롯이 나와 왕무의 힘만으로.’
나는 부담감 때문에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 * *
조문을 마치고 처소에 돌아오자 왕무가 나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다음 한림원령으로는 김악이 좋겠지?”
“그렇지. 나이나 학문으로 봐서 김악만한 사람이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악은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고 이후 왕건의 심복으로 여러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다.
‘김악이 대내학사로서 수십 년간 일했는데 기밀이 샌 적이 한 번도 없어. 참 신기해. 평소 행동을 보면 말실수를 해서 기밀을 유출할 거 같은데 한 번도 안 그랬으니.’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긍달도 어쨌든 한 번은 만나봐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도 사면을 시키든가 해야지.”
“정말? 그래도 돼?”
왕무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북벌을 위해선 어쩔 수 없지.”
“나는 연우 네가 요와 소를 보고 계속 한숨을 쉬어서 많이 걱정했어. 충주 세력을 못 날려서 화가 쌓인 줄 알았는데.”
“…….”
나는 왕무의 예리함에 놀라서 말을 못 이었다.
‘어느 정도 그런 마음도 섞여 있었는데 그걸 또 눈치챘어. 이건 좀 소름돋네.’
그 사이 왕무가 말했다.
“몇 년 사이 고려의 뛰어난 인재들을 여럿 잃었어. 큰 나랏일을 볼 만한 사람이 드물어. 유긍달을 저리 가둬두는 것은 국가적 손해니.”
왕무도 나처럼 유긍달과 충주 세력의 능력을 이용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내일 유긍달을 한번 만나보자. 유긍달도 한림원령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야. 도의상 조문을 가야지. 조문을 하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가택연금을 잠시 풀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궁에 들어오게 하자.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어.”
나는 그런 제안을 했다.
“좋아. 그게 모양새도 좋고. 내일 시위들을 보내서 유긍달을 데려와야겠어.”
* * *
나와 왕무는 나주원의 전각에서 유긍달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왕무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시위들이 유긍달을 데려왔다.
잠깐 걷는데도 유긍달은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몇 년 못 봤는데 그사이 많이 말랐군. 연금된 상태라서 근 몇 년간 아무 정보도 못 받고 지냈으니 초조하겠지. 왕건이 직접 시위들을 보내서 유긍달을 가둬놨으니 이건 확실하다. 유긍달은 지난 몇 년간 철저히 고립됐어. 지금도 무서울걸. 나와 왕무가 유긍달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으니.’
나는 약간은 의기양양해져서 유긍달을 내려다보았다.
“폐하, 왕후 마마.”
유긍달이 계속 몸을 휘청거리면서 우리에게 절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은 어떤가?”
왕무는 유긍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긍달이 훌쩍 마른데다가 인사도 겨우겨우 하니 왕무는 약간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왕무가 착하긴 착하다니까. 유긍달의 건강도 챙겨주고. 유긍달이 그동안 한 짓이 있는데 어쩜 왕무는 이리…….’
나는 왕무의 마음씀씀이에 다시 한번 놀랐다. 내가 멍하니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유긍달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말했다.
“잠시 긴장해서 그랬습니다. 소인은 멀쩡합니다.”
나는 약간 놀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를 들으니 원기왕성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왕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가 죄를 짓긴 했으나 삼한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공이 많았고, 내 동생들인 왕요, 왕소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국가의 원로인 것을 감안해 내가 그대를 사면해 주려고 한다. 이제는 편히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나는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왕무를 바라보았다.
‘왜 그걸 벌써 말해? 시간을 좀 더 끌며 유긍달을 괴롭히다가 말해주면 될 것을.’
그런데 그 순간 유긍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나 폐하께서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거란을 토벌할 생각이시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경악해서 유긍달을 내려다보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유긍달의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설마 연금된 상태에서도 몰래 바깥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유긍달의 모습을 보고 그리 꾸짖었다.
‘아니 몇 년간 갇혀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우리의 북벌을 눈치챌 리가? 무슨 수작을 부렸구나.’
나는 화가 나서 유긍달을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날 왕후 마마 손에 소인이 패한 이후 태조께서 직접 보낸 시위들이 소인을 감시했습니다. 그 감시가 철통같았습니다.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태조 대왕께서 붕어하셨다는 것과 대왕 폐하께서 새로이 즉위하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건 알려주더군요.”
유긍달이 여유롭게 답했다.
“그런데 어찌 북벌 이야기를 꺼냈는가?”
왕무가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소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오늘 소인을 불러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국적으로 민심과 힘을 모으기 위해 소인을 용서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은 거란과의 전쟁 외에는 없습니다.”
유긍달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서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역시 나와 왕무가 실수를 한 것인가? 그냥 죽이는 게 낫겠다. 운 좋게 한번 유긍달을 패배시켰지만 아직도 그 지략이 그대로니. 지금 이 자리엔 나와 왕무, 유긍달만 있어. 사면을 물리고 바로 제거를 해야…… 잠깐? 근데 왜 유긍달은 자신의 재주를 드러낸 걸까? 왕무가 사면을 이미 해줬으니 그냥 말없이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됐다. 그러다가 왕무의 얼굴을 바라봤는데 왕무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퍼뜩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래 유긍달은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며 아픈 시늉을 했어. 왕무는 그런 유긍달의 모습을 보고 걱정했지. 단순히 왕무가 착해서 그런 게 아니야. 원래는 유긍달에게 북벌 준비를 맡기려 했는데 너무 노쇠한 모습을 보이니 근심이 된 거지. 그래서 왕무는 유긍달을 원로라고 부르며 그냥 풀어주고 일을 안 시키려고 한 거야. 젠장! 유긍달은 그런 왕무의 심리를 간파하고 막판에 자기 재주를 자랑했군. 유긍달도 그냥 원로 대접을 받으며 편히 살기는 싫고 큰일에 동참해 정치적으로 재기하고 싶은 거야.’
여러모로 불쾌해진 나는 유긍달을 노려보았다.
“음, 알겠다. 물러나라.”
왕무는 그런 명을 내렸다. 밖에서 시위들이 왕무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들어와 유긍달을 데리고 나갔다.
“역시 유긍달은 예전 그대로야. 그런데 그냥 사면시켜 줄 거야?”
나는 왕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나중에 우리에게 위협이 되겠지?”
왕무가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그 재주를 보면 유긍달을 안 쓸 수도 없어. 폐주가 그렇게 아버님을 의심하면서 끝까지 중용했고, 아버님도 견훤을 그리 싫어했는데 상보로 모셨지. 나도 어쩔 수 없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쓰는 수밖에.”
왕무가 나를 보며 말했다.
“…….”
왕무의 말을 듣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왕무의 말이 옳긴 해. 왕건도 싫어하는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 다 데리고 갔다. 나 참. 하아.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