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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97화 (197/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7 - 검차

어전에서 중신들과 논의를 마친 나와 왕무는 후다닥 한림원으로 향했다.

‘왕건이 왜 한림원에 자주 왔는지 알겠네. 대호족들이 워낙 억세니.’

왕무의 왕위만 흔들지 않을 뿐 자기 잇속을 챙기는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오늘만 해도 열병식 포상 문제로 난리가 났다.

어떻게든 자기 자식, 손자들을 포상명단에 넣으려는 대호족들 때문에 왕무는 어전에서 하루 종일 시달렸다.

“괜찮아?”

나는 지쳐 보이는 왕무의 손을 쥐며 말했다. 새삼 어전에서 왕무를 모른 척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문제없어.”

내 손에 깍지를 낀 왕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중신들도 왜 그러는지? 왜 이리 드센지 몰라? 말 좀 잘 듣게 만들어줄까? 적당히 정신 차리게. 일을 하나 꾸며서.”

내가 짐짓 그리 말하자 왕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그래도 전장에서는 하나같이 믿음직한 사람들이야. 뭐 오늘도 그만하면 괜찮았어. 여러 중신들은 그리 나올 수밖에 없지. 거란과의 전쟁을 앞두고 사람들의 사기를 꺾을 수는 없어.”

왕무의 넓은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서 나는 감탄했다.

‘어쩜 사람이 이럴 수 있지? 하긴 그러니까 결혼하기 싫다고 온갖 일을 다 벌였던 나를 기다려 줬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 일하러 가기 싫다.’

왕무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냥 당장 왕무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처소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무를 보는 와중에 북벌도 준비해야 하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왕무와 함께 한림원에 들어섰다.

“폐하와 왕후 마마를 뵙습니다.”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림원 학사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나와 왕무는 왕건이 앉던 자리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여기에 앉으니 왠지 모르게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왕건이 살아 있을 때 내가 앉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한림원 측에서는 아예 거기 있던 책상을 치우고 책장을 놓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놓은 걸까? 아니면 왕후가 일하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일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한 걸까?’

나는 한림원 학사들에게 이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관두었다. 왕후가 그런 걸 묻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부담을 느낄 것이다.

자리에 앉은 나와 왕무는 학사들이 준비해 온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다. 구 발해령의 지리와 행정구역에 관한 정보였다.

한림원 학사들을 시켜서 고려에 망명한 발해인들의 증언도 모으고 있었다. 특히 발해가 멸망할 때 있었던 전투에 대해서 정보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세워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 자료들을 모으고 분석하는 거야.’

그 생각에 내가 자료들을 읽는데 곁에서 왕무가 물었다.

“한림원령은 아직도 집에서 쉬는가? 어전에도 며칠간 나오지 않고.”

“한림원령은 몸살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악이 대답했다.

“설마 큰 병에 걸린 것 아닌가?”

왕무가 걱정스레 묻자 김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신이 병문안도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한림원령은 표정도 차분하고 앉아서 책도 읽고 있었습니다. 다만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하는데.”

“한림원령이 빨리 나와야 하는데.”

왕무의 중얼거림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최언위는 큰 병에 걸린 게 맞아. 왕건이 죽은 다음 해에 최언위가 죽으니.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니 운명을 바꿀 수도 없고. 내가 의학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미래를 안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신라삼최 중 마지막으로 남은 최언위마저 수명이 다한 것이다.

“연우야 너도 걱정되지. 가벼운 증상이라도 이리 오래 안 낫다니.”

왕무는 한숨을 쉬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그렇지.”

나는 왕무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왕무는 그런 내 마음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한림원에만 있지 말고 나가자. 밖에서 군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그러고 보면 진나라 사신이 떠난 뒤에 내내 궁과 어전, 한림원을 오가며 일만 했으니.”

그러더니 왕무는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현장을 좀 보자.”

나도 차라리 밖을 둘러보면 괜찮을 것 같아서 일어났다. 왕무는 김악에게 계속 자료를 모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나와 함께 군사들이 훈련을 하는 군영으로 향했다.

* * *

열병식을 계기로 고려 조정은 다시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신들은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십 년 간의 내전을 거친 사람들이라 평소에도 군사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폐하! 일이 많으신데 이리 오셨습니까?”

군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던 박술희가 우리를 반겼다. 박술희는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곤충튀김을 먹고 있었다.

‘무슨 곤충인지 물어볼까? 아니야. 그러지 말자. 저쪽에 아예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그 대신 나는 박술희 옆에 있는 대광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와 왕무는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대광현이나 발해 사람들도 적극 참여시켰다. 북벌을 할 때 고려군 선봉에는 대광현이 반드시 서야 했다.

그래야 발해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발해 유민들을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대광현은 나와 왕무에게 정중히 군례를 올렸다.

‘옛날에는 그나마 나와 왕무에게 농담도 하고 편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왕무가 왕이 되고 나서는 철저히 예의를 지키네.’

대광현이 처신을 잘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많이 지쳐 보입니다. 괜찮습니까?”

나는 대광현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대광현은 왕무보다는 못 했지만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간만에 보니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망한 나라를 회복시켜 보겠다고 고려에 망명까지 했는데 몇 년간 성과가 없으니 마음이 무겁겠지.’

왕건이나 왕무나 대광현과 발해인들을 후대하긴 했으나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여태 지지부진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발해를 되살리는 것도 이젠 불가능할 거야. 발해가 멸망한 지 벌써 18년이나 지났나?’

대광현은 마음고생이 심할 것이다.

‘고려가 북벌을 해서 옛 발해령을 회복한다고 해도 다시 발해를 세워줄 수는 없어. 그 영토를 우리가 흡수해야 해. 대광현에게 영지를 일부 주고 후대해서 고려 귀족으로 만들어야지. 대광현도 고려에 온 지 오래됐으니 결국 그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어.’

나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대광현에게 더 미안해졌다. 그래서 대광현을 위로할 겸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고안한 검차는 쓸 만합니까?”

나는 연병장 한쪽에 있는 검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역사학도로서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검차를 만들 것을 왕무에게 건의했다.

검차는 앞쪽에 검을 꽂아놓은 수레였다. 검차를 쭉 늘어세우면 야전에서 거란 기병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었다.

‘검차는 실제 역사에서 고려가 거란과 전쟁을 벌일 때 꽤 유용하게 써먹었으니 북벌에도 도움이 될 거야.’

연병장에서 보병들이 장수들의 명령에 따라 검차를 움직여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려 기병들은 재빨리 그 검차 뒤에 숨었다.

“쏴라.”

그리고 가볍게 무장한 고려 보병들은 검차 뒤에서 화살을 쏘고 납탄으로 돌팔매질을 했다. 야전에서 거란 기병들에게 밀릴 때를 대비한 훈련이었다.

“상당히 쓸 만합니다. 검차를 운용하는 훈련을 제대로 하면 보병들도 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참으로 왕후 마마의 지략에는 놀랄 뿐입니다.”

대광현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실제로 거란과 싸워본 사람이 이리 말해주니 나는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대광현 곁에서 부자연스럽게 밀려나는 기분을 느꼈다. 왕무가 은근슬쩍 나와 대광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자 태자와 나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 긴히 나눌 이야기가 많다.”

그러더니 왕무는 자기가 나서서 대광현과 이런저런 전략전술에 대해 논의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다만 왕무가 대광현을 상대로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무도 삼한일통전쟁을 거친 무장 중 하나였다. 그래서 대광현과 함께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정도면 고려군도 야전에서는 거란에 맞설 수 있지 않나?”

왕무가 물었다.

“고려군의 숫자가 많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지금 고려기병의 실력은 거란에 미치지 못합니다.”

대광현이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 기병들의 실력이 신라 말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그런데도 거란만 못 하단 말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박술희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

“우리 발해 기병들도 요동에서 거란과 싸우며 실전경험을 쌓았지만 끝내 저들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거란 무리들의 기동력은 무섭습니다.”

그 말을 하며 대광현은 침통하게 두 눈을 감았다.

“일리천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1만기 정도 되는 여진기병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떤가?”

왕무가 대광현에게 물었다.

“여진기병들을 부릴 수 있다면 능히 거란 무리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리천에서야 8만에 가까운 고려군이 있었고 백제와의 싸움도 쉬웠습니다. 여진기병 입장에서는 그냥 고려 조정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재물을 받아 돌아가는 것이 이득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진족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고려가 거란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여진기병들을 동원한다면. 그들이 배반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습니까?”

대광현이 그리 반문했다.

“흐음. 배반이라면?”

“지금 여진의 여러 부족들은 독자적으로 외교를 하며 거란에도 사신을 보내고 교류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려운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거란이 사람을 보내 여진 부족들에게 더 많은 재물을 건네며 달래면 어찌합니까? 전장에서 여진 기병들에게 의지하고 있다가 그들이 마음을 바꾸면 아군이 궤멸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해 조정도 결국 여진 기병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여진족들을 확실히 통제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

경험에서 우러난 대광현의 충고에 왕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광현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여진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북벌을 할 수 있어. 그 뛰어난 기병력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어쨌든 대광현의 충고를 듣고 북벌을 준비하다 보니 뭔가 가닥이 잡히는 것도 있다.’

나는 유금필이 죽을 때 고려군이 동쪽으로 나가야 할지 서쪽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물었다. 그때 유금필은 나와 왕무가 구체적 상황을 보고 알아서 판단을 내리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유금필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고려군은 두만강을 건너 동쪽 지역을 먼저 장악하는 게 좋겠어. 요동은 거란이 중시하는 땅이라 거란군이 꽤 배치되어 있다는 첩보가 있다. 거기에 대광현의 말대로 거란의 기동력이 무섭다. 거란군이 무슨 계략을 써서 진나라군을 붙잡아 놓고 주력을 돌려 요동으로 달려올 수도 있어. 중원과 요동은 가까운 편이니 그런 묘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고려군이 동쪽으로 진출하면 중원에서 전투를 벌이는 거란군과 거리를 벌릴 수 있어.’

나는 오늘 처소에 가서 왕무에게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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