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96화 (19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6 - 시기

“대왕! 지난번에는 우리 진나라가 고려의 협공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명운을 걸고 거란과의 전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만약 거란이 진나라를 무너뜨린다면 그다음 목표는 고려가 될 것입니다. 지금 고려가 동쪽에서 거란을 흔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곽인우가 시치미를 떼는 왕무에게 그리 호소했다.

“허허허. 그렇게까지 말하니…….”

왕무는 말끝을 흐리며 내 쪽을 곁눈질했다.

“고려가 설사 군사를 낸다고 해도 우리 태조 대왕의 삼년상을 모두 치른 뒤에야 가능합니다.”

내가 곽인우를 향해 말했다.

“아! 그 문제가?”

내 말을 듣고 곽인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하고 곽인우에게 말했다.

“삼년상이 아니라도 우리가 거란을 칠 군사를 준비하는데 또한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이 한시가 급합니다.”

“그러니 귀국이 거란을 상대로 시간을 좀 더 끄는 것이 어떻습니까? 협상으로 문제를 풀 것처럼 거란에 사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군비를 더 확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곽인우에게 그리 권했다.

나와 왕무가 굳이 곽인우를 상대로 한번 튕긴 것은 군사를 움직일 시기를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946년 겨울 무렵에 백두산이 폭발한다. 고려도 그 기회를 틈타 진군해야 한다. 그런데 원래 역사에서 진나라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한 것도 딱 946년 겨울이야.’

물론 원래 역사대로 흘러가도 고려가 북벌을 할 만하긴 했다.

‘거란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도 중원 땅을 점령하려고 계속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진나라 각 지방의 장군들이 저항하는 바람에 결국 거란이 퇴각한다. 그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고려가 진출해도 일을 이룰 수는 있다. 하나 가장 좋은 것은 역시나 진나라가 오래 버텨주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진나라가 거란을 상대로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곽인우를 바라보았다. 곽인우는 깊은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이미 우리 진나라와 거란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곽인우가 그리 말했다.

“다만 몇 개월이라도 시간을 끌어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를 맞추면 좋습니다.”

내가 계속 곽인우를 부추겼다. 진나라가 몇 달만 더 버텨줘도 고려에 유리했다.

“제가 우리 진나라에 돌아가서 시간을 끌자고 폐하께 말했는데 고려에서 때가 되어도 군사를 움직이는 않는다면 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곽인우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 고려가 반드시 군사를 낸다는 것을 국서에 써서 보낼 것이니 걱정 마시오. 다만 우리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시간을 끌어달라는 것이오.”

“대왕께서 문서로 보증해 주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대왕과 왕후의 뜻을 우리 조정에 알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고려에서 얼마나 되는 군사를 일으킬 것인지?”

곽인우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때가 되면 내가 직접 고려의 정병 2만을 뽑아 거란을 치겠소.”

왕무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나와 왕무는 2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생각이었지만 곽인우 앞에서는 짐짓 고려군의 규모를 줄여서 말했다.

나와 왕무가 미리 의논한 사안이었다.

‘우리가 엄청난 대군을 동원한다고 말하면 진나라가 긴장이 풀려서 열심히 안 싸울 수도 있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2만을 일으킨다고 하면 진나라 측에서 용기를 얻어 열심히 싸우겠지. 그런데 왕무가 생각 외로 거짓말을 잘하네. 설마?’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왕무를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2만이나? 고려에서 정말 그만한 군사를 내주신다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간을 끄는 일은 제가 돌아가서 잘 처리해 보겠습니다. 2만의 고려군이 거란의 후방을 흔든다면…….”

곽인우는 흥분한 기색이었다.

“일을 잘 처리해 주시오. 내가 말라 대사를 연락책으로 함께 보낼 것이니 중간에 논의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해주시오.”

왕무가 시원시원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말라 스님이 우리를 향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대왕만 믿겠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물러나겠습니다.”

곽인우가 절을 하더니 물러났다. 말라 대사도 합장을 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남은 왕규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진나라와 이리 약조까지 했으니 우리 고려는 반드시 군사를 움직여야 합니다. 정말 군사를 일으킬 작정이십니까?”

“그렇다.”

왕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여러 중신들에게는 언제 말씀하실 것입니까? 아마 이 일을 공개하면 조정에 큰 논란이 일 것이…….”

왕규는 고민이 되는 것 같았다.

“중신들에게는 당장 알릴 필요가 없다. 그러니 대광도 한동안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내가 그런 왕규에게 당부했다.

“예? 중신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는다면. 미리미리 논의를 해서 국론을 모아놔야 군사를 일으킬 때 좋지 않겠습니까?”

왕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국론이 하나로 모일 것이니 그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진나라 쪽이다. 그러니 대광은 긴밀하게 진나라 조정의 동태를 살피도록. 진나라와 거란과의 전쟁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정보를 수집하라.”

나는 진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전적으로 왕규에게 맡겼다. 이 일은 중요하고 향후 왕규가 입지를 강화하는 데도 좋았다.

“알겠습니다. 왕후 마마만 믿습니다. 그럼.”

여러모로 고민하던 왕규는 마침내 내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지 더 이상 걱정을 늘어놓지 않고 물러났다.

전각 안에는 나와 왕무만 남게 됐다.

“휴우.”

모두가 나서자 왕무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곽인우나 진나라 쪽도 사정이 어려운데 우리 뜻대로 저들을 움직이려고 이리 압박을 하니 왠지 마음이 불편해. 거짓말까지 해야 하고.”

중대한 외교적 사안이라 태연한 척했지만 선량한 왕무는 곽인우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뭐 진나라 쪽도 잘되라고 그런 건데. 뭐. 시기를 맞춰야 협공의 효과가 극대화되지.”

나는 그런 왕무를 보니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게 되었다.

‘역시나 왕이 돼도 왕무는 변함이 없구나. 그래 내 앞에서는 이리 속을 터놔야 맞지! 헤헤헤. 그리고 어쨌든 진나라와의 군사동맹도 체결되기 직전이다. 이젠 정말 물러설 곳이 없네.’

아직 고려 중신들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진나라와 문서를 주고받고 약조를 했으니 이제 거란과의 북벌은 피할 길이 없었다.

‘물론 군사 2만을 일으켜서 강동 6주 지역만 점령하고 버티기에 들어가도 약속은 지킨 거야. 그러면 거란과의 결전도 피할 수 있고. 하나 그때가 오면 왕무는 그런 걸로 만족을 못 하겠지. 역시 거란과 한판 승부를 벌일 때가 다가오네. 내, 내가 진짜 역사를 바꾸게 됐구나! 그런데 왕건도 없고 유금필도 없이 싸워야 하다니! 나와 왕무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해.’

나는 가슴이 뛰고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결전의 때가 오면 꼭 왕무를 따라가야지. 개경에서 왕무를 기다리기만 하면 나는 못 버텨. 현대인으로서 내 지식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후방에 있다가 적절할 때 도움을 못주면 안 되니.’

그러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왕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왕무의 온기를 느끼니 떨리는 몸이 진정됐다.

“연우야.”

왕무 역시 나를 끌어안더니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그런 왕무에게 호응했다. 거란과의 싸움을 앞두고 두려웠는데 어느새 그 공포가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날 나는 왕무와 함께 어전에 나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서 중신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들은 어젯밤에 나와 왕무가 뭘 했는지 모르겠지? 내가 이런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그 생각을 하니 나는 문득 민망해졌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잇. 일을 하자. 일을 해. 잡생각을 하느라 중신들이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못 들었네.’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사람들이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대장군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북방의 여진족들을 그때만큼 통솔하기 어려워 걱정입니다. 대장군의 아들인 유긍, 유관유 형제를 북방으로 보냈는데 영 예전 같지 않습니다.”

박술희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 형제의 잘못은 아닙니다. 원체 여진족은 다루기 어려우니. 어찌 보면 일리천 전투 때 우리 고려가 여진 기병 1만을 동원했던 것은 태조 대왕과 대장군의 위엄 덕이었습니다. 이제는 태조 대왕도 안 계시고 대장군도 없으니. 나나 장군이 가도 여진족을 복속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역시 고명한 무장인 박수경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북방에서 여진의 무리들이 우리 통제를 벗어났다면 어느 정도인가? 우리 국경을 침범하는가?”

왕무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여진 문제는 가볍게 다룰 사안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곡식도 받아먹고 물자 지원도 받고 하니 어느 정도는 우리말을 따릅니다. 대장군과의 인연 덕에 유긍, 유관유 형제들과는 친근하게 지내긴 합니다. 다만 예전처럼 여진 기병을 전투에 동원한다든가 하는 일은 어려워졌습니다. 저들도 일리천에서 우리 고려군의 군세를 봤는데 국경을 침범할 생각은 못 할 겁니다. 다만 예전처럼 저들을 부릴 수 없으니 소장은 아쉬워서.”

박술희가 재빨리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하지만 왕무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유금필이 거란과 싸울 때는 어떻게든 여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해 줬는데. 그 유금필이 사라지니 여진을 통제할 수가 없구나. 일리천에서처럼 딱 1만 명의 여진기병만 우리를 따라와 줘도 좋은데. 그러면 거란과의 야전도 시도해 볼 수 있어. 고려 기병들이 숫자를 채우며 전선을 유지하고 여진 기병들을 적절히 운용만 하면. 이거 참. 방법, 방법을 떠올려야 해. 내가 왕건에게 부탁해서 준비해 놓은 게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나는 속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다른 중신들은 박술희의 말을 듣고 안도한 것 같았다.

“여진의 무리들이 우리 국경을 노략질하지 않으면 할 바를 다한 것 아닙니까? 대장군의 아들들이 일을 잘 처리한 겁니다. 여진족들은 적당히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고. 아. 폐하. 그래서 열병식에 참여한 장수들에게 내리는 벼슬은 언제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강신주가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맞습니다. 열병식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우리 고려군의 위용에 진나라 사신도 감탄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우리 손자가 집안의 좋은 말들을 끌고 나와서 이번 일을 처리했는데…….”

여러 중신들은 열병식에 참석한 자신들의 아들, 손자가 받을 상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아, 그건 내가 그날 눈여겨 둔 바가 있다.”

왕무는 자기가 약속한 일이기도 하니 그리 대답했다. 그러자 중신들은 반색을 하며 그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왕무를 졸랐다.

‘그래 호족들은 왕무가 처리하도록 하자. 오늘은 피곤해서 저런 아귀다툼에 못 끼겠어. 왕무가 어제 나를 그리 괴롭혔으니. 오늘은 일을 좀 떠넘겨야지. 나는 여진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봐야지.’

나는 그래서 눈을 감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무를 외면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