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4 - 즉위
왕건의 죽고 나자 나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허전함을 느꼈다. 왕건이 얄밉게 ‘연우야’라고 나를 부르며 일을 시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은 없겠지?’
나뿐만 아니라 왕무도 허망한 것 같았다.
“아버님이 이렇게…….”
여러 일을 처리하다가도 왕무는 갑자기 그리 중얼거리며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정신없이 왕무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확실히 그러면 허전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와 왕무뿐만 아니라 나주왕후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나주왕후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왕후 마마.”
바쁜 와중에도 나주 왕후를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나주 왕후의 처소에 자주 찾아갔다.
“처소 안에 있으면 갑갑하구나 밖에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그리고 이젠 연우 네가 이 고려의 왕후구나.”
나를 보고 나주왕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먼저 정원으로 향했다.
“마마.”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나주 왕후의 뒤를 따랐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오지수와 김장명도 나주원에 와 있다는 것이다.
나와 나주왕후가 정원에 자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 오지수와 김장명도 황급히 따라 나왔다.
막판에 내린 왕건의 명 덕분에 오지수와 김장명은 부랴부랴 개경에 달려와 왕건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김장명이 개경에 와 있으면 유사시에 명주 세력과 연락을 하기도 편해.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럴 때 오지수가 있어 주니 확실히 든든하네.’
나는 나주왕후의 손을 꼭 잡아주는 오지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원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시녀들이 차를 따라주었다.
나주왕후는 묵묵히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정원의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나뭇잎 하나를 땄다.
나주 왕후는 나뭇잎 한 장을 자신의 찻잔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나와 오지수, 김장명은 말없이 그런 나주왕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주왕후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왕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내 아버지인 임희도 마찬가지였다. 왕무가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논의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임희가 자주 나주원에 찾아왔는데 임희도 가끔씩 멍해졌다.
“폐하께서 그리 떠나시다니. 참.”
임희가 일을 논의하다가 뜬금없이 그리 중얼거렸다.
“아버님.”
“폐하께서 나라를 세우시기 전에는 폐하나 나나 다 폐주의 신하였다. 폐주가 사람을 마구 죽일 때도 폐하께서는 조정에서 항상 유쾌한 모습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셨지. 허허허.”
임희는 왕건과 개인적으로 친구였던 만큼 왕건과의 추억이 많았다. 그래서 충격도 더 큰 것 같았다.
임희마저 이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왕건은 고려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니 그 죽음의 후폭풍이 엄청나네. 아버님과도 일을 논의하기 어려울 지경이니. 미리 뭘 할지 대비를 해놔서 다행이야.’
나는 왕건이 언제 죽을지 알고 있었기에 지난 몇 달간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 나와 왕무, 임희 등이 흔들려도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거기에 왕건이 남겨둔 유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유조에 왕건의 장례며 즉위식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다행이야.’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장례를 어떤 방식으로 치를지 중신들과 의논해야 했다면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조에 모든 것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고려 조정은 큰 혼란 없이 일을 추진해나가고 있었다. 왕건이 유조에 적어둔 대로만 일을 처리해 나가면 되었다. 그 와중에 왕무의 즉위식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임희뿐만 아니라 왕규도 일을 논의하기 위해 가끔씩 나주원에 달려왔다.
“폐하의 즉위식 이후에는 유긍달, 황보제공, 왕식렴 등에게는 어떤 처분을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왕후 마마.”
왕규가 눈을 빛내며 나에게 물었다.
“그야 뭐 폐하께 물어야지.”
내 말을 듣고 왕규가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왕후 마마의 의중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은근히 왕규를 떠봤다.
“대광의 생각은?”
“그야. 그 무리들은 폐하께서 정윤으로 계실 때 온갖 방해를 했습니다. 거기다가 유긍달은 드러난 죄가 있습니다. 유긍달은 이 기회에 정리하시고 나머지는 유배를 보내든 가택에 연금시키든 하면 후환이 없습니다.”
왕규가 힐끔힐끔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면 충주며 황주에서 가만히 안 있을 텐데?”
내가 그점을 지적하자 왕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야 이미 우리의 군사력이 저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왕후 마마의 상산군도 있고 경주 도독 윤신달도 이젠 우리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상산, 경주 군사들이 명주의 군사들과 합세하면 충주를 포위할 수 있습니다. 서경이며 황주의 군사들이야 뭐. 개경에서 중앙군이 출병하고 안북부에서 그들의 배후를 덮치고 왕만세의 수군이 수로를 타고 서경이나 황주를 치면 됩니다. 서경이나 황주나 강으로 바다와 이어진 곳이니. 소신도 일이 터지면 광주의 병력과 함께 나서겠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이제 저들 사이에 신뢰가 깨져서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날 수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유긍달의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주나 신주 군사들도 동참했을 텐데 지금은 아니지요.”
사실 나는 은근히 왕규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북벌만 아니었으면 왕규 말을 따랐을 텐데. 그러나 북벌을 결심한 이상 내전은 피하고 그 힘을 거란 쪽에 부어야 해서.’
나는 입맛을 다시며 왕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그런 일은 허락 안 하실 거야. 거기에 왕식렴과 황보금산이 우리의 명을 따라서 순순히 왔는데 치기가 좀.”
“왕식렴, 황보금산이 온 건 자기들이 생각해도 우리에게 맞서 싸우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이 온 겁니다.”
왕규가 그리 말했다. 나도 왕규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하긴 했다.
“그런데 폐하의 성품상 그렇게 굴복한 사람을 칠 수가 없어. 왕식렴, 황보금산은 상당히 높은 관직을 받고 개경에 머무르게 될 것 같아. 서경과 황주의 군사들과 그들을 떼어놓기만 하는 거지. 왕식렴의 아들들은 서경으로 돌려보내고. 그래도 당장 탈이 날 것 같진 않고.”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후환은 없애놓는 게 좋은데.”
왕규는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렇고 대광이 한번 중원 진나라에 갔다 와야겠어. 태조 대왕의 붕어 소식을 알려야 하니.”
나는 왕규를 달래줄 겸 그런 제안을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왕후 마마께서 과연 제 공을 잊지 않으시고.”
과연 외교통 왕규는 이번 임무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입지 강화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광이 중원에 갈 때 말라 스님과 같이 가는 게 좋겠어.”
내가 넌지시 그 말을 덧붙였다.
“말라 스님이라면. 역시 폐하께서도 태조 대왕의 유지대로 북벌을 준비하시는 것입니까?”
“진나라와 거란 사이가 심상치 않은데 우리 고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러나 왕후 마마. 이 일은 신중하셔야 합니다. 중원 사람들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괜히 용기를 내서 거란과 싸울 것처럼 하다가 막판에 중원 사람들이 겁먹고 굴복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외교통답게 왕규는 나름 식견이 있었다.
‘그러나 미래 지식을 아는 나는 이번에는 중원의 항전의지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석중귀의 진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거란과 싸운다.’
그래서 나는 왕규와 달리 확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확률이 높아. 어쨌든 그래서 대광이 가서 중원의 정세를 살필 필요가 있어. 말라 스님을 통해서 북벌에 대해서도 논의는 해보고. 만약 진나라와의 협공이 성사되면 대광의 공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공에 대해 거론하자 왕규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숙였다.
“진나라에 가서 전력을 다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북벌에 관한 여러 중신들의 생각은 어때? 대광의 솔직한 의견을 말해봐. 마음을 터놓고.”
내 말을 듣고 왕규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태조 대왕의 유훈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겉으로야 북벌에 찬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중신, 호족들의 내심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란이 흔들리면 당연히 출진해 땅을 뺏어야 하지만 거란이 과연 흔들릴지에 대해 의구심이 많습니다.”
“반반이라. 좋아. 대광. 큰 도움이 됐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규에게 칭찬을 건넸다. 왕규의 말은 내 판단과도 부합했다.
‘그나마 지금은 엄청난 내전을 끝낸 직후고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해서 기회가 있으면 진군하자는 생각을 반은 가지고 있는 거야. 시간이 더 흐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북벌을 할 엄두조차 못 낸다. 그래 왕건의 말이 옳아. 할거면 지금 해야 한다. 왕무가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 백두산이 폭발하면 사람들이 여론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 나쁘지 않아.’
* * *
나와 왕무가 왕건의 장례를 치르고 국정을 꾸역꾸역 처리하며 왕권을 굳히는 사이 드디어 즉위식 날이 되었다.
즉위식을 위해 천덕전에 고려의 종실, 외척, 중신들이 모두 집결했다. 구정에는 개경 주민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천덕전에서부터 종실, 외척, 중신들이 궁에서 내려가 구정에 서열대로 앉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와 왕무가 나란히 가마를 타고 구정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정해져 있었다.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 앞에서 왕무가 고려의 왕이 되고 내가 왕후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두근두근.
나는 가슴이 떨렸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가마에 앉아 있다가 구정에 당도하면 내려서 내 자리에 가서 앉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러는지.’
왕무와의 결혼식 때처럼 시간이 엄청 빨리 흘러갔다. 거기에 중간중간 기억도 안 났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마 위에 앉아 있는데 가마 아래서 경란이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왕후 마마. 구정에 당도했습니다. 이제 내리십시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느 순간 나는 구정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가마에서 내렸다.
고려의 수많은 중신들이 도열해 있는 꼭대기에 나와 왕무의 자리가 놓여 있었다.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냐? 내가 왜 이러지?’
나는 계속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왕무였다.
왕무의 체온이 느껴지니 나는 비로소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가자!”
나는 짐짓 자신만만하게 왕무에게 말하고 우리의 자리를 향해 올라갔다. 왕무도 성큼성큼 내 곁에서 걸었다.
그리고 나와 왕무가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고려의 중신들이 일제히 절을 하며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그 사이에는 황보제공, 황보금산, 왕식렴 등등 그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호족들도 끼어 있었다. 그 사람들도 근엄한 표정을 한 채 예법대로 절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고려의 왕후가 되긴 했구나.’
그리고 중신들이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구정에 모인 개경 주민들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
나는 최대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려고 애를 썼다.
‘이 자리에 앉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힐끔 왕무 쪽을 바라보았다. 용포를 걸친 왕무도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그나마 용포를 입은 왕무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진짜 좋네. 따지고 보면 이런 왕무의 모습은 처음 보는구나. 왕건이 있을 때는 감히 용포를 걸칠 수 없으니.’
또 새로운 왕무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