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3 - 일리천의 구름
거란 사신과의 만남을 마친 후 왕건의 병세는 위중해졌다. 중앙군을 장악한 나와 왕무는 궁궐을 통제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왕건이 오지수도 그렇고 여러 부인들과 자녀들도 보고 싶다고 하는데, 이게 보통 사람이야 병이 심해지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왕건의 경우엔.’
이미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정주 왕후를 제외하고도 왕건의 아내가 28명이나 되었다.
‘태자의 수가 왕무를 포함해 25명. 여기에 공주에 사위들까지 합치면 왕건의 직계 가족만 60명이 넘는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왕건의 곁을 지키기엔 왕건의 처소가 너무 좁은데. 60여 명이 왕건의 옆을 지키며 가끔씩 쉴 공간도 있어야 하고. 이거 참.’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고려 왕궁은 왕건이 살던 언덕 위에 지어져서 공간에 한계가 있었다.
거기다가 왕건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많은 것 같았다.
“내 사촌들과 조카들도 다 얼굴을 한 번씩은 만나야겠다. 아 그리고 여러 공신들도 그렇고. 장인들도 봐야 하고. 다 내 곁을 지키게 해.”
“폐하. 그럼 폐하 곁을 지키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아집니다. 처소에 그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왕건은 종실, 외척, 중신들을 다 만나려는 것 같은데 이러면 수백 명이 왕건 곁에 모이게 됐다.
“내가 아직 기력이 남아 있으니 신덕전으로 가겠다. 거기라면 모두를 다 만날 수 있으니. 난 조용한 걸 싫어해! 북적대야 좋아.”
왕건이 침상에 누워 골골거리면서도 호기롭게 외쳤다.
“폐하. 그래도 병세가 심하신데.”
왕무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과 만나서 왕건의 병세가 악화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못 만나고 가면 더 괴롭지. 거기다가 이건 너희들에게도 유리한 것 아니냐?”
왕건이 그리 말했다.
왕건의 말을 들은 내 뇌리에 뭔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겠다.’
내가 왕건의 뜻대로 하자고 입을 열려 하는데 곁에서 먼저 왕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왕건의 소원이라니 왕무는 무조건 들어주고 싶은 것 같았다. 왕무는 아예 자기가 직접 왕건을 침상째로 들어서 신덕전에 갈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침상을 들면 혹여 실수가 있을지 몰라. 내가 전장에서 봐서 각별히 믿는 장사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폐하를 모셔야겠어.”
왕무는 그러더니 장사 3명과 함께 왕건의 침상을 들었다. 나도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왕건의 침상이 왕이 쓰는 물건이라 크고 무거웠는데도 그걸 들어 올린 것이다.
“허허허.”
침상 위에서 왕건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왕건이 외풍을 맞는 것을 막기 위해 시종들이 일산이며 휘장을 펼쳐 침상을 가렸다.
그렇게 나름 거창한 행렬이 신덕전으로 향했다. 신덕전에 왕건을 위한 병상이 꾸려졌다.
왕무가 이 일을 지휘하는 사이 나는 황급히 서신을 작성했다. 서경의 왕식렴, 황주의 황보금산 등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왕식렴은 서경에서 정병들을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야. 이참에 아들인 왕함윤, 왕함순과 함께 왕건을 보러 오라고 해야지. 왕식렴은 종실이니 안 올 수가 없겠지. 황보금산도 황보제공의 동생이고 뛰어난 무장이기도 해. 황보금산이 황주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버티고 있으니. 이 기회에 개경에 불러들여야지.’
왕건이 용호군과 응양군을 물려줘서 이미 개경은 정윤파가 장악했다. 왕식렴, 황보금산이 왕건을 보겠다고 개경에 들어오기만 하면 서경과 황주의 군사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두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면 왕건이 죽고 난 뒤에 공격을 할 작정이었다.
‘왕건이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도 안 온 거니. 흐흐흐 이들이 들어와도 좋고 안 들어와도 좋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신을 완성하고 전령을 보냈다.
* * *
한편 신덕전에서의 일은 왕무의 우려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응애.
신덕전 주변 여기저기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건의 태자와 공주들 중 아직 어린애가 많았다.
그 어린애들을 불러다가 앉혀두니 분위기도 안 좋고 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폐하께서 떠나시려 하는데 어찌 이러는 것이냐?”
왕건의 왕후들과 부인들은 그런 자녀들을 달래긴커녕 본인들도 눈물을 흘리며 혼을 냈다. 그 바람에 어린 태자와 공주들이 울며 더 혼잡스러워졌다.
거기에 왕건의 임종을 지키러 온 왕건의 사촌들도 안타까워하며 자기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누었다. 몇십 명이 이러니 소란은 더 커졌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각 지역에 주둔해 있던 왕건의 심복들도 속속 달려왔다. 왕건이 그들과는 또 따로 할 말이 있는지 일일이 독대를 했다.
그 심복들이 계속 왕건의 병실을 오가며 신덕전 주변은 더욱 혼잡해졌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 혼란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왕식렴과 황보금산이 결국 왔구나. 하긴 안 올 핑계가 없지. 이 혼란도 참을 만하다.’
왕식렴은 침통한 표정으로 종실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황보금산은 자기 형인 황보제공 옆에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이로써 약간의 변수도 사라졌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대로 이 사람들 앞에서 왕무가 왕위를 물려받고 대세를 굳히면 된다. 어쩌면 왕건이 우리 부부를 위해 해준 배려인가?’
다만 모든 준비를 철저히 마쳤음에도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왕건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미래에서 와서 왕건이 언제 죽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건의 병세가 서서히 위중해져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공허한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때 왕건의 곁을 지키던 시종이 달려와 말했다.
“폐하께서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를 찾으십니다.”
나와 왕무는 총총히 왕건의 병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왕건의 모습을 본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며칠 사이에 왕건은 더욱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요 며칠 사람들을 연이어 만나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져서 그런 건가? 억지로라도 왕건을 조용한 곳에 정양시켰어야 했던 건가?’
그런 후회마저 들었다.
“무야. 가까이 오거라.”
침상에 비스듬히 앉은 왕건은 왕무를 먼저 불렀다. 그리고 왕건은 왕무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한참 그 말을 듣던 왕무는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그런 왕무의 손을 잡고 흔들더니 외쳤다.
“그래. 이후에도 네 어머니를 잘 모셔라!”
그리고 왕건은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내가 다가가자 왕건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연우 너에게는 여러모로 고맙구나.”
“별말씀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죽음을 앞두고는 괴로웠는데 연우 네 덕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정말 두려움이 없다.”
왕건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경악해서 왕건을 바라보는데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개경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웬만하면 내가 다 알아낸다. 왕궁 안은 더욱더 그렇고. 그래서 유긍달이 그리 번거로운 방법을 쓴 거고. 왕무한테는 안 들리니 걱정 말거라. 왕무를 돌아보지 말고. 더 수상해 보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내가 뒷수습을 다 해놨으니 이 일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폐, 폐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 왕건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왕무와 고려를 부탁한다.”
나는 왕건과 여기에 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왕건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시간이 없다. 밖의 사람들을 모두 안으로 불러라. 그들이 보고 싶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왕무에게 왕건의 명을 전했다. 그리고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왕건의 가족, 친척, 친우들이 속속 신덕전 안에 들어섰다.
왕건은 침상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들어서자 왕건이 말했다.
“내 유조는 김악이 갖고 있다. 진작 써놨어. 내가 죽으면 김악이 그것을 발표할 것이다. 어쨌든 다음 왕위는 정윤이 잇게 되었다. 그러니 내 장례나 나랏일은 모두 정윤의 뜻을 따르면 된다. 유조에도 적어놨는데 그래도 한 번 더 말한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나와 왕무를 필두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왕건에게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왕건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40여 년을 싸워 삼한 땅을 마침내 평정했다. 참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싸울 마음을 먹지 않으면 되는 일인데.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40여 년간 그 힘든 싸움을 거쳤다. 다만 우리나라는 사악하면서도 강대한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그 일을 다음 세대에게 맡기고 떠나려니 마음이 무겁다. 거란이 중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 고려를 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결코 거란과 화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거란의 세력이 크고 그에 맞서려면 힘들다는 이유로 어찌 화친해서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마음을 먹지 마라. 또한 거란 치하에서 발해 동포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잊어선 안 된다. 모두 맹세하거라.”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입을 모아 외쳤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유조에 다 써놨는데 이건 중요한 일이니 다시 말한 거고. 허허허. 진짜 내가 죽는구나.”
침상 위에서 왕건은 허망한 지 신덕전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어 귀신이 되면
먼저 떠난 친우들과 만나게 되니
그들과는 웃으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보내버린 적들과 부딪치면
이젠 서로 뺏을 목숨이며 땅도 없으니
싸우며 아웅다웅하면 될 일
팔관회 날 달빛 아래
귀신처럼 꾸민 사람들이 저자에 가득할 때
아아 그 사이에서 나는 웃고 싸우며
송악의 거리를 거닐고 싶구나
왕건의 입에서 향가 한 수가 흘러나왔다.
‘이것이 고려 태조의 마지막 노래인가?’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왕건이 침상에 앉은 채로 두 눈을 감았다.
“폐, 폐하!”
사람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내학사 김악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왕건이 앉아 있는 침상 앞으로 걸어나왔다.
왕건의 유언대로 유조를 읽기 위해서였다. 품속에서 유조를 꺼낸 김악이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자 그럼 유조를…….”
그 순간 나를 비롯해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죽은 줄 알았던 왕건이 눈을 번쩍 뜨더니 일어나서 김악의 어깨를 짚은 것이다.
“이 무슨?”
누가 어깨를 짚자 김악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왕건과 눈이 마주쳤다.
“으악!”
김악은 진짜 심장에 충격이라도 온 듯 가슴을 움켜쥐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향가를 생각해 내느라고 힘들어서 잠깐 눈을 감고 있었던 거야. 유조를 왜 벌써 읽어?”
왕건은 가볍게 웃으면서 김악에게 말했다.
“폐, 폐하. 그래도.”
김악은 얼마나 놀랐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말했다.
휴우.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남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침상에 앉은 왕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삼한을 통일했던 그날 하늘에서 봤던 일리천의 그 구름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을 바라봐도 그때 그 구름을 볼 수가 없어. 인생도 마찬가지구나!”
그러더니 왕건이 장내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에 울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그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한결 낫군.”
왕건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멍하니 왕건을 바라보는데 왕건은 두 눈을 뜬 채로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주저앉아 있던 김악이 조심스레 일어났다.
“폐하.”
그러면서 김악이 왕건의 맥을 재보려 하는데 왕건의 몸이 그대로 침상 위로 쓰러졌다.
하아.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또한 고인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저마다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쉴 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일리천의 구름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날 일리천의 구름을 봤다는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숨을 거둔 왕건 곁에서 대내학사 김악이 멍하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