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2 - 마지막 속임수
거란 사신을 맞이하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건은 자신의 처소에 나와 왕무를 불러서 이와 관련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왕건의 몸이 안 좋아져서 어전이나 한림원에는 가끔씩 나오고 왕건의 처소에서 정무가 처리 되고 있었다.
“대광현을 잘 달래놨느냐? 발해 유민들이 거란 사신들의 방문을 보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왕건은 나와 왕무를 둘러보며 말했다.
“발해 유민들의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왕건을 안심시켰다.
‘대광현에게 이미 넌지시 이게 고려의 본의가 아님을 알렸어. 거기다가 어차피 북벌을 시작하면 발해 유민들이 열성적으로 호응할 거야. 지금 발해 유민들의 반응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는 그런 판단을 하고 있었는데 왕건은 잔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왕무의 얼굴도 근심이 많아 보였다.
“폐하. 거란을 속인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왕무의 말을 듣고 왕건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기왕 거란의 무리들을 속이려 결심을 했으니 확실히 해야겠다. 이거 참. 무야.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불안하겠구나. 연우야. 내가 거란 사신을 만날 때 너도 아예 어전에 나와라. 연우 네가 나를 거들어줘야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전이라면?”
나는 오랫동안 고려 정치에 개입해 왔지만 어전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림원에서 왕건과 만나서 일을 처리했다. 정윤비인 내 지위를 가지고도 어전에 나설 수는 없었다.
‘내가 왕후가 돼야 어전에 나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왕건이 마치 별 거 아닌 것처럼 어전에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 무는 사람이 답답해서 안 되겠다. 거란 녀석들을 속이기 어려워.”
왕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한다고 쳐도 폐하의 몸이 걱정입니다. 식사를 거르지 마십시오.”
왕무는 왕건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레 말했다. 왕무에게는 왕건의 건강이 더 근심인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알았다.”
왕건은 밥을 잘 먹어야 한다는 왕무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 * *
거란 사신들이 개경에 도착하자 나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왕무와 함께 어전으로 향했다. 왕건의 자리 바로 아래 나와 왕무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나는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나는 왕무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여러 중신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예만 갖출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 나와 왕무가 대세를 잡았구나.’
이윽고 왕건이 시위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옥좌에 앉았다. 나와 왕무가 일어나서 예를 갖추는데 왕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을 내렸다.
“거란 사신들을 들어오게 하라.”
왕건의 명에 따라 예부 관리의 인도를 받아 거란 사신들이 어전에 들어섰다. 그리고 왕건에게 절을 하며 거란 황제의 국서를 바쳤다.
거란 황제 야율덕광의 국서에는 좋은 말만 적혀 있었고 거란 사신들의 태도도 정중했다.
지금 중원에서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라 거란 입장에선 이중전선을 피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
“우리 폐하께서도 고려국이 삼한의 무리들을 모두 평정한 것에 감탄하셨습니다. 대왕의 위엄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거란 사신이 뭐라 말을 하자 거란에 항복한 발해인들이 그 말을 통역했다.
‘거란 사신단 중 항복한 발해인들의 수가 적지 않아. 우리들끼리 나누는 말을 다 알아듣겠군.’
내가 눈을 번뜩이며 거란 사신단을 살피는데 왕건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발해는 우리 고려의 형제나 다름없다. 발해 국왕께서는 잘 계시는가? 발해에서 이리 귀한 예물을 보내주시니 고맙다고 전해라.”
“예?”
거란 사신단의 통역이 왕건의 말을 듣고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왕무는 얼굴이 빨개져서 왕건에게 말했다.
“폐하! 발해의 대씨는 이미 멸망했습니다.”
“아니 멀쩡한 나라가 왜 망해? 저 사람들이 다 요양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발해 사람들이지!”
왕건이 호통을 쳤다. 왕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내가 재빨리 나서서 거란 사신단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거란을 발해라 부른 것입니다. 이제 거란이 발해의 옛 땅을 차지했으니 고려에서는 거란을 발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리 통역하십시오.”
“아, 예.”
내 말을 들은 통역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거란 사신에게 거란 말로 뭐라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거란 사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왕건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래 지금 백제가 우리 변경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발해의 형제들과 우호를 돈독히 하고 싶다.”
왕건은 이미 망해 버린 백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짐짓 당황한 척하며 몸을 일으켜 말했다.
“자 거란 황제 폐하의 국서도 우리가 받았고 이제 번거로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물러들 나십시오.”
내 말을 듣고 고려의 시위들이 재빨리 거란 사신 일행을 둘러쌌다. 거란 사신 일행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어전에서 나갔다.
유심히 거란 사신들의 얼굴을 살피니 그들이 언뜻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 *
거란 사신 일행이 모두 나가자 왕건이 중신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떠냐? 거란인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
그러자 고려에서 준비시켜 둔 역관들이 나와서 말했다.
“폐하와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의 말을 모두 그대로 전했습니다. 자기들끼리 폐하의 병이 위중한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니 티를 내지 말고 태연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역관의 말을 들은 왕건은 웃으며 말했다.
“내 계책에 거란의 무리들이 걸렸구나. 허허허. 야율덕광이 이 소식을 들으면 크게 안심할 것이다. 아이고 이게 저 녀석들을 유배보내는 것보다 더 통쾌하구나. 이러다가 우리가 허를 찌르면 거란은 크게 동요할 것이다.”
“폐하의 지략에 감탄했습니다.”
고려 중신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사실 이런 계략까지 쓴 것에 대해 고려 중신들도 견해가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왕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고려 조정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요 근래 들어서는 왕건이 무슨 결정을 내려도 중신들은 대체로 따르는 편이었다. 거란 사신을 속인 것을 두고 왕건이 이리 기뻐하니 중신들도 모두 왕건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왕건은 그런 중신들의 반응을 보고 약간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이제 내가 처소에 들어가 봐야겠다. 정윤, 정윤비는 잠시 나를 따라오라! 내가 줄 것이 있으니.”
* * *
나와 왕무는 왕건의 처소에 들어갔다.
“너희들은 거란 사신들이 떠날 때 표정을 봤느냐?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웃는 표정이었다. 에라. 요 녀석들. 나중에 우리 고려군이 진군할 때 야율덕광 손에 그들이 다 처리될 거다. 하하하.”
왕건은 다시 한 번 배까지 잡고 웃었다.
“폐하께서 기뻐하시니 이번 일을 꾸미길 잘했습니다.”
왕무도 유쾌한 왕건을 보고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고려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이리 유쾌하게 처리해서 다행이다. 원래 사신들을 다 유배 보내려 했는데. 역시 이게 나한테는 어울려. 연우야 일을 이렇게 이끌어줘서 고맙구나.”
“폐하!”
마지막이란 말을 듣고 왕무가 놀라서 외치는데 왕건이 자기 처소 한쪽에서 나무상자 하나를 꺼내서 우리에게 건넸다.
“잘 받거라.”
왕무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나무도장들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용호군, 응양군의 인수다. 이제는 무 네가 가지고 있어야겠지. 네 심복들에게 이 인수들을 나눠주거라.”
용호군, 응양군은 왕건을 경호하는 군단이었다. 왕건이 사실상 개경의 군권을 왕무에게 넘겨주는 셈이었다.
“아버님. 어찌 이리.”
왕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왕건이 군권까지 넘겨주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징후였다.
“연우 너에겐 고마울 뿐이다. 내가 삼한을 통일할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대호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왕위 계승 문제에 노골적으로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우 네 덕에 이제 마음 편하게 무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게 됐다. 정말 지난 수년간 명분을 지키면서도 무의 위치를 굳건하게 만들었구나. 연우 네가 없었다면 용호군, 응양군을 물려줘도 불안했을 것이다. 용호, 응양의 무리들도 다른 대호족들의 눈치를 봤을 테니.”
왕건이 다시 한번 나를 칭찬했다.
“그건 뭐.”
어느 순간부터 왕무를 사랑하게 돼서 열성적으로 뛴 것이었다.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서 나는 칭찬을 받으니 민망했다.
“그래 어쨌든 무야! 연우야! 내가 마지막으로 당부할 말은 네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는 것이다.”
왕건이 그런 당부를 했다. 이제 왕무가 왕이 되면 왕요, 왕소를 비롯한 여러 종실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다.
왕건은 그들의 운명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심려치 마십시오. 형제들을 잘 돌볼 것입니다.”
왕무가 믿음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왕건은 내쪽을 보더니 미심쩍은 기색으로 말했다.
“무는 원래 성품이 그러니 그렇다 쳐도, 연우 너는 그저 지금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
그 말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막판까지 이래? 그래도 군권을 줬으니 참아야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거란 같은 강적과 승부를 앞두고 있으니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한 고조는 한신, 팽월, 경포 같은 수상쩍은 사람들까지 다 끌고 가서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종실과 외척들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들의 힘까지 모을 것입니다.”
이건 내 진심이었다.
‘고려의 군사력 규모를 생각했을 때 무슨 대숙청같은 것을 벌이고 거란에 도전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럼 고려의 믿을 만한 장수며 군졸들이 많이 사라진다. 그냥 모두의 힘을 모아 북벌을 감행하든 아니면 북벌을 포기하고 원래 역사에서 광종이 한 것처럼 숙청을 하든 둘 중 하나야.’
나는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참요를 퍼뜨려 놨으니 내 마음대로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전쟁이 터지면 종실들은 다 끌고 가야지. 고려에 남겨두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군영에 데리고 다니면 유사시 정리하기도 편해. 우리가 거란을 이긴다면 그들에게 나눠줄 땅이 생기는 거고.’
나는 그런 음험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건은 그것도 모르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 연우야. 잘 생각했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녀서 그런지 연우 네가 그 이치를 아는구나.”
그러다가 기력이 급격히 쇠하는지 왕건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폐하. 어의를 부르십시오.”
그런 왕건을 보고 왕무가 외치는데 왕건이 고개를 저었다.
“어의도 소용없어. 최응 때와 똑같아. 아니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방법이 없다. 그래. 내가 죽어도 어의는 처벌하지 말고 은퇴만 시켜라. 그리고 지수, 지수를 불러와라. 서둘러라. 남은 시간이 길지가 않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지수의 얼굴도 보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나야겠다.”
왕건은 갑자기 오지수가 보고 싶은지 그런 말을 했다.
“김장명은 어찌할까요?”
내가 그것을 물었다. 어쨌든 김장명도 오지수와 몰래 결혼한 죄로 개경에 못 들어오고 있었다.
“같이 상경하라고 해. 이제 와서 김장명의 상경을 막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대세가 너희 쪽으로 기울었으니 내가 힘을 실어주마. 김장명 그 녀석은 참. 재주도 용해. 내 마지막으로 혼을 내줄 겸 같이 불러라.”
왕건이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