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8 - 지동의
“그래, 그래 현아. 엄마 바쁘다.”
나는 품속에 안겨 있는 현이의 등을 토닥이며 글을 써 내려갔다. 왕건이 나에게 북벌 맹세를 강요한 이후 여러 시일이 지났다.
한동안 드러누워 있던 왕건도 다시 일어나고 국정을 돌봤다. 고려는 얼핏 보기엔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역사를 아는 나는 마음이 급했다.
‘올해가 서기로 치면 940년. 3년 뒤엔 왕건이 죽고 6년 뒤엔 백두산이 대폭발한다. 왕건과 한 맹세를 지키려면 백두산 대폭발을 잘 이용해야 해. 그래야 거란을 거꾸러뜨릴 수 있어.’
왕건이 시킨 맹세를 한 이후 나는 북벌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맹세를 해놓고 어겨도 아무도 뭐라 하진 않겠지만. 내가 맹세를 하는 것을 왕무도 봤어. 무엇보다 백두산 대폭발은 수천년에 한번 오는 기회니. 이때를 놓치면 우리나라가 발해의 땅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안 온다.’
나는 사학과 석사인만큼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그 영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발해 유민들은 발해 땅에 남아서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중원에서 석경당이 죽고 석중귀가 즉위한다. 석중귀가 거란과 전면전을 벌일 때 마침 백두산마저 대폭발하니.’
물론 백두산 대폭발이 고려 쪽에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백두산이 폭발하면 거란의 구 발해령 통치도 흔들리겠지만, 그 인근에 살고 있는 발해 유민들과 말갈족들도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백두산이 폭발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를 한다면 고려에 유리하게 일을 꾸밀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현이를 품에 안은 채 글을 쓰며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말갈족을 이 즈음해서 여진이라고도 불러. 이 시대 사람들도 말갈과 여진이란 용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고. 에잇. 이제부터 최소한 나는 여진이라고 용어를 통일해야겠다. 나중에 왕무에게 말해서 조정에서도 용어를 통일시켜야지. 헤헤헤. 이게 권력이다’
다만 내 품속에 있는 현이는 내가 글을 쓰자 자세가 불편한지 계속 꼼지락거렸다.
‘내,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아기는 시녀에게 맡겨두고 일을 해도 되는데.’
나를 돕는 시녀들이 많은 만큼 그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이가 내 품속에 있어야 힘도 나고 머리도 잘 돌아가니. 어쩔 수 없어. 현아. 네가 좀 고생하렴. 엄마가 나중에 너 편하라고 거란을 정벌할 계획을 짜고 있는 중이니. 응.’
그러면서 나는 잠시 머리도 식힐 겸 글쓰기를 중단하고 현이를 편하게 안아주었다.
꺄르르.
그러자 현이가 기쁜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 문득 나는 현대에서 내가 어렴풋이 들었던 화산과 관련된 과학상식들을 떠올렸다.
“현아. 우리 현이 덕에 엄마가 또 좋은 거 생각해 냈다.”
나는 다시 붓을 들고 떠오른 정보들을 적어 내려갔다. 다만 일이 계속 순조롭지는 않았다. 나는 슬슬 고비가 온 것을 느꼈다.
“경란아!”
나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경란이를 불렀다.
“예. 마마.”
“우리 현이를 네가 좀 보살펴라. 내가 일이 바빠.”
“알겠습니다.”
경란이는 조심스레 현이를 안고 물러났다. 현이가 사라지자 나는 중얼거렸다.
“자, 그럼 왕건에게 뭐라 거짓말을 쳐야 하지?”
여러 계획을 짜다가 나는 한 가지 문제점을 떠올렸다.
‘왕무가 즉위하고 나서 3년 뒤에 백두산이 터진다. 근데 3년 준비해서는 일을 제대로 꾸밀 수가 없어. 왕무가 즉위한 이후에는 나라가 좀 어수선하긴 할거고. 그걸 수습하는데 시간을 또 잡아먹어. 백두산 대폭발을 이용해 북벌을 감행하려면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를 해놔야 해. 결국 왕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 참.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고백할 수도 없고.’
결국 왕건에게 적당히 거짓말을 쳐서 납득시켜야 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시아버지인 왕건을 속여 넘길까 궁리하는데 현이가 품속에서 날 보면 양심에 찔렸다. 그래서 나는 현이를 내보낸 것이다.
‘내가 그동안 몇 가지 예견을 한 적이 있어. 아버님에겐 발해가 멸망할 것을 알려드렸고 왕건에겐 견훤과 신라 항복에 대해 이야기 했지. 그런데 그건 정세를 살펴서 예견한 거라 둘러대면 됐는데 백두산 대폭발 같은 천재지변은 무슨 수로 변명하지? 납득을 시켜야 왕건을 움직여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는데.’
나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무슨 현대와 같은 탐지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앗!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도 나름의 과학이 있어!’
나는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서 서재 한쪽에서 역사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휘리릭 넘겨 내가 원하는 부분을 찾아냈다.
‘중국 후한 때 장형이라는 과학자가 초보적인 지진계인 지동의를 고안해 냈다. 이게 사서에 남아 있어.’
물론 기록만 남아 있지 자세한 설계도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복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당히 지동의 비스무레한 장치를 만들어놓고 왕건에게 그래서 백두산에서 대폭발이 난다고 말한다면? 사서에도 나온 이야기니 왕건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겠지.’
나는 쾌재를 부르며 목수와 대장장이들을 부를 채비를 했다.
* * *
내 요청을 받고 나주원 정원에 온 왕건은 입을 쩍 벌리며 외쳤다.
“그, 그래서 연우 너는 몇 년 뒤에 백두산 부근에서 지진이 나고 산이 터진다고 말하고 있는 거니?”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저쪽에 제가 복원한 지동의가 있습니다. 제가 복원한 지동의 위에 구슬이 걸려 있는데 지진이 나는 방향의 구슬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속 동북쪽의 구슬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작은 지진이 계속 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개경 동북쪽에 있는 백두산이 심상치 않습니다. 자 여기 사서를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왕건에게 다가가 과학자 장형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부분을 펼쳐 보여주었다. 물론 내가 만든 지동의는 엉터리였다.
나는 목수와 대장장이를 시켜 외양만 그럴듯한 지동의를 만들었다. 그리고 무조건 동북쪽에 있는 구슬이 떨어지게 설계를 해놓았다.
“장형의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지동의가 등장하다니. 너는 그래 어디에서 이걸 알았니. 뭐 연우 너만 아는 책에서 봤겠지.”
왕건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급조해 낸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밀어붙여야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 말이 미심쩍다면 사람을 백두산 쪽에 보내 인근의 여진족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분명 근 몇 년간 백두산의 모습이 이전과 달랐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자신이 있었다.
‘수천 년에 한 번 있는 백두산 대폭발이다. 과학적으로 분명 근 몇 년간 이상한 징후가 있었을 거다. 왕건이 백두산에 사람을 보내기만 하면 내 말을 믿어 줄 거야.’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던 왕건이 말했다.
“백두산에 사람을 보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연우 네 말을 믿고 있다. 거기에 네가 부탁한 일도 다 그대로 해주마. 그중에 어려운 일은 없으니. 어쨌든 연우 너는 이런 준비를 해야 거란을 정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맞느냐?”
“예.”
평소와 달리 왕건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줘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 그러면 됐다. 허허허. 정말 백두산이 흔들리고 우리 고려 군사들이 그때를 틈타 진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내가 직접 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연우야. 내가 그 모습을 볼 수 있겠니?”
“…….”
왕건의 그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만 푹 숙였다.
“이 이야기는 나와 무에게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거라. 연우 네가 이런 예견을 했는데 만에 하나 어긋난다면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거고 네 위치도 흔들릴 거다.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는 내 독단으로 처리한 것처럼 하마.”
왕건이 그리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왕건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연우 너를 보면 내가 어린 시절 만난 도선 대사가 떠오르는구나. 도선 대사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는데. 연우 네 첫 번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도선 대사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좋겠구나. 그래. 푹 쉬고 있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다 하겠다. 허허허.”
왕건은 내가 만든 가짜 지동의를 한번 바라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걸어 나갔다.
‘나를 도선 대사와 비교하다니. 왕건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하긴 내가 미래의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도선 대사와 비교될 수 있으려나? 어쨌든 왕건도 슬슬 끝이 오는 것을 예감하는 것 같아.’
왕건의 언행을 보면 왕건도 자기 생전에는 북벌의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꿈에 확실히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황당한 말에도 혹시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생각하니 나는 서글퍼졌다.
* * *
임희는 내가 유긍달을 제압한 이후 항상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임희가 간만에 심각한 기색으로 나주원에 달려왔다.
“연우야. 지금 개경뿐 아니라 전국에 기이한 참요가 퍼지고 있다. 도선대사가 남긴 도선비기의 마지막 장에 적혀 있는 참요라는 구나. 이 참요가 새겨진 비석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걸 좀 보렴.”
임희는 다급하게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하늘에서 진군의 북을 치고 북방에서 검은 기가 오를 때
삼한 사람들이 천명을 받아 검은 깃발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네
어찌 닭을 쥐고 오리를 때려서 배가 부르겠는가?
아아 까마귀가 떨어지고 흰 늑대도 발밑에 엎드리네
종이에는 이런 참요가 적혀 있었다. 나는 임희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참요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참요야 내가 지었으니 놀랄 게 없어. 다만 왕건에게 이 참요를 전국에 퍼뜨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일처리 솜씨가 엄청나네. 도선비기까지 끌어다 대고 비석도 만들어서 전국에 뿌려놓다니. 왕건에게 부탁하길 잘했어. 다만 내가 지은 참요가 잘 지은 것은 아니라서 부끄럽네. 최치원 말대로 문학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참요는 한시 형식이 아니라 이두문으로 적혀 있었다.
내가 한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에 능하지는 못해 대충 이두로 뜻만 통하게 조악하게 참요를 지었다.
최언위나 김악에게 부탁했으면 좋은 작품이 나왔겠지만 그러면 기밀 유지가 힘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지었다.
‘이 조악한 참요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엮어서 유행시키는 왕건의 재주가 참. 하긴 왕이 되기 전에도 선동이며 여론조작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으니. 하 졸지에 내가 유행가 작사가가 됐네.’
나는 왕건의 솜씨에 새삼 감탄했다. 다만 이 사정을 모르는 임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참요가 퍼지다니 심상치 않다. 특히 연우 너는 어려서 모르겠지만 ‘닭을 쥐고 오리를 때린다는’ 부분은 우리 폐하께서 폐주를 몰아내기 전에 퍼진 참요에도 나왔다. 참요가 퍼진 이후 우리 폐하께서 고려를 건국하셨지. 그런데 지금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참요가 퍼지다니. 누가 과연 이럴 수 있을지?”
애초에 이 시대에 참요가 퍼지는 것은 누군가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퍼뜨리는 것이었다. 노련한 임희가 이상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백두산이 폭발하면 아버님도 이 참요의 의미를 깨달으시겠지. 이 참요가 퍼졌으니 백두산이 폭발할 때 고려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북벌에 나설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임희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지금 뭘 알려주는 것보다 일이 닥쳤을 때 참요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