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7 - 볼모
나는 왕만세와 함께 예성강 선착장으로 향했다. 현이는 바닷바람을 맞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주원의 시녀들에게 맡기고 나만 나왔다.
‘간만에 이리 바깥에 나오니 좋긴 좋네.’
왕만세와 함께 선착장에 이르니 왕건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왕건은 수군의 장교 몇 명을 붙들고 연신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왕만세와 함께 겨우겨우 사람들을 헤치며 왕건을 향해 다가갔다.
‘이거 참. 왕건 때문에 사람들의 고생이 엄청나군.’
예성강 선착장은 원래 상인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수백 명의 호위병력과 함께 다니는 왕건이 나타나서 선착장에 죽치고 있으니 엄청 혼잡했다.
상인들도 장사를 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왕건에게 붙들려 이런저런 지시를 듣고 있던 수군 장교가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외쳤다.
“앗 정윤비 마마와 영해공께서 오십니다.”
그러자 왕건도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느냐?”
“예. 폐하.”
내가 왕건 앞에 나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막상 선착장에 왔는데 왕건의 얼굴을 보니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왕건도 많이 늙었구나.’
나는 공산전투 직후 왕건을 처음 만났다. 그때는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노쇠한 티가 역력했다.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왕건의 수명이 몇 년 남지 않았다.’
내가 그 사실을 떠올리는데 왕건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지금 석경당과 함께 북벌을 해야 한다. 내가 군사를 이끌고 출진할 수 있는 시간도 오래 남지 않았다. 근래 이미 내가 상보 어른과 좌승 공직 같은 인재를 잃었다.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갈 수가 없는데…….”
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사이 상보 선필, 좌승 공직 같은 고려 중신들도 세상을 떠났다.
그 두 사람은 워낙 고령이긴 했다. 나는 출산 때문에 정신이 없어 조문하지 못하고 왕무와 임희가 대신 갔다.
왕건도 자신의 수명과 건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폐하, 어찌 그런.”
곁에 있던 왕만세가 놀라서 외쳤다.
‘이런 왕건 앞에서 어차피 석경당의 사신은 오지 않을 거니 궁에 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고.’
당장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왕건 곁에 함께 서 있기로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왕건이 문득 입을 열었다.
“연우 네가 참 신통하긴 하구나.”
“예? 그 무슨?”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왕건이 말을 이었다.
“내가 견훤에게 연전연패하며 몰리고 있을 때 나도 속으로는 고려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 사람들도 많이 흔들렸고. 그런데 연우 너만은 끝까지 견훤과 신라가 항복할 거라 주장했다. 나는 그게 아첨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연우 네 말대로 되었다.”
“그야 뭐…….”
내가 애매하게 웃는데 왕건이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북벌은 석경당과 함께 진출하면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연우 너는 북벌 준비를 열심히 도우면서도 한 번도 이 북벌이 성공할 거라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연우 네가 큰소리를 쳐주기 바랐는데 한 번도 그러지 않더구나. 그런데 끝내 일이 이리 흘러가는구나. 허허.”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가슴 한편이 뜨끔했다.
‘내가 너무 티를 냈나? 설마 왕건이 뭔가를 눈치채진 않았겠지?’
내가 어떻게 변명할지 머리를 굴리는데 왕건은 다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멀리서 군선 한 척이 엄청난 속도로 선착장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앗 배가?”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외치는데 선착장에 정박한 군선에서 장교 하나가 펄쩍 뛰어내렸다. 허겁지겁 달려온 장교가 왕건 앞에서 군례를 올리더니 외쳤다.
“폐하 기뻐하십시오! 중원 진나라에서 상선이 오고 있습니다.”
“정말이냐? 무슨 일로 온다더냐? 물어봤느냐?”
“가까이 다가가서 물으니 우리 고려에 오는 사람을 싣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군선들이 그 상선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소장은 폐하께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먼저 달려왔습니다.”
장교의 말을 들은 왕건이 반색을 했다.
“오오. 그래. 고생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장교의 말을 함께 들은 군사들과 상인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요 근래 왕건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며 중원의 소식을 기다렸는지 아는 것이다.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석경당이 끝내 답신을 안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아니면 설마 역사가 변한 건가?’
나도 왕건 곁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교의 말대로 중원의 상선 한 척이 여러 군선들의 호위를 받으며 선착장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왕건은 초조해서 발까지 구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선은 선착장에 배를 댔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한 젊은이의 얼굴을 본 왕건이 외쳤다.
“인적아! 너는 인적이 아니냐?”
상선에서 내리던 왕인적은 왕건을 보고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소인을 위해 폐하께서 군선도 보내주시고 이리 직접 나오시다니. 감사드립니다.”
왕인적은 왕건이 자기를 마중 나온 줄 알고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했다. 왕인적은 석경당의 진나라에 왕건이 보낸 볼모였다.
말은 볼모였지만 고려와 진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싸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와 일을 꾸밀 때 가교 역할을 하라고 왕건이 집안 젊은이 중 총명한 사람을 뽑아 보낸 것이 왕인적이었다.
그런데 그 왕인적이 이리 귀국한 것이다.
“그래 무슨 일로 이리 돌아왔느냐? 진나라 황제가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니?”
“진나라 조정에서 자신들은 고려를 굳게 믿기 때문에, 볼모가 필요 없다고 저에게 통보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귀국하라고 하며 선물과 국서를 내줬습니다. 여기 그 국서입니다.”
왕인적이 비단 보자기에 꽁꽁 싸맨 꾸러미를 왕건에게 바쳤다. 마음이 급한 왕건은 예법이고 뭐고 안 지키고 자기가 직접 보자기를 풀어 국서를 열어봤다.
뚫어져라 국서를 바라보던 왕건은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인적이 네가 말한 그대로구나. 나를 믿기 때문에 인적이 너를 돌려보낸다는 말만 써 있구나. 그것밖에 없어.”
“폐하?”
일이 돌아가는 전후 사정을 모르는 왕인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본 나는 침통한 기분이었다. 왕만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석경당이 고려의 볼모 왕인적을 돌려보낸 것은 사실상 왕건의 요청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었다.
볼모를 이런 식으로 돌려보낼 정도로 석경당이 거란을 함께 치자는 왕건의 제안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인적아. 먼 나라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조만간 네 귀국을 환영하는 연회를 내가 열 것이다. 다만 오늘은 내가 몸이 불편해서…….”
왕인적을 향해 말을 잇던 왕건이 갑자기 몸을 휘청거렸다.
“폐하!”
그걸 지켜보던 나와 주변 사람들은 놀라서 왕건을 부축했다.
* * *
어의는 왕건을 진맥하고 나서 말했다.
“폐하의 가슴 속에 울화가 가득하고 상심이 너무 크셔서 잠시 혼절하신 것입니다. 곧 깨어나실 것입니다. 폐하의 마음을 달래드려야 합니다.”
“알겠다.”
어의의 말을 들은 왕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중신들과 장수들도 모두 안심하는 것 같았다.
야심 차게 추진하던 북벌이 사실상 끝나고 왕건이 쓰러지는 바람에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개경의 군사들이 동원되어 궁궐을 호위하고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제 슬슬 왕건의 죽음에 대비해서 일이 닥치면 정윤파의 여러 장수들과 중신들이 어찌 움직여야 하는지 계획을 짜놔야겠다. 왕건이 잠깐 쓰러진 것만으로 이런 혼란이 이는데. 내가 너무 냉혹한가? 하지만 왕무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으려면 그런 준비를 다 해놔야지.’
내가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사이 왕건이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정윤과 정윤비. 대장군은 들어오라.”
왕건의 부름을 받고 나와 왕무, 유금필이 왕건의 처소에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왕건은 어의가 바친 탕약을 마시고 있었다.
“석경당 그 사람이 이리 나올 줄은 몰랐다. 자기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거란과 한판 승부를 벌일 줄 알았는데 이리 몸을 사리다니. 에잇, 석경당은 필요 없다. 대장군.”
왕건은 우리를 보자 탕약그릇을 내려놓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예, 폐하.”
“일찍이 옛 고려의 대장들도 말갈 기병과 힘을 합쳐서 당나라 대군과 맞서 싸웠다. 발해 고왕 대조영도 말갈의 걸사비우 같은 사람과 함께 싸워 당군을 대파하고 발해를 건국했다. 지금 내가 삼한을 평정해 정병 10만을 거느리고 있다. 어떻게 말갈의 무리들만 끌어들여 우리끼리 졸본까지만 이라도 나간다면?”
왕건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미련이 남은 왕건이 고려군의 단독 출병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금필은 왕건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애초에 석경당이 적극 나서줘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홀로 출병하면 무조건 거란에게 패합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갈의 무리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말갈의 무리들도 우리와 석경당이 동시에 출병해 거란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야 힘을 얻어 우리에게 가담할 것입니다. 우리 고려만 출병하면 말갈의 무리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하아. 결국 내 생전에는 발해 땅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인가? 석경당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다.”
유금필의 말을 들은 왕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왕건은 우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야, 연우야. 이리 오너라.”
나와 왕무가 왕건 앞에 다가가자 왕건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앞으로 고려를 이끌어가게 됐다. 그러면 한번은 거란의 빈틈을 찌를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무야, 연우야. 너희들은 반드시 출전해서 발해의 형제들을 구해야 한다. 내 앞에서 맹세할 수 있겠느냐?”
“폐하의 뜻을 받들어 반드시 거란의 무리들을 격멸하겠습니다.”
왕무는 군례를 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왕건의 말을 들은 나는 크게 당황했다.
‘안 그래도 요 근래 나는 북벌 문제를 생각하며 마음이 오락가락하는데. 왕건이 이런 맹세를 시키다니. 설마 왕건이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나는 왕무를 따라서 맹세의 말도 못 하고 어물거리고 있었다. 왕무가 약간 의아한 기색으로 망설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왕건은 교묘하게 나를 압박했다.
“내가 무조건 너희들이 발해 땅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적절한 기회가 오면 공격하라는 거야. 적절한 기회가 안 오면 이 고려 땅을 지키고 있으면 된다. 다만 너희들이 지닌 재주를 다 써서 노력해달라는 것이다. 어떠냐? 연우야. 맹세를 하겠느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맹세를 안 할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한걸음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저도 맹세…….”
“연우 네가 맹세할 말은 내가 정해주마. 그래 ‘거란을 물리치고 발해 땅을 회복시키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맹세합니다. 이 맹세를 어기면 나는 왕무와 영영 헤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해라.”
왕건이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나는 더욱 당황했다.
‘무슨 내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그러나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맹세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왕건이 시키는 대로 맹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