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83화 (18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3. 당황

동양원에서 현기증이 나서 쓰러진 후, 나는 왕무와 여러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왕건도 미안한지 선물을 여러 차례 하사했다.

왕무는 아예 군영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나도 잠시 쉴게. 연우 네 곁에 있어야겠어.”

왕무는 침상에 누워 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제발 군영에는 꼬박꼬박 나가. 북벌이 중요한 문제니.”

지금 왕건이 한창 북벌을 꿈꾸며 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못 끼면 서경에 주둔한 왕식렴 등의 힘이 커지는 것이다. 왕무가 매일 군영에 나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연우 네 몸이…….”

“그날은 질리부일라 대사의 설법이 너무 길어서 졸려서 그랬던 거야. 폐하께서도 말을 길게 하시고. 사실 졸려서 잠깐 잠이 든 건데 사람들이 요란을 떨어서 현기증인 척했어. 임신을 하니 앉은 채로도 그냥 잠이 오더라고.”

나는 왕무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그리 말했다.

“허나.”

이번만큼은 왕무도 순순히 내말을 안 따르고 버텼다. 하지만 내 고집을 왕무가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왕무는 꼬박꼬박 군영에 나가기로 나와 약속했다.

“대광현도 만나야 해. 꼭. 조만간 폐하께서 대광현도 부르실 거야. 매일 만나는 게 좋아. 그래 아예 적당히 날을 잡아 대광현과 함께 나주원에 와줘.”

나는 왕무에게 그리 당부했다.

“대광현?”

왕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왕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대광현이 지금 고려 내에서 북방의 정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어. 폐하께서 북벌을 할 때 구 발해령에서 항전하고 있는 발해 유민들의 도움을 받아야 보급을 이을 수 있어. 대광현의 역할이 중요하지. 그래서 대광현을 자주 부르실 건데 우리가 대광현과 친해져야 덕을 좀 보지.”

“알았어. 다만 연우 네 몸이 걱정되니 대광현은 차차 데려올게. 의원 말로는 임신 초기 고비만 넘기면 괜찮다고 하니.”

“그래.”

나는 내말을 잘 따르는 왕무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간이 지나며 내 배도 슬슬 불러왔다.

그동안 나는 왕건과 왕무가 꿈꾸는 북벌을 도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냥 왕무와 행복하게 고려에서 살까? 아니면 온 힘을 다해 북벌을 도와야 할까?’

이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불러오니 그런 고민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대신 다른 고민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기를 무사히 낳을 수 있겠지? 원래 역사에서 임연우도 출산을 하고 나서 잘 살았으니. 그러나 혹시 무슨?’

한번 출산에 대해 불안을 느끼니 끝이 없었다.

‘현대와 달리 믿을 만한 의사가 없어서 괴롭다.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어.’

물론 경험 많은 어의가 나를 살피러 오지만 현대 의학을 익힌 의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젠 적당히 운동을 좀 하시면 좋습니다.”

나를 진맥한 어의가 그리 말했다.

“요새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어의에게 물었다.

“허허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험 많은 산파가 정윤비 마마를 도울 것입니다. 여러 왕후 마마와 부인들의 출산을 도운 사람입니다.”

그러자 어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리 말했다.

어의의 말을 들어도 나는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웠다. 어의가 나가고 나서도 나는 침상에 누워서 겨우겨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침상에 누워 있으니 더 불안했다.

‘적당히 운동을 하라고 했는데 이리 누워 있기만 하면…….’

그 생각에 나는 누워 있지도 못하고 몸을 일으켜 방안을 서성거리며 불안해하기로 했다.

* * *

계속 내 배가 불러오는 동안 왕건도 열성적으로 북벌을 추진했다. 해외의 승려들을 초빙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거란 내에 무슨 일이 터지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속셈 같아. 나도 좀 숟가락을 얹으러 나가봐야 하나? 어의가 운동도 하라고 했고. 차라리 그게 낫겠다. 방안에 있으니 더 불안해.’

왕건이 나에게 소식을 전할 때는 항상 김악이 왔다. 그런데 김악은 올 때마다 울상이었다. 그러더니 길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확실히 삼한 땅에 전쟁이 끝나서 그런지 해외의 중들이 너무 몰려오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전쟁 중이니 안전한 고려에서 포교를 하겠다는 심보 같습니다. 폐하께서 해외의 중들을 너무 우대하십니다. 어허 나라가 어찌 될지. 정윤비 마마. 빨리 한림원에 돌아와 주십시오.”

나는 그런 김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가 보면 나랑 김악이 엄청 친한 줄 알겠어. 대체 왜 나한테 와서 하소연을 하는 건지? 나 참.’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김악은 대뜸 나주원에 찾아와서 용건도 안 말하고 하소연부터 늘어놓은 것이다

“아 그것이. 폐하께서 여느 때와 같은 명을 내리셨습니다. 정윤비 마마의 몸이 괜찮으시다면 구산사에서 열리는 외국 중의 설법에 오시랍니다. 허허 이거 참. 여러 중신들도 참석한답니다. 나라가 어찌 될지.”

“흐음.”

그동안 몇번 이런 초청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몸 상태에 따라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했다.

“이번에는 어느 고승이 오셨습니까?”

나는 승려의 이름부터 물었다.

“서역에서 온 말라라는 스님입니다. 말라! 이름 하나는 마음에 드는 스님입니다. 오지 말라! 제발 고려에 오지 말라! 이상한 가르침을 전파하지 말라!”

김악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적당한 운동을 할 겸 이번에는 꼭 가겠습니다. 폐하께 그리 전해주십시오.”

* * *

나는 왕무와 함께 구산사로 향했다. 왕과 왕족, 중신들이 참석하는 법회 때문에 시끌벅적했다.

“참 우리와 인연이 깊은 절이지? 지하통로는 아직도 그대로 있을까?”

왕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왕건의 계략에 빠져 구산사 지하통로에 갇혀 있던 왕무를 구하려 애쓰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왕건이 나와 왕무의 혼사를 정해버렸다.

“있겠지. 증조모님이 드나드시라고 만든 거니.”

나는 왕무에게 그리 대답했다. 확실히 이번에 구산사에 온건 잘한 일인 거 같았다.

‘아가야. 엄마랑 아빠의 결혼이 사실상 이 절에서 결정됐어.’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아기에게 그리 말해주었다.

‘다만 얄미운 왕건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니 안타깝다. 그래도 왕무와 결혼을 하길 잘했어. 안 했으면 지금 나는 어찌 살고 있을까? 왕무는 다른 처자랑 결혼을 했을 거고.’

그런 상상을 하니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왕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짝 안아줬다.

그리고 나와 왕무는 구산사의 전각에 들어갔다. 전각 한 쪽에 우리를 위한 방석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고 나서 왕건도 들어오고 설법을 할 말라 스님도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방석에 앉고 설법이 시작됐다.

말라 스님이 외국인 특유의 어눌한 억양으로 좋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말라 스님은 확실히 이전에 고려에 온 해외 고승과는 달랐다. 나이가 많은 마후라, 질리부일라와 달리 말라는 중년의 나이였다.

그리고 설법도 과연 남달랐다.

“여러분 모두 졸리십니까?”

장내를 둘러보던 말라가 문득 그리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사실 나는 반쯤 졸고 있었는데 말라 스님이 그 말을 꺼내자 당황했다.

‘다른 스님들은 사람들이 졸든 말든 그냥 설법을 하는데 이 스님은 왜 이래?’

어쨌든 말라 스님의 그 말 때문에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꾸벅꾸벅 졸던 중신들을 주변에서 깨웠다.

“하하하. 소승의 말이 재미가 없으니 조는 분이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선 사부대중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죠. 상인들이 모인 법회에서는 돈이 되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졸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부처님 말씀을 스며들게 해야죠. 흐음. 여기에 고려의 왕공귀족 분들이 모였으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요?”

말라 스님이 좌중을 휘어잡으며 말했다.

‘확실히 보통 중은 아니야. 물론 마후라나 질리부일라도 덕망 높은 고승으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라는 다른 의미로 대단해. 과연 역사 속에서…….’

내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말라 스님이 말을 이었다.

“음, 거란 상장 조사온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이 졸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웅성웅성.

조사온이란 이름이 나오자 장내가 동요했다. 조사온은 거란의 무장으로 고려에도 그 악명을 날리고 있었다.

거란의 핵심 무장으로 발해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사람이었다. 발해멸망전에서도 발해군을 섬멸시킨 주역 중 하나였다.

그래서 고려와 발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름이 나오니 고려의 중신들은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대사! 더 말씀을 해보십시오.”

왕건도 관심이 가는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소승이 거란 땅을 지나다가 기이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란 상장 조사온이 별에 맞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말라 스님은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 대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별이라니. 혹여 벌에 쏘였다는 것인지? 어쨌든 조사온이 죽은 것은 맞습니까?”

왕건이 입을 쩍 벌리면서 외쳤다. 장내에 흥분한 중신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조사온이 죽다니!”

“별에 맞다니 뭔 소리야? 저 스님이 고려말을 잘못하는 거 같은데. 뭔가 착오가?”

“뭐야? 숙청 아니야?”

그리고 장내에서 가장 흥분한 사람은 왕건이었다.

“모두 조용히 해! 대사님 말씀 좀 듣게. 함규 아니 왕규, 왕규 어딨어! 빨리 와봐!”

왕건이 호통을 치자 장내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왕규가 허겁지겁 왕건 앞에 달려왔다.

“말라 대사가 아마 당어도 할 줄 알거다. 중원을 거쳐 오셨고 오래 중원 땅에 머물렀으니. 그러니 왕규 네가 당어로 물어봐라. 조사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라 대사가 고려말이 어눌해서 뭔가 제대로 정보전달을 못 하고 있어.”

왕규가 외교통이라서 중원 땅도 드나들고 중국말 즉 당어도 잘 했다. 왕규가 재빨리 당어로 말라 대사에게 뭔가를 묻기 시작했다.

한참 대화가 오가고 나서 왕규가 당황한 기색으로 왕건에게 말했다.

“말라 대사의 말씀은 한결같습니다. 조사온이 집에 있다가 별에 맞아 죽었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고? 벌에 쏘이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거 아니야? 서역말! 말라 대사 고향인 서역말 할 줄 아는 사람 없어?”

“말라 대사의 당어가 유창합니다. 애초에 천축이나 서역의 스님들은 중원 땅에 포교를 하는 것이 1차 목적입니다. 중원 사람들 수준으로 당어를 할 줄 아십니다. 스님들이 불경도 당어로 번역을 하십니다. 말라 대사는 확실히 조사온이 별에 맞아 죽었다고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말을 잘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 번 확인을 했습니다.”

나름 어학에 능한 왕규가 그리 장담했다.

“아니 그런데 그게 말이 되냐고? 설마 조사온이 죽은 것 자체가 잘못된 정보인가? 아니야. 그럼 안 돼. 조사온은 죽어야 해! 빨리! 빨리 사람을 북방으로 보내봐라.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건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왕건이 장내를 둘러보며 그리 호령했다. 왕이 흥분해서 그리 명을 내리니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