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2 - 현기증
“아니 그래서 질리부일라 대사 앞에서는 이런 말을 안 했잖아! 그 스님이 떠났으니까 이런 말을 해도 되지.”
왕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유금필에게 말했다.
“그야 뭐. 알겠습니다.”
유금필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어떡해! 뱃속의 아이가 왕건의 말을 들으면! 혹시 악영향을 주는 거 아니야? 질리부일라 대사 같은 분의 말씀만 들어야 좋지 않을까?’
나는 거란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왕건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걱정을 했다. 평소에는 왕건의 저런 말을 흥미롭게 들었다.
그런데 임신을 하니 마음 편하게 저런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무심코 내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임신 초기라 배가 불러오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싱숭생숭했다.
‘임신을 해서 기분이 오락가락한 건가? 그래. 좋게 생각하자. 뱃속의 아이가 태자든 공주든 나와 왕무의 자식이니 결국 정치를 해야 해. 그냥 조기 교육이라고 여기고 들어야겠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왕건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새벽에 안북부를 지키는 염상에게서 이런 서신이 당도했다. 서신의 내용이 충격적이야.”
왕건이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더니 읽기 시작했다.
-우리 군사들이 청천강을 넘어서 보루를 지으려고 하는데 거란 군사들이 와서 경고했습니다. 발해 서경 압록부에 주둔하는 거란군사들입니다. 그들이 말하길 청천강을 넘어와서 성을 지으면 공격하겠다고 말해서 군사들을 우선 안북부로 철수시켰습니다. 이 일을 앞으로 어찌 처리해야 할지 폐하의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웅성웅성.
왕건이 읽은 서신내용을 듣고 장내의 사람들이 모두 동요했다. 삼한을 통일하고 난 뒤에도 왕건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건은 자신의 심복들을 북쪽으로 보내서 계속 성을 쌓으며 영토를 넓히라고 명했다. 그래서 북방에서 고려가 야금야금 북진하고 있었다.
북진하는 고려를 보고도 그동안 거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고려군이 청천강을 넘자 경고가 들어온 것이다.
“옛날 우리 땅을 되찾겠다는데 거란 녀석들이 이러는 게 말이 되는가? 거기다가 지금 압록강 동쪽 강동 땅에 거란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것도 아니고. 빈 땅을 먹겠다는데 이래! 지네들이 먹은 땅이면 이해라도 하지. 이 심보가 고약한 것들…….”
왕건은 손까지 벌벌 떨며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아기에게 악영향이 갈까봐 귀를 막았다. 왕건의 말을 들은 유금필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거란 장수들 중에 삼한 땅의 지리에 능통한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소장은 거란의 무리들이 북쪽에 살아서 우리 땅의 지리를 모를 줄 알았는데…… 강동 땅을 우리가 얻으면 우선 고려 땅을 지키기가 편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군사를 길러서 요동으로 나아가기에도 편합니다. 옛 고려의 미천왕이 강동 땅을 얻은 이후 그곳을 바탕으로 옛 고려가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차지해야 할 땅인데. 거란도 지금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동 땅을 완충지대로 남겨서 우리를 견제하려는 의도입니다.”
나는 유금필이 말할 때는 재빨리 귀를 열었다.
‘유금필은 참 역사를 바탕으로 교양 있게 말을 잘 해. 아기 태교에도 참 좋을 것 같아.’
나는 유심히 유금필의 말을 들었다. 여기에서 유금필이 말한 강동 땅은 오늘날의 평안북도 인근이었다.
평안북도 지역은 산세가 험해서 수비하기가 좋았다. 고려가 이 땅을 점령하면 여러 북방세력들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을 기반으로 요동으로 진군해 볼 수도 있었다. 설사 요동 점령에 실패하더라도 퇴각해서 험준한 강동을 지키면 북방세력들이 고려 본토로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거란도 이걸 지금 알고 있는 것이다.
“거란이 이리 우리의 사업을 훼방 놓을 뿐만 아니라, 발해의 동포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삼한을 통일하면서 10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게 됐다. 이 군사를 바탕으로 한번 옛 조상의 땅으로 진군해야하지 않겠는가?”
왕건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유금필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하는데 왕건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의 뜻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 고려 혼자 출병하면 거란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허나 중원 땅의 석경당과 함께 출병해서 이중전선을 만든다면 거란도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 석경당이 지금 연운 16주를 넘겨줘서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가? 역사에 남을 자기 이름을 생각해서라도 연운 16주를 되찾을 마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와 중원의 군사가 동시에 출진하면 반드시 발해의 동포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중전선의 위력은 우리가 백제와 싸우며 익히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나주를 점령해서 우리가 얼마나 이득을 봤는가?”
왕건이 열변을 토해냈다.
“음,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중전선을 만들기만 하면 거란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석경당이 움직일지?”
유금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경당도 장수 출신이라고 들었다. 이중전선을 만들기만 하면 거란도 힘을 못 쓴다는 것을 알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 그리 욕을 먹고 있는데 참을 수 있겠는가? 우리 고려가 군사를 내는 것을 알면 당연히 호응할 것이다. 물론 우리도 준비 기간이 필요하니 당장 일을 추진할 수는 없고, 어쨌든 여러 천축 고승들을 계속 불러서 정보를 모으고 석경당에게도 사람을 보내야 한다. 여러 장수들과 중신들도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더니 왕건이 유금필뿐만 아니라 나와 왕무 쪽도 둘러봤다. 이제 조정에서 정윤파가 가장 강력한 파벌이 됐다. 그러니 왕건의 북벌에 협조를 잘 하라는 의미였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곁에 있던 왕무가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나도 왕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착잡했다.
‘왕건의 구상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원래 역사를 보면 결국 안 된다.’
만약 왕건의 구상대로 일이 이루어져 왕건이 대군을 거느리고 거란을 치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게 성공했든 실패했든 왕건은 현대까지 신처럼 존경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지금 그냥 삼한을 통일한 위인으로 존경만 받을 뿐이다. 결국 왕건의 구상이 실패했다는 이야기였다.
‘왕건의 요청에도 석경당이 결국 군사를 안 움직인다. 왕건은 체면이나 명성 때문에 석경당이 거병할 거라 믿고 있지만 석경당은 그런 거에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이라. 석경당과 같은 시대를 산 게 왕건의 불행이야.’
중원에서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면 고려 단독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란을 칠 수 없었다. 이를 알고 있는 왕건은 결국 죽을 때까지 출병하지 못한다.
‘여러모로 시기가 안 맞았어. 왕건이 죽기 1년 전에 석경당이 죽는다. 그리고 석경당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석중귀는 목숨을 걸고 거란과 전쟁을 일으켰어. 그런데 석중귀가 즉위할 때는 왕건의 목숨도 오락가락하니.’
만약 왕건이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서 석중귀에게 호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중귀가 즉위할 때 왕건은 건강이 안 좋았고, 석중귀가 거병했을 때는 왕건이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왕건 사후 고려 내에서 왕위를 둘러싸고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석중귀를 도울 수가 없었다. 결국 몇 년간 거란과 혼자 맞서 싸우던 석중귀의 진나라는 그대로 멸망한다.
‘거란에게 일이 너무 잘 풀렸지 뭐. 이건 사람의 수명과 관련된 일이라 내 미래지식으로 뭘 어찌해 볼 수도 없고. 또 안 된다고 말을 하면 괜히 초를 친다고 왕건에게 찍힐 게 뻔하니.’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왕건은 신이 나서 유금필과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질리부일라 대사를 통해 석경당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요량이십니까?”
유금필의 말을 듣고 왕건은 고개를 저었다.
“질리부일라 대사는 나이도 너무 많고 이런 일에 적합한 성격이 아니다. 불법을 너무 깊이 공부했어. 계속 해외의 승려들을 초청하다 보면 반드시 적합한 사람이 나온다. 총명하면서 이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말이야.”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이 흘러가는 것을 봐야겠지만 폐하의 전략이 합당합니다.”
유금필이 그리 말하자 왕건은 뛸 듯이 기뻐했다.
“대장군이 확인을 해주니 다행이군. 대장군은 군사적으로 맞는 말만 하니. 이 일이 잘 돼야 할 텐데. 어쨌든 여러 사람들도 발해의 동포들을 해방하는 일에 힘을 쏟도록.”
왕건은 다시 한번 좌중을 둘러보며 그런 당부를 했다.
‘왕건의 뜻이 북벌에 있는 만큼 나와 왕무도 그 사업에 동참해야 해. 그래야 우리가 군권을 장악하는 데 수월하다.’
나는 그런 계산을 했다. 그러다가 퍼뜩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거 일이 묘하게 돌아가겠는데. 내가 역사를 바꿔서 왕무가 순조롭게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왕무가 왕위를 물려받고 안정적으로 통치를 하고 있을 때 중원에서 석중귀가 군사를 일으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무엇보다 왕무도 북벌에 대해 진심인데? 그동안 내가 경험한 왕무라면 반드시 왕건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북벌을 하려고 할 거야. 고려 왕실이나 조정 사람들 다수가 북벌의 뜻이 있어.’
나는 힐끗 내 곁에 앉아 있는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왕무는 왕건의 웅대한 구상을 듣고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내 배를 움켜쥐었다.
‘고려와 중원에서 동시에 출병하면 확실히 거란을 쓰러뜨릴 확률은 높아진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전쟁은 현실이라고. 도박이야. 왕무가 대군을 이끌고 거란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일이 안 풀리기라도 하면.’
그런 상상을 하니 나는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진정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은 역사를 바꾸기보다는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이용해 나와 왕무의 이득을 챙기는데 주력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역사의 대세를 바꿀 수 있는 위치까지 온 것이다.
‘그, 그냥 왕무가 왕이 되고 안정적으로 고려를 통치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안 될까? 그런데 발해 동포들은 지금도 여전히 거란에 맞서 싸우고 있어. 그리고 긴 역사를 살펴보면 이게 천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야. 우리나라가 어쩌면 요동땅을 회복할 수도 있는. 백, 백두산도 터지니.’
참 역사가 웃긴 게 왕건이 죽고 나니까 거란에 악재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왕건이 죽고 나서 3년 뒤에는 말 그대로 백두산의 화산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거란이 점거하고 있는 구 발해령이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이때는 중원에서 석중귀가 거란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여기에 왕무를 중심으로 고려군이 진군하면 거란은 삼중고에 놓이게 된다. 그래. 그러긴 해. 거기에 미래 역사를 아는 내가 있으니 타이밍을 맞추기도 쉽고.’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무서웠다.
‘거란과 전쟁을 일으켜 역사를 크게 바꾸면 내 미래 지식도 의미가 없어. 그때 가서는 순수한 내 힘으로 왕무를 도와야 하는데. 나는 일개 대학원생일 뿐이니.’
거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잠시 비틀거리는데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국선!”
왕무가 그리 부르짖으며 나를 껴안았다.
“어이쿠. 내 말이 너무 길었다. 어의를 불러라.”
왕건도 깜짝 놀라서 부르짖었다. 동양원 부인도 달려와서 내 이마를 짚어봤다.
“이를 어째!”
동양원 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걱정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는 내 근심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