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77화 (177/216)

< 177 : 정주원 >

끊임없이 몰려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정주원은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와 왕무가 광주원군과 함께 다가오자 정주원 사람들도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나왔다.

"정윤 전하, 어서 오십시오. 왕후 마마께서도 곧 나오실 것입니다."

정주원의 시녀들이 말했다. 잠시 기다리자 정주원에서 정주 왕후, 유천궁 등이 직접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흐흐흐, 정윤이라는 지위가 좋긴 좋아. 왕규도 아마 이걸 노리고 새벽부터 나주원에 달려온 거겠지? 우리와 함께 움직이면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정윤인 왕무가 직접 오니 정주 왕후가 달려 나오는 거지.'

유천궁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왕무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렇게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께서 직접 왕림하시다니.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와야 해서 왔습니다."

왕무가 의젓하게 말했다. 왕무와 유천궁이 잠시 서서 조정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사이 나는 손짓을 해서 내 뒤쪽에 서있는 광주원군을 불렀다.

왕규는 내 손짓을 보고 반색을 하며 광주원군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광주원군이 다가오자 나는 그 손을 잡고 왕무 곁에 다가갔다.

광주원군은 졸지에 나와 왕무 사이에 서게 됐다. 나는 광주원군이 정주원 쪽 인사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를 주기 위해 부른 것이다.

내가 광주원군과 함께 다가서자 유천궁도 광주원군을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정윤비 마마와 함께 오신 이 소년은?"

"광주원군입니다. 유 장자를 뵙습니다."

내가 광주원군의 손을 힘주어 쥐자 광주원군은 재빨리 예를 갖추며 그렇게 대답했다. 왕규가 교육을 잘 시켜놓은 것 같았다.

"정주원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런 거짓말을 쳤다.

"광주원군도 오셨군요. 허허허. 잘 됐습니다. 자 모두 드시지요."

유천궁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짓 광주원군의 손을 잡고 다가온 내 행동의 진의를 유천궁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광주원군을 신랑으로 택하라고 압박을 넣은 것인데 유천궁은 이에 큰 부담을 느낀 것 같았다.

그렇게 나와 왕무 등이 들어서자 이미 정주원 안에 들어와 있던 고관대작들도 모두 몸을 일으켜 예를 갖추었다.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인사를 했다. 왕무는 겸손한 태도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걸어갔다. 그 뒤에서 나와 왕규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왕무를 따라갔다.

'역시 공식 서열은 높은 게 좋아. 이럴 때면 내가 존귀한 정윤비라는 것이 확 체감되네.'

정주원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나와 왕무 등이 착석했다. 그런데 잠시 뒤 정주원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정승공과 신란공주께서 오셨습니다."

정주원 시녀 하나가 그리 외쳤다. 김부와 유설란이 온 것이다. 그러자 정주 왕후와 유천궁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또 다시 달려 나갔다.

정주원 안의 고관대작들도 김부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허겁지겁 일어났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굉장히 불쾌해졌다.

'김부가 고려 밖에 있을 때는 그냥 다 망해가는 나라의 왕일뿐이었는데, 고려 조정에 항복해서 안에 들어오니 만만치가 않아. 다른 대호족들과는 체급이 다르긴 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와 왕무 등은 일어서지 않고 김부 등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뒤 김부와 유설란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는 웬 꼬맹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 아이가 충주원의 왕정 태자인가? 누가 보면 무슨 김부와 유설란 사이에서 난 아들인줄 알겠다. 무슨 얼토당토하지 않게 저런 가증스러운 요식 행위를 하고 있어?'

내가 격분해서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는데 김부 일행이 우리 쪽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냥 앉은 채로 김부 등이 하는 인사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왕무가 몸을 일으켜 김부에게 예를 갖추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는데 유설란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처음 학관에 들어갔을 때 유설란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그 원한을 갚지도 못 했네.'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김부와 나란히 들어온 모습을 보니 결혼도 잘 한 것 같아 배가 아팠다. 물론 김부와 유설란 사이의 나이 차가 있긴 했다. 그래도 김부가 아직 30대 후반이었다. 잘 꾸미고 들어오니 그리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왕무와 김부 사이에 난감한 문제가 불거졌다. 누가 상석에 앉을 지를 두고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정윤 전하께서 상석에 오르십시오. 제가 어찌."

김부가 몸을 사리면서 왕무에게 그리 말했다. 그런데 착한 왕무가 김부에게 계속 상석에 오르라고 권했다.

"폐하께서 정승공을 각별히 우대하시는데 어찌 내가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또 분기탱천했다. 하지만 왕무의 처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이 김부가 고려 공식 서열 2위라고 정해놨어. 나이도 왕무보다 많고 거기에 신라의 전(前) 국왕이니. 왕무가 김부보다 상석에 앉으면 모양새도 이상하고 나중에 왕건의 추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왕건이 신라를 우대한 것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있는데, 김부에 대한 예를 소홀히 하면 왕건에게 망신을 준 격이야.'

이성적으로는 나도 그런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몸을 사리는 김부와 달리 그 곁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유설란의 모습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부는 연거푸 왕무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결국 상석에 가서 앉았다. 나와 왕무는 그보다 약간 아랫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김부와 충주원의 혼사가 이루어진 것이 우리로서는 큰 타격이야. 공식서열이 높다는 것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후환이 무궁무진해. 오늘 반드시 내가 이 화근을 뽑아내야지.'

나는 웃고 있는 유설란의 얼굴을 보며 그런 결심을 다졌다. 그 사이에도 정주원에 고려의 유력인사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좀 늦었구나."

임희가 황급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버님. 오라버니는요?"

나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격구단 훈련일정 때문에 나갔다."

임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대답했다.

'임연객이 격구단 선수들과 함께 오지수를 호위해서 무사히 개경을 나섰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동양원 부인, 해량원 부인도 오고 왕만세, 박술희도 속속 우리 쪽에 달려왔다. 유금필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결국 딸인 동양원 부인 곁에 앉았다.

어느새 정주원에 온 고관대작들은 세 패로 갈려있었다. 정윤파 인사들은 모두 나와 왕무 쪽에 줄지어 앉았다.

그리고 김부와 유설란 아래에는 유긍달, 황보제공 등을 필두로 해서 반정윤파가 앉아있었다.

"허허허."

그리고 좌승 공직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정윤파와 반정윤파가 대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공직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었다. 공직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중립을 지키면서 구경이나 하겠다는 거지. 하여간 공직은 음흉해가지고.'

그리고 그런 손님들 사이에서 유천궁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이미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낀 유천궁과 정주원 사람들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정주원 공주다!"

과연 한쪽에서 8~9세쯤으로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시녀들과 함께 장내에 나왔다.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정주원 공주에게 쏠렸다. 이 정주원 공주가 누구와 혼사를 맺느냐에 따라 고려 조정의 세력 균형이 변하는 것이다.

그러자 겁먹은 정주원 공주가 시녀들 뒤에 숨었다.

"자 그럼 축하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음식을 내 오거라!"

유천궁이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쪽으로 끌기 위해 외쳤다. 시녀들이 일제히 움직여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선 축하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음식이 엄청 고급이네. 정주원이 돈이 많긴 많아.'

나는 시녀들이 내온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

손님들은 식사를 마친 뒤, 생일을 맞이한 정주 왕후에게 덕담을 건네고 준비해온 선물을 바쳤다. 선물을 보고 정주 왕후는 일일이 감사인사를 하고, 축하연은 무난히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물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축하연이 끝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이제 유천궁의 이마에서는 땀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광주원군과 왕정 태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 명분도 없었다.

그 곁에서 정주 왕후도 안색이 창백했다.

정윤파든 반정윤파든 세력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쪽을 택하면 다른 쪽과는 척을 지게 되니 정주원 사람들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좌승 공직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정주 왕후 마마께서는 따님이신 정주원 공주 마마를 어느 쪽에 출가시킬 요량이십니까? 충주원입니까? 광주원입니까?"

공직을 비롯한 중립파 인사들은 그저 이 일이 어찌 결판날지 궁금해서 정주원에 왔다. 그래서 빨리 결과를 알고 싶어서 공직이 대표로 나서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람들이 일제히 정주 왕후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몸을 일으켜 사람들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좌승, 심심하십니까?"

나는 진작 나서서 분위기를 이끌고 싶었는데 계기가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공직이 이리 입을 여니 좋은 기회 같아서 이렇게 나섰다.

"그렇습니다. 많이 지루합니다. 정윤비 마마."

공직이 내 모습을 보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혼인은 중차대한 일인데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정주 왕후 마마께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좌승께서 지루해하시니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좀 해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한가운데까지 나와서 말했다.

"허허허."

공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내가 아버님의 손을 잡고 처음 나주원에 들어섰을 때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한 건물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주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적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견훤 때문에 나주까지 가는 수로가 끊겨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쑥 그런 말을 꺼내자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한쪽에 앉아있던 동양원 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내가 궁에 처음 들어와 지낼 때 동양원 부인께서 나에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조언을 건네주셨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그랬습니다."

동양원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줬다. 장내의 사람들은 어느덧 내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궁금해서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양원 부인의 말을 들은 나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내 나름대로 계책을 꾸미고 있었는데 동양원 부인께서 그것도 모르고 저에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말입니다. 나주원에 온 이래 나는 아침, 점심에는 고기 반찬만 먹고 저녁에는 채식만 하며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다시 공직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공직은 이제 웃지도 않고 수염만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그야 나주원에서 식사를 담당하는 시녀들 4명이 2개의 조로 나뉘어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주에서 나주 왕후 마마를 따라온 믿을 만한 시녀들은 왕후 마마와 오지수 공주 마마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나주원은 돈이 쪼들려서 밖에서 고용인들을 구해서 식사와 청소를 맡겼습니다. 오전에는 2명의 시녀들이 아침, 점심을 담당하고 저녁에는 또 다른 2명의 시녀들이 저녁식사를 만들었습니다. 아마 오전에 일하는 시녀들은 내가 육식을 즐기는 줄 알 것이고 오후에 일하는 시녀들은 내가 불교라도 신봉해 채식만 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내가 말을 계속 이어나가다가 목이 말라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참으로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공직이 그사이 나에게 그리 맞장구를 쳤다.

"나는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여러 가문에 가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황주원, 진주원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육식과 채식이 고루 섞인 반찬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삼년산성을 치러 가셨을 때 나도 따라서 출전했습니다. 그때 견훤이 군사를 상당히 잘 부려서 결국 우리 고려 군사들은 충주로 쫓겨 갔습니다. 나 역시 충주 객사에 한동안 묵었는데 그때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때 나온 반찬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고사리, 미나리, 달래, 연근, 토란이 정갈하게 잘 나왔습니다. 잡찬. 그때 식사를 잘 대접해줘서 고마웠습니다."

나는 이제 유긍달 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암시하는 바를 깨달은 고관대작들은 일제히 유긍달에게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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