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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76화 (176/216)

< 176 : 도주 >

나는 왕무와 함께 나주 왕후의 처소로 갔다. 처소에는 나주 왕후와 오지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정주 왕후 마마의 생신입니다. 아마 그날 축하연 자리에서 정주원 공주의 혼사가 결판날 것입니다. 그 이후엔 오지수 공주 마마와 다른 공주들의 혼인문제도 급물살을 탈 것입니다."

나는 문득 오지수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어린 소녀였던 오지수가 이제는 다 컸다. 이미 오지수의 혼기는 꽉 찼다.

오지수의 혼인이 이리 늦어진 것은, 오지수의 혼인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 결판을 내야 했다.

"우, 우리 지수는 명주의 김 공자와 오래 교류를 해왔다. 게다가 김 공자가 개경에 있을 때 내가 몇 번 만난 일도 있는데 참 착하더구나. 허나 사람들이 지수와 김 공자의 혼인을 반기지 않으니."

나주 왕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장명은 가문의 세력도 강력하고 오지수와 개인적인 인연도 깊었다. 나주 왕후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명주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습니다. 손긍훈을 구하러 갈 때도 그렇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여러 대호족들이 사생결단을 낼 각오로 이 혼사를 반대할 테니."

왕무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왕무도 오지수와 김장명의 혼인을 찬성하긴 하지만 여러 대호족들의 방해를 걱정하고 있었다.

"……"

오지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오지수도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예전에 김유신의 부모인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개경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서 혼사를 치르고 용서를 받으면 되는 일입니다."

나는 내 속내를 드러냈다.

"헉."

그 말을 들은 나주 왕후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내 계책은 사실상 야반도주를 하자는 것이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음."

왕무도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오지수 공주 마마. 이걸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나는 오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계책을 쓸 때는 오지수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다. 오지수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행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겠어요! 사실 저도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만 제가 대뜸 달아나버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두려웠는데……언니가 먼저 그리 말씀해주시니."

오지수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지수도 그동안 여러모로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 그러나 개경을 빠져나가 혼사를 치른다고 해도 그 후폭풍은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니?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만한 일을 벌이면 폐하께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기 어렵다."

나주 왕후가 말했다.

"그건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충주원의 무리들이 우리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후폭풍을 막아내겠습니다. 다만 그 방법은 기밀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냐? 네가 그렇다면."

나주 왕후는 내 말을 듣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주 왕후는 지난 몇 년간 내 수완을 지켜봤다. 그런만큼 신뢰가 쌓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오지수 공주 마마를 무사히 명주까지 보내는 것입니다. 충주원에 포섭된 호족들이 오지수 공주 마마가 명주까지 가는 길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바로 대관령을 넘어 명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명주까지 가는 지름길이니 다른 사람들이 다 예상할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고 먼저 사벌주로 들어갔다가 샛길을 타고 명주로 가야 합니다."

나는 소매 속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선필의 딸인 정혜에게 가서 받아온 지도였다. 선필은 사벌주 인근의 지리에 정통했다. 그래서 안전하게 명주까지 갈 수 있는 샛길이 그려진 지도도 가지고 있었다. 선필과는 여러 인연이 두터워서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오지수는 그 지도를 받아들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오지수 공주 마마를 호위할 믿음직한 군사를 뽑아야 하는데……"

내가 입을 떼자마자 왕무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이런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기병 20기를 뽑아 지수를 호위하게 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지수의 행장을 꾸리는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왕무의 말을 듣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무가 군영에서 오래 일해서 이런 인맥은 풍부한 것이다. 1만 명의 대군도 척척 움직이는 왕무인 만큼 이 정도 일을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참 우리 부부는 손발이 잘 맞아.'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던 나주 왕후가 말했다.

"그럼 지수가 대체 언제 떠나야 하니? 설마 내일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니지?"

"아마 유긍달은 어렴풋이 우리가 오지수 공주 마마를 빼돌리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정주원 왕후 마마의 생신 당일에 오지수 공주 마마가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그날 유긍달을 비롯해 웬만한 중신들은 모두 정주원에 모일 것입니다. 축하연 자리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는 유긍달이 오지수 공주 마마의 소식을 듣더라도 무슨 지시를 내리기 힘듭니다. 또 그날 제가 충주원의 무리들과 결판을 낼 참입니다. 여러모로 그날 오지수 공주 마마가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미리 준비한 계획을 나주 왕후에게 이야기해줬다.

"그래. 참 다행이다. 시간이 좀 있구나.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은데. 지수야. 한동안 너를 못 보겠구나."

나주 왕후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니 오지수를 껴안았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낸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나주 왕후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지수가 탈출할 준비를 하면서 또 정주원 왕후의 선물도 챙겨야 했다. 거기에 한림원에도 일을 하러 나가야했다.

나는 한림원 한쪽에 앉아서 턱을 괴고 있는 왕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일이 정주 왕후 마마의 생신입니다. 폐하께서는 안 오십니까?"

"그야 뭐. 나는 못 가지. 워낙 일이 바빠서."

왕건이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예."

왕건은 안 온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약 정주 왕후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한다 치자. 그럼 다른 왕후, 부인들의 생일에도 다 참석해야 해. 그러면 1년에 20여 일은 축하연에서 술 먹느라 시간을 허비해야 하니.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니? 여느 때처럼 김악이 선물을 들고 갈거다."

양심에 찔렸는지 왕건이 그리 길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이번 정주 왕후의 생일 축하연은 특별한데. 정주원 공주의 혼사를 두고 대호족들이 크게 격돌한 게 뻔하다고. 참 이런 싸움에는 또 끼고 싶지 않다는 거지. 이럴 때 좀 와서 왕무의 손을 들어주면 좋으련만.'

나는 약간은 아쉬웠다. 그러나 내가 계책을 펼치려면 왕건이 그 자리에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한림원 업무를 마치고 왕건의 동선도 확인한 나는 긴장을 한 채 나주원에 돌아왔다. 이날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오지수가 떠나고, 정주원에서 혼사문제를 두고 충주원 쪽과 대결도 해야 했다. 준비할 일이 많았다.

"지수를 호위해줄 믿을만한 군사들을 개경 교외에 준비시켜 놨습니다. 다만 그들을 개경 안에 부를 수가 없습니다. 사병들은 반드시 폐하의 허락을 받고 개경에 들어와야 하니."

왕무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당황했다.

"그럼 개경 교외까지는 시녀들과 하인들만 데리고 오지수 공주 마마가 가야한다는 말씀입니까?"

약간은 조마조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부경이 격구단 선수들을 이끌고 지수를 교외까지 데려다 줄 것입니다. 격구단 선수들이 훈련을 위해 개경 교외를 오가는 일이 많으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휴우."

그 말을 듣고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내 돈만 탕진하던 격구단이 겨우 쓸모 있는 일을 하나 했네. 개경 안에서는 사병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격구단이라도 진짜 있어야 해.'

오지수 일은 그리 처리한다고 해도 정주원에서의 일이 걱정이었다.

'거기서 내가 잘해야 하는데.'

나는 긴장 때문에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왕무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왕무의 손가락을 내 마음대로 비틀기도 하고 만지작거렸다.

'왕무의 몸 자체가 염주 같아. 팔근육을 만질 때도 그렇고 손도 비슷한 효과를 주네.'

이러니 그나마 긴장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연, 연우야."

내가 손을 만지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왕무가 약간 상기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앗, 왕무가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긴장을 풀려고 정윤 전하의 손만 만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왕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왕무의 손을 염주처럼 굴리면서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있는데 밖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더니 처소 문 밖에서 시녀 경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주원군 저하, 광주원 부인, 소광주원 부인, 대광 왕규 공께서 나주원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새벽에 무슨? 어서 모셔라!"

왕무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왕규가 이 새벽에 찾아온 것이 심상치 않았다. 나와 왕무가 함께 일어나 나가보니 과연 왕규와 광주원군 등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왕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큰일을 앞두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 같아 이리 찾아왔습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와 함께 정주원에 가는 것이 좋을 듯하여. 저하. 정윤 전하께 인사를 올리십시오."

왕규도 큰일을 앞두고 초조해서 잠을 못 이룬 것 같았다. 그래서 새벽부터 이렇게 준비를 마치고 달려온 것이다. 왕규 옆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광주원군이 한걸음 나서서 왕무에게 인사를 올렸다.

"광주원군이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광주원군이라 부르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아직 9살 어린아이였다. 몸에 딱 맞춘 작은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참 소꿉놀이나 할 이 꼬맹이를 데리고 혼사를 의논하다니. 하긴 9살이면 현대로 치면 초등학생이고 소꿉놀이 할 나이는 지났지. 나와 왕무도 11살, 10살 때 혼사를 정했으니.'

인사를 하고 나서도 광주원군은 졸린 지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왕무는 광주원군에게 안쓰러움을 느낀 듯했다.

"광주원군은 어리니 우선 재우고 우리끼리 일을 의논하다가 시간이 되면 정주원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전하."

왕규는 굽신거리면서 왕무의 지시를 따랐다.

그렇게 밤을 지새운 일행은 마침내 정주원으로 향했다. 같은 궁궐 안이니 나주원과 정주원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나와 왕무를 포함한 일행은 순식간에 정주원 앞에 당도했다. 정주원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정주 왕후의 지위가 높긴 하지만 평소에는 생일이라 해도 친한 사람들만 직접 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물만 보냈는데. 이번에는 고려에서 힘 있는 사람들은 다 왔네.'

정윤파와 반정윤파가 정주원과의 혼사를 두고 다투는 것을 고려 조정 내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세몰이를 하려고 정윤파, 반정윤파 사람들은 거의 다 이 축하연에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어찌 흘러갈지 궁금한 중립적 성향의 인사들도 다 찾아왔다.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손님들이 정주원에 몰려들었다.

손님맞이를 하느라 정주원 사람들은 정신이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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