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75화 (175/216)

< 175 : 권모 >

'오늘은 왕건이 휴가를 줬으니 일을 빨리 마치고 쉬려고 했는데.'

분명 처음에는 내 계획대로 됐다. 한림원에서 일찍 나온 나는 상산저에 가서 임희, 왕규와 함께 향후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그 일을 마쳐도 평소보다 시간이 널널했다. 그래서 나주원에 돌아와서 푹 쉬고 있었어.'

내가 침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왕무가 약간은 지친 기색으로 들어왔다. 군영의 일을 돌보느라 힘든 것 같았다.

"비록 백제와의 전쟁이 끝났지만 거란 때문에 군사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으니 일이 많습니다."

왕무는 처소에 들어와서 그리 말했다. 그런데 그런 왕무의 얼굴을 보니 나는 슬슬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늘 임희, 왕규와 더불어 혼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를 하는 와중에 잠시 느꼈던 울화가 다시 솟아올랐다.

'원래 역사에서 왕규의 딸, 김긍률의 딸과도 혼인을 해? 물론 내가 있는 지금 역사에선 그런 일이 없었지만. 나 참 지금은 그런 일이 없으니 왕무에게 뭐라 따질 수도 없고.'

분명 왕무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판 죄를 저지른 것은 맞았다. 분명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지금의 왕무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지금 역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이성적으로는 나도 얼핏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왕무의 잘생긴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연우야. 화났어? 오늘 한림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침상에 걸터앉은 왕무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왕무가 내 기분을 민감하게 눈치 챈 것이다.

"아닙니다. 정윤 전하."

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연우야.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 해."

내 태도를 보고 왕무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모든 걸 말해버리고 싶다. 털어놓고 왕무와 의논을 하고 싶어. 그런데 그러면 내가 다른 세상에서 빙의한 사람이란 것도 다 말해야 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럼 일이 엄청 복잡해지는 것이다. 결국 내 기묘한 처지가 문제였다.

'정말 순수하게 이 시대 사람이고 아무 고민 없이 왕무와 알콩달콩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지 그럼 또 왕무를 지킬 수가 없어. 미래지식이 있으니 내가 왕무를 위해 뛸 수 있는 거야.'

그러는 사이 나는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껴안은 왕무의 몸에서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나를 껴안고 있는 왕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어. 앞으로 일이 많으니 오늘은 체력을 좀 비축해뒀어야 하는데.'

나는 왕무 곁에 누워서 한숨을 쉬었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분노할 힘마저 다 써버려서 마음이 편해지긴 했는데. 이래서 내일 어떻게 일을 하지? 앞으로도 바쁜데.'

왕무는 내 곁에서 잠들어있었다. 하지만 왕무가 잠들었다고 해서 지친 것이 아니었다.

'나도 처음에는 왕무가 지쳐서 잠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냥 군영에서 오래 지내서 잘 수 있을 때 습관처럼 자는 거야. 이러다가 또 깨면……요새 왕무가 침상에서 좀 못 참는 것 같아.'

나는 방금 전 왕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왕무의 팔 근육을 살짝 찔러봤다. 전장에서 단련된 근육이었다.

'촉감이 너무 좋다. 자느라 힘을 빼고 있어서 딱딱한 것도 아닌데, 또 말랑말랑한 것도 아니고. 딱 만지기 좋은 감촉이야.'

나는 스님들이 염주를 굴리듯 왕무의 팔 근육을 반복적으로 만지작거렸다. 이러니 마음속에 가득한 근심걱정도 가라앉고 머리도 맑아졌다. 지금 고려 조정의 복잡한 정세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떠올랐다.

그렇게 내가 상념에 잠겨있는데 왕무가 깨어나서 내 손을 쥐며 말했다.

"연우야. 또 하자고?"

왕무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서 화들짝 놀란 내가 말했다.

"그냥 네 팔 근육을 만지면서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래! 스님들이 염주를 굴리는 것처럼."

"어, 알았어."

왕무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팔을 내주었다. 그런데 왕무가 깨서 팔에 힘을 줘서 그런지 잠들어있을 때의 그 근육 감촉이 아니었다. 만져도 마음이 맑아지지 않았다.

"힘을 좀 빼줘. 잠들어있을 때처럼."

"응."

왕무가 몸에 힘을 뺐다. 그제야 내 손끝에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헤헤헤, 어쨌든 이게 내꺼란 말이지.'

나는 왕무의 팔 근육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그리 웃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왕궁이며 한림원이 모두 들썩거리고 있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한림원의 학사들이 왕건에게 축하를 건넸다. 왕건과 박영규의 딸이 하는 혼례식이 내일이었다.

"이거 참. 이 나이에……"

왕건은 민망한 듯 웃었다.

'박영규의 딸과의 혼인은 하는 게 맞지. 구 백제령의 민심을 달래야 하니. 왕건의 부인이 그리 많은데 백제 출신 부인이 없으면 그쪽이 서운할 테니. 다만 내 다른 시어머니들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건이 또 부인을 들이자 나주 왕후는 많이 우울해했다. 동양원 부인도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해량원 부인이 된 정혜도 슬픈 기색이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나도 힘들었다.

'왕무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단속을 잘해야겠어. 내가 열심히 뛰어서 왕무의 세력을 탄탄하게 굳히면 왕무가 다른 부인을 맞이할 필요가 없겠지?'

나는 새삼 그런 결심을 했다.

'왕건의 혼인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여러 태자들과 공주들의 혼사도 이루어진다. 그 결혼전쟁에서 우리 정윤파가 이겨야 해! 그러면 이 지루한 암투도 끝난다. 한번 정략결혼이 이루어지고 나서 형성된 세력구도가 끝까지 갈 테니.'

나는 결전의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왕건이 혼인식이 끝나기 전에 태자와 공주들이 먼저 혼사를 발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물밑에서 여러 대가문들 사이에 긴장감만 흐르고 있었다.

왕건의 혼사만 끝나면 이제 물밑에서 오가던 혼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왕건이 이 구도를 모를 리 없는데 모른 척하고 그저 자기 혼사에만 정신을 쏟으니. 이왕 왕무를 밀어주는 김에 이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을 것을.'

여러 태자, 공주들의 혼인에 대해 왕건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웃고 있는 왕건의 얼굴이 너무 얄밉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왕건과 박영규의 딸 사이의 혼례식은 무사히 끝났다.

"만세, 만세."

혼인식에서 여러 왕족들과 중신들은 두 팔을 번쩍 들고 함성을 질렀다. 괜히 못마땅한 티를 냈다가 찍힐까봐 나도 열심히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은 너무 못마땅했다.

'도대체 며느리인 내가 시아버지의 결혼식에 와서 만세를 불러야 하는 이 상황이 말이 되는 거야? 거기다가 한 번도 아니고. 현대였다면 왕건의 친구, 친척들은 결혼축의금을 내다가 다 파산했을 거야. 29번이나 축의금을 내야하니.'

속으로 그리 궁시렁대다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건의 혼례식만 끝나면 그야말로 혼사를 두고 대호족들 사이의 항쟁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의 혼례식이 끝나고 고려 정계에는 폭풍전야의 고요가 감돌았다. 뭔가 조그마한 계기만 생기면 터질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계기가 무엇인지도 곧 드러났다. 광주원의 왕규가 허겁지겁 나주원에 달려왔다.

"이제 정주 왕후 마마의 생신이 20일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습니다. 정주 왕후의 생신날 일이 터질 느낌입니다."

왕규가 또 무슨 정보를 얻은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왕규가 무슨 정보를 가져왔는지 알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궁금하지 않은 척 태연하게 응대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이미 아시겠지만 김부와 신란공주가 그날 직접 정주원에 온다고 합니다. 명분이야 정주 왕후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이지만 그들이 노리는 바는 뻔합니다."

왕규가 이까지 갈며 말했다. 신란공주는 김부의 아내가 된 공주 유설란을 가리켰다. 왕건은 김부가 항복하자 신란궁이란 궁을 지어주었다. 그래서 유설란이 신란공주란 호칭도 얻게 된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결혼전쟁의 가장 핵심은 정주원 공주의 혼사였다.

정윤파는 왕규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내세워 정주원에 청혼하고, 반정윤파는 충주원의 왕정 태자를 앞세워 구혼하고 있었다.

유천궁과 정주 유씨들은 정윤파와 반정윤파 사이에서 지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어느 쪽에 줄을 설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충주원과 가까운 사이고 신라 전 국왕이었던 김부가 정주왕후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찾아오면, 정주 유씨들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규는 그것을 알고 구원을 청하러 나주원에 달려온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윤 전하께서 반드시 그날 정주원에 가실 것입니다. 나도 직접 정주원에 갈 것입니다. 저쪽에서 김부를 움직였다면 우리쪽에서도 정윤 전하께서 나서실 수밖에 없지요."

내가 왕규에게 말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유천궁이 시간을 더 못 끌 것 같습니다. 정주 왕후 마마의 생신날 정주원 공주의 혼사문제도 결판이 날건데. 그들이 반드시 광주원군을 택하게 만들 방도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왕규는 초조한 안색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다 계책이 있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웃으며 왕규를 달랬다.

"그 계책이 무엇입니까? 그러고 보니 오지수 공주 마마의 혼사문제도 해결할 방도가 있다고 하시고. 혹시 무엇인지?"

"이건 진짜 기밀유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아버님뿐만 아니라 정윤 전하께도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왕규에게 말했다.

"그렇다면야 저도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 그날 정윤비 마마만 믿고 있겠습니다. 정주원과의 혼사는 꼭 우리 쪽이 쟁취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왕정 태자가 정주원 공주와 혼약을 맺는다면……"

왕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충주 유씨, 황주 황보씨, 경주 김씨가 혼사로 연결되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 정주 유씨도 합류하면 그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이다.

'정주 유씨 자체가 엄청난 부자 가문이야. 거기다가 유천궁이 젊은 시절부터 왕건에게 돈을 대주며 후원하기도 했고 고려 왕실에 공로를 많이 세웠다. 왕건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그들이 우리 쪽에 와주기만 한다면 거꾸로 충주원을 고립시킬 수 있다.'

지금만 해도 광주의 왕규까지 합세한 정윤파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에 돈많은 정주 유씨가 오고, 군사력이 막강한 명주 세력이 합세하면 수년간 이어진 고려 조정 내의 암투도 끝나는 것이다.

'정주 왕후의 생일이 20일 남았다고 했으니 20일 뒤에 모든 것을 끝내야 겠군. 저들이 감히 왕무를 흔들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세력 격차를 벌려주마. 그러면 왕무가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부인을 맞이하거나 하는 일이 절대 없지. 반드시 20일 뒤에 모든 것을 끝낸다!'

나는 그런 결심을 했다.

이런 내 굳은 결의가 왕규에게도 느껴진 것 같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왕규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나주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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