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 결혼전쟁 >
왕건이 휴가를 준 덕에 일찍 한림원을 나선 나는 바로 상산저로 향했다.
"어제 연회 자리에서의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임희와 간단한 인사를 마친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흐흐흐, 이러면 어제 내가 연회 때 딴청을 부렸다는 것을 아버님도 모르시겠지? 연회 자리의 일을 알고 있는데 아버님의 의견만 묻는 것처럼 보이니까.'
왕무와 손장난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허나 어쩌겠느냐? 옛 백제 사람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박영규의 딸을 부인으로 들일 수밖에. 옛 백제 출신 부인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박영규 그 친구는 어느 쪽에 붙을지? 이거 참.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구도가 복잡해지는구나."
임희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임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제 그 중요한 일이 오갔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29명의 시어머니들이 완성되어 가는구나! 29명이 엄청 많은 숫자긴 해.'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이제 슬슬 여러 가문들 간의 혼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주 쪽과 혼인하기 위해 충주원과 광주원이 경쟁하는 와중에 왕건마저 또 다른 부인을 들이고 있었다.
"천사옥대마저 개경에 왔다. 사실상 통일이 마무리됐으니 혼인을 통해 세력재편을 해야지. 우리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임희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서 말했다.
"대광 왕규 공이 오셨습니다."
"음, 모셔라."
임희가 시종에게 그리 명했다. 그러더니 임희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왕규가 요사이 상산저에 자주 찾아온다. 광주원군의 혼인문제도 그렇고 여러 일을 논의하기 위해 말이다. 정윤파에 가담한 이후 왕규가 참 열성적으로 뛰는구나."
"대광이야 원래 그런 성품입니다."
나는 실제 역사 속 왕규의 행적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사서를 보면 왕무가 왕이 된 후에도 왕규가 열심히 뛰긴 뛰었지. 원래 정치를 좋아하는 성격인데 그동안 의논할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겠어?'
그 사이 왕규가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마침 정윤비 마마께서도 계시니 다행입니다. 일을 논의하기 좋겠습니다."
내가 임희 곁에 앉아있는 것을 본 왕규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광주원군의 혼사문제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것을 물었다.
"정윤비 마마께서 신경을 써주신 덕에 정주의 유천궁이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요. 냉큼 충주원의 왕정 태자와 혼약을 맺을 기세였는데 시간을 벌었습니다."
왕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하하. 광주원군의 복입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런 상황인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생색을 내려고 일부러 물은 것이다.
그리고 임희가 헛기침을 하며 왕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광주원군 뿐만 아니라 오지수 공주 마마의 혼인 역시 임박했습니다."
"이거 참. 명주의 김순식만 끌어들이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일리천에서 김순식이 기병 3천을 일으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힘으로 따지면 김순식이 황보제공도 압도하고 있습니다.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 명주의 장남과 혼인하시면 우리가 이리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될 것인데."
왕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김순식이 정윤파에 합류하면 일이 끝난다는 것을 충주원 쪽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반발할 것이라. 오지수 공주 마마의 혼인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지요."
임희 역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왕건이 삼한을 통일했기 때문에 이제 고려 국내 정세는 안정된 상태였다. 지난 8년간 내가 표천현을 장악하고 수군을 확보하며, 왕무의 세력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와의 전쟁이 이어지며 정세가 유동적이었기에 내가 미래지식을 바탕으로 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정세가 안정됐다.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여러 대가문들을 상대로 혼인을 하는 수밖에 없어.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가문들 사이의 혼인문제가 엄청 중요했다. 이미 고려 정계는 이 결혼문제를 두고 전쟁에 비견되는 수준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유긍달 등과의 오랜 암투를 끝낼 때가 왔다. 왕건의 수명도 오래 안 남았어. 6년가량 남았나?'
임희와 왕규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그런 결심을 했다. 지금 시점에서 충주원의 유긍달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와해시켜야 했다.
'한 나라를 다스릴 준비를 하는데 6년도 너무 짧은 기간이야. 지금 암투를 끝내고 왕무가 왕이 될 준비를 하나씩 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김순식의 군사력이 필요하다. 김순식의 군사력이 정윤파에 합류하고 왕건이 중앙군을 물려주면, 충주원 세력이 우리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못 덤벼.'
내가 그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장내의 논의는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청주의 대호족 김긍률을 우리 정윤파에 붙여주시려는 기미가 좀 보입니다. 오지수 공주 마마를 그쪽에 보낸다면?"
왕규가 그리 속삭였다. 왕규 역시 나름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정보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청주면 옛 신라에서 서원경을 설치할 정도로 큰 고을입니다. 그 청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큼 김긍률의 힘도 만만치 않습니다. 김긍률이 우리에게 가담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임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최선은 김순식과 힘을 합치는 것이지만, 그러면 충주원을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 분위기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선뜻 오지수 공주 마마와 명주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김긍률이면 차선책은 될 것입니다."
왕규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러니까 실제 역사에서 왕무가 무너진 거야. 유긍달의 수완이 아버님이나 왕규에 비해 압도적이다.'
사실 실제 역사에서 왕건이나 정윤파도 나름 왕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긴 했다. 그래서 청주의 대호족인 김긍률을 정윤파에 끌어들인다. 전격적으로 김긍률의 딸을 왕무가 부인으로 맞이하기도 한다.
'왕무 이 나쁜 놈! 그러고 보니 원래 역사에서 나 말고 다른 부인을 두 명이나 들였어. 왕규의 딸과 김긍률의 딸을. 물론 지금은 나 말고 부인이 없지만.'
그런 역사를 떠올리니 나는 갑자기 왕무에 대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왕무가 첩을 들인 실제 역사를 떠올리기도 싫지만,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정윤파인 줄 알았던 김긍률이 왕건이 죽고 나자 작은 딸을 또 충주원의 왕요 태자와 혼인시켜. 왕무와 충주원이 극한대립을 하고 있는데 양쪽과 다 혼인관계를 맺어버리고 중립선언을 한 셈 이지. 김긍률은 중앙정계의 권력다툼에 끼고 싶지 않았던 거야.'
철석같이 믿던 청주의 김긍률이 이렇게 중립을 선언하자 왕무의 세력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김긍률이 중립적인 성향이란 것을 유긍달은 진작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왕건이 김긍률을 끌어들여도 모른 척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왕요와 김긍률의 딸을 혼인시킨 거지. 그 한방으로 왕무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지금 일이 흘러가는 것을 보니 임희나 왕규도 유긍달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내 존재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처럼 김긍률의 딸을 왕무의 첩으로 들이긴 어려웠다. 그 대신 오지수를 김긍률 쪽에 시집보내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미래 역사를 알지 못했으면 나 역시 유긍달의 계략에 그대로 넘어갔을 것이다. 청주의 세력이 겉으로 보기엔 막강했기 때문이다.
"저에게 오지수 공주 마마를 명주에 시집보낼 계책이 있습니다. 굳이 김긍률 같은 차선책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불쑥 그리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무슨 수를 쓰실 작정이십니까?"
왕규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충주원 등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하면 폐하께서 결코 그 혼인을 허락하지 못하실 텐데. 무슨 방법이 있느냐?"
임희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지수 공주 마마와 김장명을 야반도주라도 시켜야 합니다. 선례도 있습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부모 역시 그런 방법으로 혼인을 했지요."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정세를 보면 오지수와 김장명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혼인을 하긴 어려웠다. 유일한 방법은 자기들끼리 혼인을 하고 나중에 왕건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아니지. 왕건이 굳이 용서를 안 해줘도 왕무가 나중에 왕이 되고 나서 오지수와 김장명을 사면해줘도 된다. 그러고 나서 김장명이 감사인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명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을 해서 왕무를 호위하면……'
내가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왕규와 임희는 기겁을 한 낯빛이었다.
"어이구, 어이구."
왕규가 말을 못 잇는 와중에 임희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연우 네가 이번에는 오판을 한 것 같구나.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 쪽에서 그리 일을 처리하면 충주원 쪽에서 명분을 잡고 총공세를 가할 것이다. 진짜 우리 쪽에서 몇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오지수 공주 마마의 혼인 문제를 다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천사옥대를 가져오면 연우 네가 어떤 죄를 저질러도 폐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약조가 있었다고 들었다. 설마 연우 네가 폐하의 약조를 믿고 그러는 것이냐? 나는 폐하와 오랜 친분이 있고 폐하를 잘 안다. 폐하께서 그런 약조를 하셨다고 해도 이런 큰일까지 수습해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임희가 간곡한 어조로 나를 말렸다.
"그런 일을 벌이면 정윤비 마마나 오지수 공주 마마는 몰라도 김장명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충주원의 무리들이 공주를 꾀어 달아난 김장명을 죽여야 한다고 여론을 몰고 갈 것입니다. 김장명이 잘못되면 명주와 전쟁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책임을 우리 정윤파가 모두 져야합니다. 정윤비 마마 이번 계책은 안 됩니다!"
왕규 역시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리 말했다.
"나 역시 그런 이치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무마할 방법이 있기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 정말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그럼 알려주십시오."
왕규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이 일은 기밀이 중요합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계책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내가 왕규와 임희를 안심시키려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이번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 꼭 추진해야겠느냐? 김긍률 쪽에 오지수 공주 마마를 보내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임희가 탄식하며 물었다.
"김긍률 쪽과의 혼사는 안전한 대신 아무 알맹이도 없습니다. 나에게 생각이 있으니 믿어주십시오. 게다가 오지수 공주 마마의 문제는 당장 처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은 광주원군의 혼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건 그렇고 유긍달의 수완이 확실히 좋긴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화제를 돌릴 겸 임희와 왕규에게 그리 물었다.
"그야 뭐 충주를 기반으로 두고 있고 원래 타고난 재주 덕이겠지? 그건 그렇고 오지수 공주 마마의 일은 더 논의해보자. 그런 식으로 거칠게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
임희가 나에게 그리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임희에게 그리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오지수와 김장명의 혼사를 강행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꼭 왕무를 위해서만은 아니야. 오지수와 김장명이 그리 애틋한 마음을 나누고 있는데, 뜬금없이 김긍률의 집안에 시집가게 되면 오지수가 어찌 되겠어? 게다가 나주에 갈 때 오지수에게 약속을 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