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73화 (173/216)

< 173 : 들어맞다 >

두근두근

나는 긴장하며 천사옥대를 받아든 왕요 태자가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왕요가 천사옥대를 허리에 두르려 할 때였다.

"태자 저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끼어들어서 외쳤다. 내가 놀라서 바라보니 다름 아닌 유긍달이었다.

"외조부 님?"

왕요가 약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유긍달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허리띠가 너무 길어서 태자 저하의 허리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폐하의 물건을 그리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유긍달이 약간은 절박해 보이는 어조로 왕요에게 말했다.

'음, 유긍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아쉽다.'

나는 유긍달의 말을 듣고 입맛을 다셨다. 자연스럽게 왕요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유긍달이 개입한 것이다.

"아니 그래도……"

왕요 태자는 미련을 못 버린 듯 천사옥대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유긍달의 낯빛을 보고 왕요는 천사옥대를 도로 왕건에게 바쳤다.

"폐하. 굳이 소자가 천사옥대를 찰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천덕전에 있는 여러 중신들과 왕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왕요 태자와 유긍달의 대화를 듣고 대다수는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몇몇 사람은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들은 유긍달이 저리 절박하게 나선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 이거 참. 아니 우리 고려가 어쩌다가 이리 살벌하게 변했는지. 내가 미처 눈치를 못 챘군."

왕요가 도로 바친 천사옥대를 받아들며 왕건이 말했다. 왕건도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왕건도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

천덕전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날선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 황주 출신의 균여 스님이 천사옥대를 찾아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내가 균여 스님의 아버지와도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황보제공은 꼭 균여가 황주 출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불쑥 끼어들어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장내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그런 황보제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와중에 왕건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아니 허리띠 하나 매는 거에도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며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되다니! 나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해요! 폐주 시절도 아니고. 그냥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한번씩 천사옥대를 차 봐. 누구는 차보고 누구는 안 차보면 말이 나오니까. 그래 연우야! 네가 천사옥대를 가져온 일등공신인데 한번 차봐야지. 이리 오렴."

왕건이 말을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왜 일이 이리 흘러가? 어쨌든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니 지금은 절대로 천사옥대를 차면 안 돼. 나중에 왕무가 왕이 되면 나는 언제든지 천사옥대를 맘대로 차볼 수 있다고.'

그런 계산을 마친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것은 별로……"

그때 왕건이 입을 열었다.

"무야! 어서 연우를 뒤에서 잡아라! 흐흐흐, 절대 못 빠져나간다."

"예, 예, 폐하."

왕무는 말까지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를 뒤에서 살며시 껴안았다.

"앗."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왕무가 왕건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지?'

게다가 뒤에서 나를 껴안은 왕무의 체향이 느껴져서 나는 이 순간에도 가슴이 뛰었다.

"좋아! 어쨌든 너희들이 먼저 차는 거다."

왕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채찍 휘두르듯 천사옥대를 우리의 허리 쪽으로 휘둘렀다.

'아니 지금 시대 기준으로도 귀한 문화재인 천사옥대를 저리?'

나는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사이 천사옥대가 나와 왕무의 허리를 휘감았다.

철컥

그러더니 그런 소리가 들렸다.

"내, 내가 어떻게 한 거지?"

왕건은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고 놀라서 중얼거렸다. 왕건이 힘을 어찌 줬는지 천사옥대가 우리의 허리를 휘감더니 걸쇠까지 채워졌다.

그런 천사옥대의 치수가 우리 두 사람의 허리에 딱 맞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천사옥대가 망가지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에 나는 몸을 더욱 왕무 쪽으로 밀착시켰다. 왕무에게서 흘러나오는 체향이 더 짙어졌다.

"앗! 역시 한 사람은 찰 수 없고 두 사람이 차는 물건이 아니었을까요?"

대내학사 김악이 한쪽에서 그리 외쳤다.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김부에게 쏠렸다.

"그, 그럴 리가? 고사에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김부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자 정윤과 정윤비도 차 봤으니 다른 사람들도 다 차보라고. 연우야. 천사옥대를 좀 풀렴."

왕건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천사옥대를 차기 싫었는데 한번 차고 나니 이상하게 벗기가 싫었다.

'이 허리띠 덕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의를 안 차리고 당당하게 왕무와 달라붙을 수 있었네.'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천사옥대의 걸쇠를 풀었다. 그리고내가 건넨 천사옥대를 받아든 왕건은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더니, 허리띠를 왕요 태자에게 넘겨주었다.

왕요 태자나 어린 왕족들은 웃으면서 천사옥대를 한 번씩 차봤다. 나이가 많은 왕족들은 머뭇거렸으나 왕건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천사옥대를 찼다.

"자, 앞으로는 천사옥대를 왕실창고에 넣어놓고 안 꺼낼 거다. 당신들도 오늘 한 번씩 다 차 봐."

왕건이 천사옥대를 중신들 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그럼 소신도 한번."

황보제공이 기쁜 기색으로 다가가서 천사옥대를 차봤다. 당연히 황보제공의 허리에도 안 맞았다. 황보제공은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띠를 유긍달에게 건네줬다. 왕건의 명이 있으니 유긍달도 이를 거부할 순 없었다.

유긍달은 왠지 착잡한 표정으로 천사옥대를 찼다. 중신들 사이를 돈 천사옥대가 다시 왕건의 손에 들어왔다.

'이젠 제발 천사옥대를 넣어둬!'

나는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다. 이제는 귀한 문화재인 천사옥대가 파손될까봐 무서웠다. 수백명이 천사옥대를 한번씩 만지작거린 것이다.

"시간이 너무 지났군. 자 이제 천사옥대는 왕실 창고에 넣어두도록 하지. 저녁이나 먹자."

다행히도 왕건은 나무상자에 천사옥대를 넣으며 그런 명을 내렸다. 이미 천사옥대가 개경에 온 기념으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 자리에서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며 축하를 할 예정이었다. 장내의 사람들은 왕건의 명을 따라 삼삼오오 연회장으로 향했다.

나 역시 왕무의 손을 꽉 잡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에서 나는 왕건과 여러 중신들의 대화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이런 자리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중요한대. 하, 왕건 때문에. 나중에 아버님께 가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물어봐야겠다.'

왕건 때문에 왕무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껴안았다. 그 순간의 느낌이 계속 떠올라서 나는 연회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왕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연회 자리에서도 이상하게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나와 왕무 두 사람은 겉으로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상석에 앉아있었다. 그러면서 상 밑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온갖 장난을 다쳤다.

'손만으로도 진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구나.'

서로의 손톱을 매만지기도 했고 깍지를 끼기도 하고 그랬다가 손바닥을 활짝 펴서 문지르기도 하고. 어쨌든 나와 왕무는 서로의 손을 가지고 놀며 시간을 보냈다.

손에 기분 좋은 저릿저릿함이 느껴졌다. 다만 나는 손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멍하니 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늦었군. 나는 들어가 보겠다."

드디어 왕건이 연회장 밖을 한번 바라보더니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와 왕무를 비롯한 중신들은 몸을 일으켜 그런 왕건을 배웅했다.

그리고 왕족들과 중신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왕무가 굉장히 다급한 어조로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왕무의 손을 잡고 연회장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나주원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나주원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거기 들어가고 나서.'

나는 거의 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후다닥 나주원의 처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처소문을 닫자마자 재빨리 입을 맞췄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 이제야 좀 정신이 들어오네.'

왕무에게 매달리면서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진짜 서로 껴안고 천사옥대를 맸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 앞이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손만 잡고 몇 시간을 버텼으니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가 서로 마음 놓고 안을 수 있게 되자 그 후련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왕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연우야."

왕무는 나를 힘껏 껴안으며 침상 쪽으로 향했다. 나 역시 왕무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고.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무리했네. 평소에는 왕무가 나를 봐준 거였나?'

나는 침상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경주까지 갔다 오느라 여독에 쌓였는데 어제 왕무와 긴 시간을 보냈다.

"연우야. 괜찮아?"

옷을 다 갖춰 입은 왕무가 걱정스레 나에게 물었다. 왕무는 또 군영에 나가봐야 했다. 왕건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중앙군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왕무는 그 일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어서 가봐. 나도 한림원에 갈 거야."

나는 왕무에게 그리 말했다. 어제 일을 겪으며 나는 한림원에서 왕건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참 눈치가 빨라서 나나 중신들의 생각도 거의 다 읽고 있고 기상천외한 해법도 내놓고 하는 사람이니. 한림원에서 매일매일 왕건을 살펴야 해. 내가 미래 역사를 안다고 해서 방심할 수 없어. 거기에 한림원 일이 끝나면 상산저에 들러서 어제 연회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들어야지. 이런 건 미루면 안 돼.'

내 말을 듣고도 왕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군영으로 향했다. 나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옷을 차려입고 한림원으로 향했다.

한림원에서 나를 본 왕건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연우야. 무슨 일 있니? 왜 이리 피곤해 보여?"

"경주까지 가느라 여독이 쌓였고 황룡사의 고승들과 대결하느라 몇 달간 긴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약간 피로가 느껴집니다."

나는 그렇게 둘러댔다.

"어제는 괜찮아보였는데?"

"사실 어제도 좀 힘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폐하, 폐하께서 저에게 하신 약조는……"

나는 왕건이 나에게 해준 약조를 거론했다. 이 약조에 대해 왕건의 확답을 받는 것도 중요했다.

"무슨 약조를 했지?"

왕건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반문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제가 무슨 죄를 지어도 한번은 용서해주시겠다는 약조를 하셨었습니다."

"허허허. 내가 그랬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원래 내가 연우 너를 신임하고 있다. 그래서 네가 무슨 실수를 해도 내가 다 봐주지 안 봐주겠니? 뭘 굳이 그런 약조를?"

왕건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분명 그런 약조를 하셨습니다."

"알았다. 천사옥대를 구해왔으니 뭐 그 정도 상은 줘야지. 이거 묘하게 불안한대? 그렇다고 일부러 큰 사고를 한번 치는 것은 아니겠지?"

왕건의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래 그건 그렇고, 오늘은 연우 네가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구나? 휴가를 줄 테니 쉬어도 좋다."

왕건이 뜻밖에도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면 지금 나와서 상산저에 들렀다가 나주원에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다.'

그런 계산을 하며 나는 왕건에게 인사를 하고 한림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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