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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72화 (172/216)

< 172 : 치수 >

"이, 이럴 수가?"

황룡사의 주지 능훈은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그 앞에서는 균여가 민망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상 밖으로 황룡사가 선전했어. 한번은 이겼군.'

감독으로서 고려 대표들을 이끌게 된 나는 누구를 먼저 내보낼지 고민했다. 여러모로 망설이다가 나는 비쇠 노인을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나는 개경 전체에서 개최된 장기대회에서 우선 20명의 실력자들을 선발했다. 비쇠 노인도 그중 하나였다.

'비쇠 노인은 실력만으로 치면 상위 5명 안에 못 들었어. 하지만 나이가 많은 만큼 긴장을 덜했다. 어전 시합에서도 비쇠 노인은 침착했어. 그래서 고려 대표 5명 중 한 사람이 된 거고.'

나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해서 비쇠 노인을 선봉으로 삼았다. 이 엄청난 장기 대결의 첫 경기인만큼 침착한 사람을 먼저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노인장. 부탁드립니다."

내 말을 듣고 비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그리고 침착하게 실력대로 둬서 황룡사의 첫 번째 대표를 이겼다.

그러나 두번째 대결에서 비쇠 노인은 그만 황룡사 쪽 대표에게 패했다.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아니 현대로 치면 그래도 준프로리그와 동네 pc방 리그 사이의 격차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벌써 한번 지다니.'

나는 승부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

"가랏! 균여!"

나는 비장의 패를 꺼내 들기로 했다. 원래 역사 속에서도 그 총명함을 자랑했던 균여였다. 나이도 어리고 해서 장기도 매우 잘 뒀다.

"예!"

그리고 내 명을 받들고 출전한 균여가 내리 4명을 모두 이기며 승부는 그냥 끝나버렸다.

'역사적인 대결인데 너무 썰렁하긴 하군.'

균여와 황룡사 고승들의 대결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균여는 인정사정없이 빠른 속도로 기물들을 움직였다. 황룡사의 고승들은 그런 균여 앞에서 쩔쩔매다가 순식간에 참패했다.

그런 식으로 잠깐 사이에 황룡사의 4명이 패하고 승부는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

"아니, 이게……"

황룡사의 주지 능훈은 승부가 너무 빨리 나서 허탈한 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곁에 있던 윤신달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참으로 잘 됐습니다. 그래도 황룡사가 1번은 이겼으니 체면은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고려가 압승했으니 신라인들의 기도 죽었을 것입니다."

나는 윤신달의 해석을 듣고 좀 놀랐다.

'한판 져서 발끈해서 균여를 내보낸 건데. 윤신달이 그리 포장해주네. 하긴 내 무의식이 작용해서 절묘한 용병술을 보여준 걸 수도……'

나는 황룡사의 주지 능훈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나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개경에서부터 가지고 온 물건들을 고려 사람들이 황룡사 구층탑 주위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윤신달과 함께 능훈 앞에 간 내가 말했다.

"자 내기에서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제 천사옥대를 좀 보고 싶습니다."

고려 사람들이 무슨 점령군마냥 황룡사 구층탑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나는 그리 말했다. 황룡사의 중들이 스스로 천사옥대를 가지고 나와서 바치는 게 가장 좋았다.

"……"

능훈은 내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가 황룡사의 몇몇 중들이 능훈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능훈은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

"정, 정윤비 마마 이 대결은 불공평합니다. 개경에서 이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장기 대회를 크게 열어 사람을 뽑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 황룡사는 봉쇄된 상태에서 황룡사 안에서 사람을 선발했습니다. 이러면 우리 쪽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가 능훈에게 이 사실을 일러준 모양이었다. 능훈도 나름 억울한 것 같았다.

'그러나 능훈의 이런 반론도 내 계산 하에 있지롱.'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능훈 대사. 지금 이 장기 대결이 왜 삼한 땅의 천명이 우리 고려에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폐하 밑에서 중신과 장수로 활약했던 사람 중에는 백제와 신라의 전(前) 국왕도 있고, 경비를 서던 위사 출신도 있으며 가진 것 하나 없이 떠돌던 유랑민도 있습니다. 우리 폐하께서 오직 능력만 보시고 삼한 땅에서 고루 인재를 선발하셨습니다. 이에 반해 신라는 오로지 진골, 그나마 약간 아량을 베풀면 6두품에서만 사람을 뽑았습니다. 이 황룡사의 지위가 높은 고승들도 모두 진골이 아닙니까? 이 대결도 설사 황룡사가 아니라 경주 전체에서 사람을 뽑았다고 한들 골품을 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라에 설사 1만, 2만의 군사가 있었다고 한들 장수들을 진골 중에서만 뽑았다면 견훤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라가 허물어진 것도 결국 천명입니다."

나는 그 점을 지적했다. 이미 황룡사에서 고승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장로들이 박씨, 석씨 진골인 티를 확확 냈다.

"하아."

내 말을 듣고 능훈은 할 말이 없는지 한숨을 쉬었다. 황룡사의 다른 승려들도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다. 나도 거짓말을 하느라 민망했어.'

나는 마치 왕건을 평등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인재를 고루 선발한 성군처럼 묘사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왕건이야 그냥 어떻게든 통일을 하려고 흘러가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그 밑에 온갖 사람들이 모인 거지. 특히 궁예의 세력을 대부분 물려받았는데 궁예가 도적 출신이라서 그 밑에 별별 인간들이 다 있었거든. 평등주의적 면모는 진짜 조금도 없어.'

나는 왕건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너무 왕건을 미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사이 내 곁에서 윤신달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자 그럼 천사옥대를!"

그러자 황룡사의 주지 능훈이 힘없이 말했다.

"사람을 보내 천사옥대를 꺼내 오라고 해라."

능훈의 말을 듣고 나는 황룡사 구층탑 주변에 있는 고려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고려인들은 준비해 온 기구를 띄우기 시작했다.

나는 천사옥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주에 내려오면서 잠깐 기구에 대해 떠올렸다.

'초보적인 형태의 기구는 지금 기술로도 만들 수 있다. 물론 거기에 사람이 탈 수는 없어. 지금의 조악한 기술로 만든 기구에 탔다가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거기에 누가 타?'

그러나 기구를 단순히 띄우는 정도는 가능했다. 개경에서 장기 대회를 준비하는 틈틈이 나는 조악하긴 해도 기구를 만들었다.

흰 비단과 가죽을 덧대 만든 기구가 황룡사 구층탑 주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 사람들은 내가 지시한 대로 입을 모아 외쳤다.

"구름이다. 구름이 솟아오른다!"

수많은 고려 사람들이 외치자 그 소리가 황룡사 밖까지 울려 퍼졌다. 사실 황룡사 안에서 기구를 보면 전혀 구름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황룡사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면 어떨까? 물론 멀리서 봐도 구름같아 보이진 않지만 밖에 있어서 상황파악을 못하는데 뭔가 이상한 게 탑 주위를 오락가락한다면?'

황룡사 밖에서 기다리는 경주 백성들은 뭔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윤신달이 경주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유리해지는 것이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제가 이번에 정윤비 마마께 아주 큰 신세를 졌습니다."

경주에 부임한 뒤 여러 가지 일이 터져서 고생하던 윤신달은 흡족한 표정으로 솟아오르는 기구를 바라보았다.

'천사옥대가 진정한 주인인 왕건에게 가니 구름이 일었다는 식으로 적절한 소문을 퍼뜨리겠지? 아니면 윤신달이 창의성을 발휘해 다른 이야기를 퍼뜨릴 수도 있고.'

그 사이 탑안에서 좌선하고 있던 노승들이 비단보자기 하나를 들고 탑에서 내려왔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씁쓸한 표정이었다.

탑 주위를 오락가락하는 기구를 보고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는 노승도 보였다.

"이것이!"

나는 보자기를 받아 풀어보았다. 그 안에서 과연 휘황찬란한 긴 허리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현대로 가져가 팔았으면 떼돈을 벌었을 텐데. 한번 차볼까? 아니야. 위험할 수도 있어.'

나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며 천사옥대를 보자기로 싸매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황룡사가 보여준 용기에 감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일이 어찌 흘러갈지 근심하는 황룡사의 중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내 눈에 울상을 짓고 있는 백여은과 고려 대표들이 보였다.

지난 몇 달간 온갖 고생을 다하고 긴장했는데 막상 장기를 둔 것은 비쇠 노인과 균여 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허망한 듯했다.

"친목을 다질 겸 며칠 동안 황룡사에 머물며 장기를 두려고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나도 감독으로서 일종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머지 대표들에게 장기를 둘 기회를 주기 위해 그런 제안을 했다.

며칠 동안 황룡사에 머물러 있다가 나는 고려 대표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 윤신달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정윤비 마마와 함께 온 장기 명인들을 제 식객으로 받고 싶습니다. 개경에서 폐하를 알현하고 나서 경주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와줬으면 합니다."

내 곁에서 이 말을 들은 고려 대표들은 놀란 기색이었다. 다만 고려 정윤비와 경주 도독 사이의 대화에 낄 엄두는 못내고 그저 고개만 숙였다.

"연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묻자 윤신달이 대답했다.

"며칠 지켜보니 이번 일을 계기로 경주 사람들도 장기를 즐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명인들을 도독부에 두고 경주의 유력자들을 초청해 장기를 배우고 두면 좋지 않겠습니까?"

윤신달은 경주 민심을 달래는데 장기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작정인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나는 고려 대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개경에 가서 가족들과 의논을 해야 해서. 그래도 올 수 있으면 꼭 오겠습니다."

비쇠 노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표로 나서서 대답했다.

"될 수 있으면 꼭 와주시오. 내가 후히 대접하겠소."

윤신달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나도 윤신달의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뽑은 장기 명인들이 나름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한 것이다.

'개경에 가서도 인연이 닿는 유력자들에게 내가 뽑은 장기 고수들을 식객으로 받아달라고 부탁을 좀 해야겠어.'

윤신달의 말을 듣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윤신달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일행은 경주를 떠났다.

천덕전에는 왕건을 필두로 고려 왕족, 중신, 호족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이게 그 천사옥대인가?"

내가 바친 천사옥대를 받아든 왕건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왕건은 삼한통일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천사옥대 타령을 했는데 드디어 얻은 것이다.

왕건은 천사옥대를 받자마자 그것을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울상을 지었다.

"아니 왜 이렇게 커?"

확실히 천사옥대가 너무 길어서 왕건의 허리에 안 맞았다.

"고사를 보면 처음 천사옥대를 받은 진평왕은 체격이 대단했다고 나와있습니다."

한림원령 최언위가 곁에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큰데. 신라 왕실에서는 어찌 착용했지?"

왕건은 한쪽에 서 있는 정승 김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김부는 상당히 씁쓸한 기색으로 답했다.

"소신은 천사옥대가 중간에 황룡사에 넘어간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착용에 대해서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집안의 보물을 바치게 돼서 그런지 김부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왕건은 그런 김부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걸 어떻게든 차야 하는데. 어깨에 걸쳐야 하나?"

왕건은 천사옥대를 들고 별별 자세를 다 취했다.

"폐하, 소자도 한번 천사옥대를 차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충주원의 왕요 태자가 말했다. 왕요 태자도 어느덧 많이 장성했다. 아직은 소년티가 나지만 체구가 제법 컸다.

"오 그래 한번 차봐라."

왕건은 흔쾌히 허리띠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 예상대로군. 천사옥대는 보면 신기해서라도 한번 차보고 싶어진다. 흐흐흐. 그러나 천사옥대는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 그것을 함부로 차는 것은 참람된 짓! 왕요 태자, 당신이 천사옥대를 차면 바로 공격을 해주마. 왕요 태자가 참람된 짓을 했다고 옆에서 계속 왕건을 들쑤셔야지.'

내가 황룡사에서 한번 천사옥대를 차보려다가 안 찬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천사옥대를 받아든 왕요 태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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