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 결판 >
"정, 정말 이 사람들을 데리고 황룡사에 가서 대결을 벌일 참이냐?"
왕건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폐하, 어전 앞에서 이 사람들이 장기 대결을 벌여 이기는 모습을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딴소리를 하는 왕건을 달랬다.
"그래도……"
왕건은 말끝을 흐리며 내 뒤에 도열한 5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얼핏 보기에는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이는 조합이긴 했다.
여윈 체격의 중년인 1명, 내 또래의 여성 1명, 허리가 굽은 노인 1명, 다리를 저는 청년 1명 그리고 민머리의 사미승 1명이 서 있었다.
"지난 4달 가까이 개경 및 그 인근의 사람들 중에서 가려뽑은 명인들입니다. 수도 없이 장기대회를 열어 거르고 거른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해 어전 앞에서 시합까지 열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도 왕건은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황룡사의 중들이 똑똑할텐데……승려들 중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도 있다."
"지금 개경 인구가 족히 10만 명은 될 것이고 그 인근 고을까지 합치면 20만 가까이는 됩니다. 그 사람들 중에 장기를 가장 잘 두는 사람을 뽑았으니 우리 측이 무조건 이깁니다. 황룡사가 큰 절이라고 해도, 그 안의 사람 숫자가 500명이 안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 사람을 뽑아봤자 소용없습니다."
나는 왕건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내가 황룡사와의 대결에서 무조건 이긴다고 확신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황룡사보다 압도적으로 큰 모집단에서 명인들을 뽑았다.
황룡사 측에서도 서라벌 전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대표를 뽑았다면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걱정해서 나는 황룡사 내에서만 대표를 뽑으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엄청 불공정한 조건을 내건 셈인데 황룡사 측은 오히려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신라 골품제의 영향이 남아있어서 그러겠지. 이런 대결에서 평민들까지 포함해서 사람들을 뽑는다는 것이 이 시대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 갈 거야. 황룡사는 자신들이 서라벌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식인 집단이라고 자부하니 해볼 만한 대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왕건이 불안해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지난 4달간 내 주관 하에 열린 장기 대회에 고려의 공신이나 대호족 자제들도 도전했으나 거의 다 탈락했다. 결국 뽑힌 5명 중 4명이 평민이었다.
'이 장기 대회에 왕건과 내가 상당한 상금을 내걸었고 대표로 뽑히면 엄청난 명성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평민 출신들이 더 큰 열의를 갖고 도전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야. 그리고 한 사람은 진짜 역사에도 이름을 남긴 대단한 사람이고.'
현대에도 적절한 상금과 보상을 걸고 공정하게 다수의 사람들을 경쟁시키면 뛰어난 인재를 뽑을 수 있었다. 나는 이 현대적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해서 5명을 뽑았다. 그래서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뭐. 여기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을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조만간 황룡사로 출발할 시간이고. 연우 너에게 내가 모든 일을 맡겨버렸으니 도리가 없다. 저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해라."
왕건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명을 내렸다. 나는 왕건 앞에서 물러서며 뒤에 부복하고 있는 다섯 명의 고려 대표들에게 손짓을 했다.
나야 왕건을 자주 봐서 익숙하지만 5명은 왕건 앞이라 매우 긴장한 것 같았다. 그들이 떨면서 다가오자 왕건이 입을 열었다.
"황룡사에 가서 승패에 연연하지 말라. 조심히 다녀오라."
체면을 중시하는 왕건답게 고려 대표들 앞에서는 왕건 본인이 승패에 연연하고 있다는 티를 안내고 그리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5명의 고려 대표들은 입을 모아 그리 대답했다.
"그래."
왕건이 무슨 자애로운 군주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줬다. 왕건에 대해 잘 모르는 5명의 고려 대표들은 감격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왕건에게 말했다. 황룡사와 약속한 기일을 맞추기 위해서는 오늘 출발해야 했다. 내가 일종의 감독으로서 고려 대표들을 인솔하기로 되어있었다.
내가 고려 대표들을 이끌고 궁 밖으로 나서자 왕무를 비롯해 여러 고려 중신들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나왔다.
왕무와 유금필이 우선 나에게 다가왔다.
"국선. 빨리 돌아오십시오."
왕무는 애틋하게 나에게 말했다.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지난 4달 동안에도 장기대회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뽑고 하느라 바빴다. 왕무와 보낸 달콤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언제 느긋하게 같이 지낼 수 있을지.'
내가 왕무의 손을 잡고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는데 유금필이 곁에서 끼어들었다.
"정윤비 마마께서 그동안 여러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임기응변의 꾀를 많이 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번에 낸 꾀가 가장 뛰어납니다. 압도적인 숫자를 바탕으로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단순하지만 가장 제 마음에 듭니다."
병법에 능한 유금필은 나를 칭찬해주며 그런 평가를 했다.
나는 유금필의 그런 칭찬에 예를 갖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왕무의 손을 놓고, 유금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유금필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이 허전했다.
'감질나 죽겠다. 왕무를 실컷 느끼고 싶어.'
전송을 나온 중신들 중에 유긍달과 김부의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홀가분해 보였다.
'내가 장기대회까지 열면서 이 일에 깊이 관여했다. 만약 이 일이 실패해도 나와 책임을 나눠진다는 생각에 기뻐서 표정이 좋은 거겠지!'
나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 곁에는 황보제공이 서 있었다.
황보제공은 고려 대표로 출전하게 된 사미승을 붙들고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님께서 황주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참 우리 고을 사람이 이 중요한 일에 나서게 되다니……"
사미승은 고명한 고승의 제자였기에 황보제공이 나름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대상께서 소승을 위해 이리 나와주시니 감격할 따름입니다."
사미승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스님의 부친이신 변 학사도 내가 예전에 만난 일이 있습니다. 아, 근데 스님의 법명이 어찌 되시는지? 분명 들었는데 생각이 안 납니다. 허허허"
황보제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민망하지도 않나? 이름 까먹었다는 이야기를 저리 쉽게. 하긴 황보제공은 만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이름을 기억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저 사미승의 법명을 기억하고 있다. 워낙 대단한 인물이니.'
나는 힐끔 그쪽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소승 균여라고 합니다."
사미승이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맞습니다. 균여 스님.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황보제공은 수염까지 쓰다듬으며 다짐했다.
황룡사와의 대결을 위해 떠나는 고려 대표들은 두 대의 수레에 나눠 타고 경주로 향했다. 내 또래의 여인인 백여은과 사미승 균여는 말동무를 할 겸 나와 같은 수레에 탔다.
나머지 3명은 다른 수레에 탔다. 우리 일행을 수백명의 기병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이 많은 분들이 저를 호위하기 위해……"
백여은은 감개무량한 기색이었다. 나야 기병들의 호위를 받는 것에 익숙했지만 평민이었던 백여은 입장에서는 처음 하는 경험인 것이다.
"자 그래서……"
나는 잡담을 나누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백여은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반드시 대결에서 이기겠습니다."
그러더니 백여은은 자기 품속에서 기보를 꺼내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개경 전역에서 열린 장기대회에서 뽑힌 상위 20명을 서로 대결시켜 기보를 한권 만들었다. 이 기보를 보면 기술을 가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백여은은 긴장해서 그런지 가는 내내 이 기보를 볼 기세였다. 곁에 있던 균여 역시 백여은을 따라서 기보를 꺼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균여와 이 기회에 친해지려고 했는데.'
균여는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승려였다. 북악파와 남악파로 나뉘어 대결하던 화엄종을 통합시킨 사람이 균여였다.
'머리가 엄청 좋아서 남악파 승려들을 만나서 말로 하나하나 다 설득했다더니. 과연 두뇌회전이 빨라서 그런지 장기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지금 균여의 나이가 15~16세 정도니 순발력 같은 건 엄청 빠르겠지.'
왕건이 화엄종의 통합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고, 내가 부석사에서 화엄종의 통합에 대해 예언까지 했다. 나도 슬슬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균여가 등장한 것이다.
'화엄종을 통합시키는 균여와 친해져야 내가 나중에 숟가락을 멋지게 얹을 수 있어. 그런데 모두 독서삼매경에 빠져있으니.'
그런데 큰 대결을 앞두고 긴장해서 기보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붙잡고 수다를 떨자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품속에서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최치원이 쓴 백거이의 시에 대한 책이었다.
지난 4달간 틈틈이 이 책을 읽었다. 이미 완독을 했지만 나는 다른 책을 꺼내지 않고 이 책을 반복해서 읽었다.
'최치원이 왜 이런 책을 썼고 나에게 남겼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정 내내 고려 대표들은 기보를 읽거나 서로 간단하게 장기 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경주 인근에 당도했는데 나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수많은 경주 백성들이 황룡사 인근에 몰려들어 인산인해였다. 그 사람들을 헤치고 우리들을 마중 나온 윤신달이 외쳤다.
"정윤비 마마께서 황룡사와 대결을 벌인다는 소문이 이미 경주 전역에 퍼졌습니다. 이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 것입니다."
윤신달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건뿐만 아니라 윤신달도 지난 몇 달간 조마조마했겠군.'
만약 이 대결에서 황룡사가 이기게 된다면 옛 신라인들은 기세가 크게 오를 것이다. 경주 도독으로서 윤신달이 경주를 통제하기 더 어려워질게 뻔했다. 윤신달도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니 오히려 잘 됐습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이기면 경주의 백성들도 모두 승복할 것입니다. 하하하."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나와 윤신달은 고려 대표들을 인솔하고 당당히 황룡사에 들어갔다.
황룡사 측에서도 이미 대결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구층탑 앞에 차양을 쳐놓고 그 아래 장기판을 놓아두었다.
장기판만 봐도 장인이 정성을 들여 만든 물건인 것 같았다.
황룡사의 주지인 능훈이 여러 승려들을 거느리고 우리 앞에 와서 말했다.
"절 밖의 사부대중들도 오늘의 대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룡사 담에 장기판을 그린 큰 천을 걸어두고, 종이로 만든 장기 기물을 바늘에 꿰어 찔렀다 뺐다하며 움직이면 안에서 벌어지는 대결을 절 밖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황룡사 측도 오늘의 대결에 몹시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실시간 생중계를 하자고 하는 것이다.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능훈이 기쁜 표정으로 손짓을 하자 장기를 둘 황룡사의 다섯 고승들이 나섰다. 그들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승리를 확신했다.
'황룡사 대표들은 5명 전부가 중년 이상의 나이가 많은 사람이군. 우리가 이겼다!'
예외는 있지만 통상적으로 이런 시합은 순발력이 좋은 젊은 사람들이 유리했다. 물론 고려 측에도 노인이 있고 중년인도 있었지만 젊은 사람이 3명이나 됐다. 그런데 황룡사 측은 전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고려 측 대표 5명을 보고 능훈 역시 더욱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보였다.
'능훈은 아마 자신들이 압승할거라고 믿는 모양인데?'
나는 그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