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 담판 >
"……어쨌든 김부 그 자식이 집안 어른들에게 말도 안 하고 독단적으로 나라를 바쳤는데, 그거야 뭐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쳐도 천사옥대만은 절대 내줄 수 없습니다."
황룡사의 주지인 능훈이 결연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말을 늘어놓았다. 그 곁에서 황룡사의 장로 노승들이 맞장구를 쳤다.
"주지스님의 말이 옳습니다. 신라를 세운 건 박씨인데, 김부는 박씨들과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그 큰일을 정했습니다. 참 고약한 녀석입니다. 상의를 제대로 했으면 이런 참사는 안 났을 텐데. 천사옥대는 이제 황룡사의 보물입니다. 세상 천지에 절의 보물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법은 없습니다."
약간 포동포동한 체격의 노승이 그리 말했다.
'저 노승의 성이 박씨라는 것은 확실하군.'
그리고 키가 크고 마른 노승도 입을 열었다.
"석씨도 신라를 함께 세웠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지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김부는 참으로 불효, 불충한 작자입니다. 천사옥대는 무조건 서라벌에 있어야 합니다."
'음 저 스님은 석씨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황룡사에 들어와 담판을 청하자 황룡사의 주지를 필두로 장로들이 우르르 나와 말을 하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대강 그 논지를 요약해보면 김부는 나쁜 인간이고 천사옥대는 못 내놓겠다는 말이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이걸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이거 참 김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러고 보면 왕건이 김부와 그 일족만 챙겨주고 신라 왕족인 박, 석, 김씨를 다 챙겨준 게 아니니까. 다 챙겨주면 돈이 너무 많이 들거든. 다른 왕족들은 고려에 항복한 것에 불만이 많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곁에서 윤신달이 나서서 외쳤다.
"천사옥대는 사서에도 나와 있듯이 신라 왕실의 보물입니다. 정승 김부 공께서 왕실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할 때 천사옥대도 당연히 우리 폐하의 것이 된 것입니다."
"아니 왕실의 보물이라면 왜 천사옥대가 지금 황룡사에 있습니까?"
황룡사의 주지 능훈이 예리하게 반문했다.
"그야 뭐……"
윤신달이 말끝을 흐렸다.
"지난 수십 년간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염려해서 어느 순간 천사옥대가 왕실에서 황룡사로 넘어온 것입니다. 황룡사에서 천사옥대를 지키지 않았다면 견훤이 서라벌에 들어왔을 때, 천사옥대가 견훤 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랬다면 삼한 땅의 일이 어찌 돌아갔을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황룡사에서 오랫동안 천사옥대를 지켜왔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천사옥대는 황룡사의 것이라 봐야합니다."
황룡사의 주지인 능훈이 열변을 펼쳤다.
"암요. 신라삼보가 우리 황룡사의 구층탑, 우리 황룡사의 장륙존상, 우리 황룡사의 천사옥대입니다. 천사옥대만 황룡사의 것이 아닐 리가 있습니까?"
박씨 장로가 주지의 말을 거들었다.
"신라삼보가 같이 있어야지 하나만 덜렁 가져가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석씨 장로도 한마디 했다.
황룡사의 삼인방이 똑같은 소리를 계속 늘어놓으니 윤신달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 같았다. 윤신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이건 한시라도 빨리 군사들을 투입해야 합니다."
윤신달이 혀를 내두르며 나에게 말했다.
"아니 견훤이 서라벌에 들어왔을 때 저 승려들은 뭘 했습니까? 견훤이 들어왔을 때 저랬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나는 그게 궁금해서 윤신달에게 물었다.
"전후 사정을 알아보니 산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가 서라벌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황룡사로 돌아온 승려들이라고 합니다."
"흐음."
나는 입맛을 다셨다. 저 사람들도 나름 신라가 망할 위기라서 어떻게든 나라를 돕겠다고 돌아온 것이다. 그런만큼 김부가 덜컥 항복한 것에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압박을 가한다고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잠깐 대화를 나눠봤는데도 그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황룡사의 승려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지내실 것입니까? 황룡사를 고려 군사들이 둘러싼 지 여러 시일이 지났습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끝내야 할 것 아닙니까?"
내 말을 듣고 주지와 장로들을 제외한 황룡사의 승려들은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지금 상황은 왕건이 워낙 체면을 중시해서 군사를 투입하지 않고 황룡사를 봐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황룡사가 이리 버티다가 왕건이 군사를 투입하게 되면, 그 순간 황룡사 출신 승려들은 왕건에게 찍히는 셈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생활이 피곤해질 게 뻔했다.
"이미 대세가 고려로 넘어갔습니다. 천사옥대란 허리띠 하나를 신라에 남겨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정윤비 마마께서 개경에 올라가 폐하를 설득해주십시오. 이 허리띠 하나는 황룡사가 보관할 수 있게 말입니다."
황룡사의 주지 능훈도 약간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에게 호소했다.
'왕건을 직접 안 봤으니 저런 말이 나오는 거지. 왕건은 절대 천사옥대를 양보하지 않는다.'
대화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신라사람들은 나라가 망하는 치욕을 생전에 겪게 됐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람들의 용기나 지혜가 부족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라에 제대로 된 군사가 있었다면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신라 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지혜를 발휘해도 나라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이리 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나라는 망했지만, 우리 황룡사는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천사옥대를 지킬 것입니다."
박씨 장로가 침통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어느 정도는 황룡사의 중들과 신라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신라는 마지막 왕인 김부와 이때 신라 사람들이 무능해서 망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 자체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돼서, 이미 50~60년 전부터는 신라 사람들이 무슨 수를 써도 신라는 망할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지금 신라인들 입장에서는 평생동안 어떻게든 나라의 명맥을 이으려고 애썼는데 멸망을 못 막았으니 허탈하겠지. 자기들은 나름 애를 썼는데 이리 되니 승복을 못할 수밖에. 백제야 마지막 순간까지 군사를 일으켜 고려와 싸워보기라도 했지 신라는 이도 저도 아니니. 차라리 한번 싸워보기라도 했으면 승복을 했을 텐데.'
그래서 차마 대놓고 고려에 맞서지는 못해도 천사옥대를 쥐고 버티며 자존심이라도 세우려 하는 것이다.
'이건 고려 조정과 황룡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경주의 민심도 지금 황룡사를 지지하고 있어. 황룡사를 굴복시켜야 비로소 신라인들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어.'
나는 왕건이 군사투입을 망설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 사이 박씨 장로의 말을 들은 윤신달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군사를 거론한 박씨 장로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아슬아슬한 수위의 발언이었다.
"내가 굳이 스님의 말을 밖에 전하진 않겠습니다. 허나 그런 위험한 말은 앞으로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스님의 말씀은 어불성설입니다. 제대로 된 군사를 모으는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제대로 된 군사를 못 모은 것 자체가 신라가 천명을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폐하께서 천명을 받아 일리천에 삼한의 무리 10만을 모으신 것을 못 보셨습니까!"
윤신달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장로가 나이가 많아 실언을 했습니다."
윤신달이 그리 나오자 황룡사의 주지 능훈이 굽신 거리면서 말했다. 다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일이 더 꼬였다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저래도 황룡사의 중들이 마음속으로는 절대 승복하지 못할 것이다. 윤신달의 말이 정론이긴 하지만, 이미 억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론을 말해봤자 의미가 없어. 한을 풀어줘야 하는데 윤신달의 말을 들으면 신라 사람들은 더 한이 맺힐 걸.'
그런 내 뇌리에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박씨 장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로님은 신라가 어느 정도 군사만 있었으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믿는 것입니까?"
"그야 뭐. 내가 실언을 했습니다."
박씨 장로는 대답을 분명하게 못하고 얼버무렸다. 자기가 위험한 발언을 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황룡사에 군사를 빌려드릴 테니 우리가 한번 싸워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같은 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결을 벌였는데 황룡사가 지면, 그때는 여러분들도 승복해야합니다. 천사옥대를 고려 조정에 바치십시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황룡사의 중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서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니 그래서 황룡사와 대결을 해서 우리가 이기면 천사옥대를 우리가 갖고, 우리가 지면 천사옥대를 황룡사에 넘기겠다고 약조를 하고 왔다고?"
왕건은 한림원에서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예, 폐하. 4달 뒤에 대결을 펼치기로 약속했습니다. 물론 진짜 군사들을 동원할 수 없으니 이 기물들을 군사로 삼아 싸우기로 했습니다. 장기 아니 지금은 상희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내가 만들어 온 장기판과 기물들을 왕건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는 박씨 장로의 말에서 실마리를 얻어 장기 대결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대는 아직 삼한 땅에 장기가 유행하지 않았다. 황룡사의 노승들도 장기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 원리에 대해 황룡사의 노승들에게 설명하고 대결을 제안한 것이다.
"이, 이게 바둑 비슷한 건가?"
"예 맞습니다. 이 기물은 이리 움직이면 되고, 저건 기병의 역할을 하고……"
나는 흐뭇하게 왕건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연, 연우야 대체 왜 그랬니? 왜 여지를 줘? 바둑 비슷한 거면 황룡사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거 아니냐? 그럼 천사옥대를 내가 못 갖잖아! 그냥 군사를 투입하면 내가 천사옥대를 무조건 갖는 거였는데. 황룡사의 땡중들이야 무조건 천사옥대를 뺏길 상황에서 빠져나갈 출구가 생기니 냉큼 받아들인 거고."
왕건이 나를 탓했다.
불안해하는 왕건의 모습을 보니 나는 통쾌했다.
'황룡사에 장기 대결을 제안하길 잘했군. 몇 달 동안 왕건이 심적 고통을 겪겠군.'
다만 장기 대결을 펼쳤다가 진짜 지면 내가 곤란해졌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 대결은 무조건 우리 고려가 이깁니다. 이런 식으로 대결을 펼쳐야 신라 사람들이 그나마 한풀이를 하고 승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연우 네가 이 상희의 명인이구나? 너는 별별 재주가 다 있잖니! 그래서 그랬구나!"
왕건이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외쳤다.
"그건 아닙니다. 황룡사 측에서 그 점을 지적해서, 저는 이 대결에 안 나서기로 했습니다. 저를 빼고 고려에서 5명을 뽑고 황룡사에서 5명을 뽑아 대결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한판 이긴 사람이 다음 판도 계속 두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거기다가 나는 딱히 장기를 잘 두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규칙만 알고 인터넷 장기를 약간 둔 정도에 불과했다.
"아아악. 연, 연우 너를 경주에 보내는 게 아니었다. 황룡사의 중들 중에 머리가 좋은 이도 많을 것 아니냐? 이런 걸 잘할텐데."
왕건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말했다.
한림원의 다른 학사들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김악이 마침내 나에게 물었다.
"그런 식이면 우리가 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황룡사 측이 이길 가능성이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그쪽에서도 응합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핏 보기엔 대등한 조건 같아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이기게 돼 있습니다."
머리를 잡아 뜯는 왕건을 보니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그 광경을 감상하며 찬찬히 김악에게 내가 구상한 방법을 설명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