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 구층탑 >
나주원의 처소에서 왕무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국선! 폐하께 말씀드려 나도 함께 경주에 가겠습니다."
"정윤 전하께서는 개경에서 저를 지원해주십시오. 여러 대호족들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 말했다. 왕무의 얼굴을 본 순간 왕건이 왜 나만 보내고, 왕무를 안 보내려 하는지 이해가 갔다.
'경주에 가서 실패할 수도 있는 일에 왕무를 휘말리게 할 수는 없어. 이번에는 나도 딱히 뾰족한 방도가 없으니.'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왕무가 나섰는데 실패하면 정치적 후폭풍이 컸다.
'다만 왕건은 어떻게든 휘말리게 하고 싶다. 망해도 같이 망하고 싶어.'
그런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국선, 기껏 통일이 됐는데도 둘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우니……"
왕무는 그리 말하며 나를 덥석 껴안았다. 왕무의 체향이 느껴졌다.
'나, 나는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 진작 왕무에 대한 내 마음을 인정했어야 했다. 함께할 시간이 이리 없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왕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다음날도 나는 우선 한림원에 나갔다. 왕건과 경주에 내려가는 일을 논의해야 했다.
"경주까지 내려가는데 호위병이 꽤 필요할 거다. 마침 경주도독 윤신달의 아들 윤선지가 파평의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간다고 한다. 그때 함께 가도록 해라. 내가 근위군 중에서도 용사를 뽑아 붙여주마. 네 오라비도 함께 보내마. 아직도 낭중인가?"
왕건이 나를 챙겨주는 척하며 말했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제 오라비는 병부경이 됐습니다."
나는 왕건에게 굽신거리는 시늉을 했다.
'한창 백제와의 전쟁이 벌어질 때도 80명을 주고 서라벌에 다녀오라고 해놓고선. 이제 통일이 다 됐는데 무슨 호위병 타령을 하는지.'
나는 너무 아니꼬웠다.
어쨌든 내 경주행은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왕건이 천사옥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호위하기 위해 윤선지, 임연객이 300명의 기병들을 구정에 집결시켰다. 경주까지 가는 나를 전송하기 위해 왕건을 비롯해 여러 중신들이 나왔다.
그 사이에는 유긍달과 김부의 모습도 보였다.
"정윤비 마마께서 공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유긍달이 내 앞에서 예를 갖추며 덕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치레를 하는 내 속에서 천불이 솟아올랐다.
'유긍달 등을 위해서 내가 경주까지 내려가야 해? 정말 왕건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를 꽉 깨물며 왕건 쪽을 바라보는데 왕건이 말했다.
"우리 연우가 너무 긴장을 한 듯하구나. 실패해도 탓하진 않을테니 경주에 가서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너라."
그런 왕건의 곁에는 왕무가 약간은 아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왕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잊었다.
'그래 한동안 왕무를 못 보니까 왕무의 얼굴이나 잘 기억해두자! 지난번에 서라벌에 갔을 때는 왕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내내 괴로웠어.'
나는 구정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무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꼼꼼하게 왕무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급한 여정이 아니기에 나는 말이 아닌 수레를 타고 움직였다. 수레 안에서 나는 두 눈을 감고 여러 가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 경주 인근의 선필과 안동 삼태사 등을 다 만나고 와야겠다. 그들을 정윤파로 끌어들여야지. 게다가 윤신달과도 또 만나게 됐네. 경주도독으로 임명된 만큼 상당한 실력자가 됐는데 윤신달을 정윤파로 끌어들일 방법이 없나? 천사옥대 문제를 해결하면 윤신달도 나에게 정치적 빚을 지는 셈인데.'
지금은 윤신달이 경주 도독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윤신달 입장에서는 경주에 부임하자마자 천사옥대 문제가 크게 터진 셈이었다.
여러모로 근심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 딱 내가 등장해서 천사옥대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주면 윤신달이 나에게 엄청 고마워 할텐데. 적극적으로 정윤파가 되진 않더라도 우리 쪽에 우호적인 감정은 품을 거야.'
그러나 나도 천사옥대와 관련해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개경에 돌아가서 왕건에게는 무슨 핑계를 대야 하지?'
왕건은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다년간 왕건을 겪어 본 나는 그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경주를 한번 둘러보고 빈손으로 개경에 돌아가면 혹독한 추궁이 있을 것이 뻔했다.
'뭔가 실패를 해도 노력을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책임추궁을 피할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순간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든 책임지는 일을 피하려는 복지부동 공무원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러나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 왕건 같은 사람 밑에서 구르다 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황룡사의 중들이 구층탑 꼭대기에 천사옥대를 가져다 놨으니 이건 무슨 방법이 없어. 사실 왕건이 군사를 진입시키는 걸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구층탑 자체도 보물인데. 섣불리 군사를 보냈다가 구층탑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하늘을 날아가면 몰라도……어! 그러고 보니?'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뭔가가 있었다.
'기구를 만들면 하늘을 날 수 있지 않나? 초보적인 형태의 기구면 이 시대 기술로도 가능할지도 몰라.'
물론 내가 초보적 형태의 기구를 만든다고 해도 그걸 타고 황룡사 구층탑에서 천사옥대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이 시대 기술로 만든 기구에 사람을 태울 수는 없지. 너무 위험해. 다만 이걸 왕건의 추궁을 피할 핑계거리로 삼는다면?'
기구의 설계도를 그려서 바치면 천사옥대를 가져오기 위해 이런 생각까지 했다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좋아, 좋아. 핑계거리는 우선 만들었다.'
나는 수레 위에서 손뼉을 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에 별일 없이 나는 경주 인근까지 당도했다. 이미 삼한통일이 됐는데 고려 정윤비의 여정 중에 무슨 일이 생길 확률은 극히 낮았다.
'선필과 안동 삼태사 등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고 우선은 경주 상황을 살펴봐야지.'
내 결심에 따라 일행은 그대로 경주 안으로 진입했다.
"아니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
수레 밖에서 말을 타고 가는 임연객이 경주 시가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수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사방을 살폈다.
과연 경주 주민들의 반응이 이전과는 달랐다.
'예전에 왕건과 함께 서라벌을 방문했을 때나, 유금필이 서라벌을 구원했을 때는 엄청난 환영을 받았는데……'
지금은 경주 주민들이 내 행차를 보고도 환호성 하나 지르지 않았다. 묘하게 적대적인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 국왕인 김부가 항복했지만 경주 주민들은 이를 수긍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왕건이 왜 호위병을 많이 데려가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경주의 분위기가 그닥 좋지 않다는 것을 왕건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정예 기병들을 내 수레 쪽으로 많이 배치해."
나는 임연객을 향해 외쳤다.
"어."
임연객도 불안한 표정으로 기병들을 거느리고 내 수레를 둘러쌌다.
'대강 구색만 맞추고 바로 경주에서 빠져나와야지. 고려 왕족이 오래 있을 곳이 아니야.'
주민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새삼 그걸 느꼈다.
그사이 앞쪽에서 상당한 수의 기병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님의 깃발입니다! 아버님께서 직접 나오셨습니다."
윤선지가 외쳤다. 경주 도독 윤신달이 내가 온다는 소식에 마중을 나온 것이다. 윤신달의 기병들이 합류하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정윤비 마마 잘 오셨습니다. 이번 일은 정윤비 마마만 믿습니다."
내가 탄 수레 가까이에 온 윤신달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윤신달의 얼굴도 수척해 보였다.
그런 윤신달의 얼굴을 보니 나도 양심에 찔리긴 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나는 일을 제대로 처리할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그저 핑곗거리를 만들 궁리만 한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어? 방법이 없는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나는 겉으로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우선 황룡사를 둘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황룡사와 그 인근 분위기가 몹시 불온합니다. 가려면 단단히 채비를 하고 가셔야 합니다. 우선 도독부에서 여독을 푸십시오."
나는 현지 사정에 밝은 윤신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일행은 경주도독부로 향했다. 확실히 윤신달의 말대로 경주의 분위기는 엄중했다. 곳곳에 군사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윤신달이 아들인 윤선지에게 파평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라고 한 것도 분위기가 안 좋으니 그런 거구나.'
나는 재빨리 여기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결심을 더 굳혔다. 내 수레 곁에서 말을 몰며 윤신달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옛 신라 왕궁 일부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 신라의 무리들은 이것에 불만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도독부를 새로 지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도독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윤신달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옛 신라의 무리들이 불만을 품고 온갖 소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황룡사가 천사옥대를 끼고 버티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는 경주 사람들이 많습니다. 황룡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룡사의 중들이 전부 우리에게 맞서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협력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그들을 동원해 몰래 천사옥대를 빼내 올 수는 없습니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윤신달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협력하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황룡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구층탑 꼭대기에 천사옥대가 있으니 몰래 빼내올 수는 없습니다."
윤신달도 갑갑하다는 듯 말했다.
"흐음."
나도 신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도독부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한 나는 채비를 마친 윤신달 등과 함께 황룡사로 향했다. 황룡사는 경주도독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황룡사가 무지막지하게 큰절이긴 했다. 구층탑의 위용도 대단했다. 그 황룡사의 출입문마다 고려 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혹여 천사옥대를 황룡사에서 빼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황룡사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식량을 끊으면 좋은 방책 아닙니까? 며칠 굶기면 힘이 다한 황룡사의 중들이 천사옥대를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황룡사의 중들이 다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순간 그런 계책이 떠올랐다. 확실히 왕건의 말대로 직접 황룡사의 상황을 보니 다채로운 방안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도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폐하께 건의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양식을 계속 대주라고 하셨습니다."
"허허허."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왕건은 그런 방식으로 황룡사를 굴복시키진 않겠다는 오기를 부리는 것이다.
"거기에 황룡사를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 곁에서 윤신달이 황룡사 밖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과연 경주 주민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냥 구층탑을 구경한다는 명목으로 저렇게 서 있는데 여러모로 부담이 되긴 합니다."
윤신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황룡사에 한번 들어가 그곳의 중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윤신달에게 물었다. 개경에 돌아가서 왕건 앞에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를 대려면 황룡사에 한번 들어가보긴 해야 했다.
"황룡사 안에 들어가는 것은 가능합니다. 저도 여러 번 들어가 설득해보려 애를 썼습니다. 다만 고려 사람들이 구층탑에 접근하는 것은 저들이 전력을 다해 막고 있습니다."
"그럼 당장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