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 고민 >
나는 침상 위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그냥 평생 옷을 안 입고 살았으면 좋겠다. 옷 대신 이불을 두르고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느낌이 좋았다. 내 곁에는 왕무가 잠들어 있었다. 왕무 역시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이불만 덮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임신은 언제 될까? 에잇 고민할 필요 없어. 원래 역사에서도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신체적으로 문제는 전혀 없지. 열심히 안 해서 안 생기는 거야.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해야지.'
마후라 대사와 최치원의 주머니를 열어보고 나는 왕무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와 왕무는 너무 바빴다.
일리천 전투까지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나와 왕무는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삼한통일 이후 뒷수습까지 얼추 마무리된 지금에서야 나와 왕무는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평생 요즘 같았으면 좋겠다.'
왕무와 밤에 보내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조정의 상황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룡사가 천사옥대를 끝까지 내놓지 않자 왕건도 크게 노했다.
그 분노가 정승 김부에게 쏠리고 있었다. 당연히 김부를 지원하는 유긍달 등도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흐흐흐, 이걸로 유긍달 등을 보내버릴 수는 없지만 시간은 벌었다.'
내 입장에선 너무 통쾌한 일이었다. 아직 새벽이라서 나는 왕무를 껴안고 잠이나 더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왔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최치원을 떠올렸다. 신라와 관련된 일이 조정에서 터지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생각이 쏠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치원이 책을 읽고 공부를 좀 하라고 했는데 책을 펴보지도 않았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가에 가서 최치원이 나에게 남긴 책을 바라보았다.
최치원은 대부분의 책을 한림원령 최언위에게 넘겼다. 나에게는 최치원 자신이 저술한 문학과 역사에 관한 책을 50권 가량 남겼다.
'내가 이 책들을 읽고 학문을 쌓기를 바란 것 같아.'
나는 그중 한권을 뽑아들었다. 남는 시간에 잠깐이나마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꽃과 나무
내가 뽑은 책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있었다.
'왕무와 비밀통로에서 만난 이후로 나도 이두문을 익혔지. 흐흐흐. 비밀통로에 있던 작제건의 글이 이두문으로 적혀 있어서 왕무가 나 대신 읽어줬었는데.'
이두문을 보니 또 왕무 생각이 났다. 나는 자연스레 침상에 누워있는 왕무를 바라보았다. 가슴근육을 다 드러내고 왕무는 잠에 빠져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가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안 돼!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책을 펼쳤다. 책도 나름 재밌었다.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꽃과 나무들에 대해 최치원이 설명을 덧붙인 책이었다. 꽃과 나무들의 특징에 대해 최치원이 쉬운 이두문으로 설명을 붙여놨다.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책이었다. 적당한 두께의 책이라서 며칠 내에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서를 하다가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한림원에 갔다.
'앞으로는 왕무와 밤에 일을 마치면 계속 책도 읽어야겠어. 에휴, 바쁘다. 바빠.'
그래도 뭔가 지식이 쌓이는 기분이라 나는 독서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다만 한림원에 들어가서는 기분 좋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왕건의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한림원에 들어온 왕건이 투덜거렸다.
"김부 그 사람도 참 한심하군. 괜히 사위로 삼았어. 아니 결국 김 정승도 군사를 보내 황룡사에 진입시키자는 말을 하니. 이거 참. 그러고 보니 김부의 큰아들은 왜 입조를 안 하는 거야? 금강산에 왜 가 있어?"
왕건이 열이 오르는지 소맷자락으로 부채질을 하며 외쳤다. 신라가 항복을 하긴 했어도 여러 잡음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김부의 큰아들인 마의태자도 옛 신라 땅인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도 옛 신라왕이었던 김부가 직접 개경에 왔기에 왕건도 마의태자가 입조하지 않은 걸 눈감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여러모로 짜증이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왕건은 최언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룡사에서 고리대금 같은 것을 하고 있진 않아? 그러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명분을 세워 슥삭해버리면 되는데. 조사를 하라고 했는데 어찌 됐어?"
이 시대 절들은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왕건은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알아봤는데 황룡사는 신라 진골들이 수백 년간 많이 출가한 곳이라 돈이 많다고 합니다. 굳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최언위가 왕건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허허. 이거 참."
왕건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천사옥대를 찾아오려면 군사들을 투입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황룡사에서 천사옥대를 9층탑 꼭대기 층에 가져다 놓고, 노승들이 각 층마다 앉아 참선을 하며 지키고 있다합니다. 몰래 빼내올 수도 없습니다. 건장한 군사들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황룡사의 승려들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고 천사옥대를 빼내면 됩니다."
마침내 최언위의 입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 말을 들은 김악이 한쪽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고려 조정의 중지도 군사투입 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천사옥대 문제도 그렇고 마의태자가 버티는 것도 그렇고 신라의 불온한 움직임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고려 조정도 생각하는 것이다. 군사를 일으켜 대드는 것은 아니지만 사소한 걸로 고려 조정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니 고려 조정도 강경책을 한번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김악과 황보제공이 처음 제시한 방법이 옳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단순해 보여도 괜히 출세한 것이 아니었다.
'뭐 그거 외엔 무슨 수가 있겠어? 군사들을 동원해야지. 어쨌든 구 신라령이 이리 수런거리니 김부나 유긍달이나 한동안 자숙하고 있어야 할 걸. 으하하하.'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정녕 군사투입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음, 어쨌든 이 문제는 급한 사안은 아니다. 내가 더 고민해보겠다."
왕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반란 같은 거면 왕건도 신속하게 군사를 동원해 진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안은 왕건도 꾀를 써서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 같았다.
'왕권 강화 측면에서도 지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 더 낫긴 하지.'
한참 고민하던 왕건은 마침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우야. 이리 와 보거라."
지난 몇 년간 이런 애매한 문제가 터졌을 때 내가 현대인의 지식으로 여러 차례 왕건을 도왔다. 이번에도 왕건은 내 힘을 빌리려 하는 것 같았다.
"뭐 쌈박한 방법이 없니?"
왕건이 나에게 물었다.
"군사투입 외에는 방도가 없습니다. 다만 황룡사의 중들이 다치지 않도록 개경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나서 투입해야 합니다."
나는 원론적인 대답을 했다. 천사옥대 문제는 내 정적인 유긍달 등에게 불리한 사안이었다. 내가 굳이 해결을 위해 정성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왕건이 물어도 딱히 방도가 없다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왕건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연우야. 이건 너도 기뻐할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렴. 이 일로 유긍달만 곤란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필 상보도 곤란해진다. 상보도 신라를 항복시킬 때 상당한 역할을 했어. 그런데 일이 이리 흘러가고 있으니 상보도 당황스럽지. 거기에 경주도독으로 가 있는 것이 윤신달이다. 윤신달 같은 경우도 너와 친하지 않니?"
왕건이 은근히 나를 달래듯 말했다. 정치고수인 왕건답게 이미 내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유긍달 등만 곤란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힘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나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윤신달이야 중립을 지키는 사람이니 나와 상관이 없지만 선필이 난감해지는 건 좀 그렇긴 하네.'
나도 그게 약간은 마음에 걸렸다.
"저는 일체 그런 정치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고려를 위해 충심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생각나는 방법이 없습니다. 군사 투입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왕건에게 그리 대답했다.
정치적인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생각나는 방법이 없다는 건 진실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무슨 수로 천사옥대를 빼낸다는 말이야?'
내 대답을 들은 왕건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연우는 너는 너 자신이나 무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귀신같이 묘안을 짜내서 빠져나가지 않니? 허허허. 이건 남의 일이라 연우 네 머리가 잘 안 굴러가는 모양이구나. 진짜 방법이 없어?"
"예."
한참 고민하던 왕건은 짐짓 큰소리로 말했다.
"이건 어떠냐? 만약 연우 네가 경주에 가서 지략으로 천사옥대를 가져온다면, 앞으로 연우 네가 무슨 죄를 지어도 한번은 용서해 주겠다. 어떠냐?"
왕건은 어떻게든 내 머리를 잘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 나름 당근을 제시한 것이다.
'솔직히 솔깃하긴 하네.'
나도 순간 혹하긴 했다. 근데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우 네가 한번 경주에 내려가 보는 것은 어떠냐? 내 생각에 다른 장수, 문관들은 내려가봤자 의미가 없다. 그런데 연우 네가 가서 황룡사를 둘러보면 무슨 꾀가 나지 않을까?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잖아? 개경에 있으면 무슨 생각이 나겠니?"
왕건이 넌지시 그런 제안을 했다.
그 순간 내 뇌리에 왕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왕무를 못 보잖아! 이런 일로 또 시간을 허비하긴 싫어. 밤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내가 계속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왕건은 집요했다.
"내가 천사옥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연우 너를 보내려는 것이 아니다. 다 연우 너와 무 때문에 그러는 거다. 응. 이번에 연우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하면, 유긍달과 김부 등은 너에게 정치적 빚을 지는 거다. 정치적 빚이라는 게 고리대금보다 더 무서워. 유긍달 등이 정치적 빚을 안 갚으려고 해도 나중에 결국 연우 너에게 다 갚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번 경주로 내려가 보렴."
"몸이 안 좋아서."
내가 핑계를 대는데 왕건이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화엄종이 아직도 북악파, 남악파로 나뉘어져 싸운다고 하더구나. 아니 내가 삼한을 통일했는데도 남악파의 무리들이 굴복을 안 하는구나. 이게 말이 되니? 연우 네가 화엄종과 인연이 깊지 않니? 대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뭐하는 거니?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다. 그래 경주로 내려가는 대신 화엄종 문제를 해결해보겠니? 화엄종을 통일 못 시키면 개경에 못 돌아오는 걸로?"
"폐하!"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한번 분열된 화엄종이 통일되려면 족히 수십 년은 걸렸다. 실제 역사에서도 수십 년 뒤에나 고려 왕실의 지원을 받아 화엄종이 통일됐다.
그런데 왕건이 갑자기 나를 그 큰 문제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어떠냐? 연우야. 경주에 한번 내려갈래? 아니면 화엄종을 통일시키고 올래?"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나는 기가 막혔다.
"경……경주에 한번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경주에 가봐도 뾰족한 수가 없으면 어찌합니까?"
허나 나는 왕건의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나도 더 이상 너를 탓하지 않으마. 제발 한번 내려가 보기만 해봐. 그래도 연우 너의 지략이면 뭐가 나오지 않겠니?"
왕건이 갑자기 나에게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