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67화 (167/216)

< 167 : 황룡사 >

"정윤비 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정주가 유긍달 쪽에 붙게 되면 상황이 곤란해집니다. 충주, 황주는 거의 한몸처럼 붙어다니는데 여기에 정주 세력마저 가세하면……"

왕규가 좀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하하."

나는 소맷자락으로 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왕규 앞에서 여유 있는 척하려고 그랬지만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유긍달 이 인간은 현대에 와서 결혼정보회사를 차렸어도 재벌이 됐을 거야. 어쩜 이리 자기 외손자, 외손녀들 혼인을 잘 시키는지.'

왕건은 평생 29명의 아내가 있었다. 이 중에는 같은 가문에서 온 아내도 있다. 그러니 약 20개 가문이 혼인을 통해 왕건과 연합해서 삼한을 통일한 것이다.

'이 20개 가문 중 세력이나 공훈을 따져보면 5개 가문이 가장 두드러진다. 단순히 세력만으로 가문의 격을 논할 수는 없고, 건국과정의 공도 따져야 해. 그러면 나주 오씨, 경주 김씨, 충주 유씨, 황주 황보씨 그리고 정주 유씨가 유력하지.'

나주 오씨야 세력이 미약하긴 하지만 견훤의 후방을 어지럽힌 공로가 워낙 컸다. 또한 결국 정윤 왕무가 오씨를 외가로 두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해도 중요한 가문이었다.

경주 김씨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나라를 왕건에게 바쳤다. 충주 유씨와 황주 황보씨는 유긍달, 황보제공이 군사와 식량을 왕건에게 열심히 대며 큰 활약을 했다.

그리고 정주 유씨의 유천궁은 엄청난 재력으로 일찍부터 왕건을 후원했다. 유천궁의 딸인 정주 왕후는 궁예를 칠 때 망설이는 왕건을 격려하는 공까지 세웠다. 물론 그 정주 왕후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서 지금은 정주 유씨 집안의 다른 여인이 다시 왕건과 혼인했다.

'그런데 유긍달은 혼인만으로 나주 오씨를 제외한 4개 가문을 지금 연결시키고 있다. 외손녀인 유설란이 김부와 결혼하며 경주 김씨와 이미 연합한 상태. 여기에 황보제공이랑은 원래 친해서 이미 혼사를 약속해놨을 거고. 여기에 왕정 태자를 이용해서 정주까지 끌어들인다면……'

충주원에는 지금 4명의 태자가 있었다. 원래 맏이로 태어난 태자가 있었지만 어려서 병으로 눈을 감았다.

살아남은 4명의 태자는 왕요, 왕소, 왕정 그리고 막내아들인데 불교계에 출가한 증통이였다.

'실제 역사에서 왕이 된 왕요, 왕소만 결혼을 잘한 게 아니라, 왕정도 정주 유씨와 혼인을 시켜서 기반을 강화시키고 게다가 막내는 불교계 장악을 위해 출가시키고.'

정말 혀를 내두를 만한 유긍달의 수완이 느껴졌다. 실제 역사에서 왕무가 괜히 흔들린 게 아니었다. 유긍달이 왕무가 고립될 수밖에 판을 다 짜둔 것이다.

'최소한 4대 가문의 연합은 막아야 한다. 정주 유씨는 어떻게든 떼어내야 해. 왕규의 말이 맞아. 이게 진짜 중대한 고비다. 근데 방법이……'

실제 역사에서는 왕정 태자와 정주 유씨의 혼인이 이루어진다. 정주 유씨의 가주인 유천궁이 혼사를 허락했다는 소리였다.

'지금 내가 유천궁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 사람 마음을 돌릴 방법이 마땅치 않아.'

나도 마음이 답답했는데 왕규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어서 계속 웃기만 했다. 그러자 왕규는 더 초조해졌는지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이미 아실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 광주원도 정주 유씨에 혼사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광주원에서 사람을 정주에 보냈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충주원의 왕정 태자도 정주에 혼사를 청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광주원군이 준수하고 총명하긴 합니다."

나는 광주원 부인의 아들이자 왕규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왕규의 수완에 좀 놀랐다.

'왕규 이 사람도 어떻게든 활로를 뚫어보려고 나름대로 움직이고 있었군. 광주원군과 정주 유씨의 혼인이라? 괜찮은데?'

이미 언급했다시피 광주의 대호족 왕규는 패서호족들과 역사적으로 관계가 불편했다. 유긍달, 황보제공을 주축으로 하는 패서호족들이 왕권을 장악하면 왕규는 끝장나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일이 그렇게 흘러갔다. 왕규도 그 사실을 짐작하고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이다.

나도 왕규의 구상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광주원과 정주 유씨의 혼인이 이루어지면 왕무에게 대단히 유리하다. 정주 유씨가 유긍달 쪽에 안 붙고 그냥 중립만 지켜도 할만한 상황인데. 어쨌든 왕규도 나름 판을 읽고 이 혼사를 도와달라고 나를 부른 거 같네. 바로 도와준다고 말하지는 말고 시간을 좀 끌자.'

어쨌든 내가 광주원군을 칭찬하자 왕규와 광주원 부인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정윤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광주원군이 얼마나 훌륭한 신랑감입니까? 그런데 지금 일이 묘하게 돌아가니 갑갑한 노릇입니다. 광주원군과 충주원의 왕정 태자가 지금 경쟁하는 형국입니다. 일 대 일로 경쟁하다가 우리 광주원군이 지면 승복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충주원의 무리들이 도의를 안 지키니 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왕규가 분기탱천해서 외쳤다.

"오호.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긍달 그 사람이 나서면 황보제공이 기본적으로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러면 또 평주 박씨, 신주 강씨도 덩달아 동조합니다. 아니 충주원에서 혼사를 넣었는데 왜 황주, 평주, 신주 사람들이 나서는지? 어쨌든 그 패거리들이 모두 정주에 사람들 보내서 마음 약한 유천궁 어르신을 흔들고 있습니다. 아니 왕정 태자가 혼사를 넣었는데 왜 다른 가문에서 그 혼사를 하면 좋겠다고 말을 합니까? 응?"

왕규가 맺힌 게 많았는지 이를 악물고 이야기했다. 가만히 있던 광주원 부인도 못 참고 나섰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왕실의 어른이신데 이 일을 두고 보실 겁니까?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나주원에서 좀 나서주십시오. 그리고 동양원, 해량원도 거들어주면……"

정주 유씨에게 혼사를 넣었는데 유긍달과 그 연합 세력들이 한몸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고 광주원도 위협을 느낀 듯했다. 그래서 나를 불러 내 세력을 움직여 광주원군을 밀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얼추 숫자상으로는 유긍달에게 맞설 수 있는 것이다.

"하하하. 그런 식으로 숫자를 앞세워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광주원과 충주원이 일 대 일로 경쟁하는 것이 순리이긴 합니다."

나는 우선 왕규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주었다.

"그러면 정윤비 마마께서 우리 광주원군을 위해 나서주시는 것입니까?"

왕규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하하하."

나는 그런 왕규를 보며 더 크게 웃으며 확답은 안 줬다.

'맨입으로 그걸 해줄 수는 없지.'

광주원에 와서 계속 웃느라 힘들었지만 나는 꾹 참고 계속 웃었다.

"아 물론 이런 일을 청했으니 조만간 제가 직접 예물을 싸들고 정윤 전하를 뵙겠습니다. 아예 정윤비 마마께서 오늘 시간을 정해주십시오. 그때 찾아가겠습니다. 앞으로 정윤 전하를 잘 모시겠습니다."

왕규가 내 앞에서 새삼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실상 왕규 역시 정윤파에 가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왕규 입장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지. 유긍달 쪽 파벌에서 왕규를 안 받아주니. 왕규가 뭘 하려면 정윤파에 가담하는 수밖에 없어. 정주에 혼사를 청하면서 왕규도 이걸 실감했을 거야. 광주의 세력이 상당히 크니 많은 도움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왕규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대광께서 방문하신다면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내가 나주원에 돌아가서 의논을 한 뒤 대광께서 오실 날짜를 조율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왕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곁에서 광주원 부인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지략만 믿습니다. 우리 광주원군의 혼사가 성사되도록 힘을 좀 써주십시오."

그런 광주원 부인의 얼굴을 보니 나는 상당히 부담이 됐다.

'광주원군이 정주와 혼인을 하는 것이 나와 왕무에게 유리해. 거기에 왕규가 정윤파에 가담했으니 전력을 다해 돕겠지만 실제 역사에선 왕정 태자와 정주가 혼인을 한단 말이야. 어찌 보면 실제 역사를 크게 뒤트는 격인데. 가능할까? 노력은 하겠지만.'

그런데 왕규와 광주원 부인은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께서 이 혼사 문제에 대해 어떤 계책이 있으시면 저에게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광주에서도 거기에 발맞춰 움직이겠습니다."

왕규가 은근한 어조로 나에게 캐물었다.

"뭐 혼사문제는 그리 급한 것이 아닙니다. 조만간 유긍달 등은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한동안 충주원은 정주와의 혼사문제에 신경을 못 씁니다. 우선 시간 여유는 있습니다. 광주원군의 혼사는 차차 계획을 짜면 됩니다."

나는 내 미래지식 보따리를 풀기로 결심했다.

'왕규가 정윤파에 가담한 기념으로 귀한 정보를 좀 알려줘야지. 그리고 시간 여유가 있으니 광주원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독촉 좀 하지마!'

내 말을 듣고 왕규는 놀란 기색이었다.

"유긍달이 곤경에 처할 리 있습니까? 요사이 그럴 기미조차 안 보이는데?"

"천사옥대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내가 넌지시 물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폐하께서도 얻기를 원하시는 신라의 보물 아닙니까?"

"정승 김부가 천사옥대를 바치는 일과 관련해서 곧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유긍달의 외손녀 유설란이 김부와 결혼했습니다. 즉 유긍달과 충주 세력이 김부의 보증을 서고 있는 격입니다. 그런데 천사옥대와 관련해서 잡음이 생기면 유긍달도 좀 난감하겠지요. 그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하니 정주와의 혼사 문제는 뒤로 미뤄질 것입니다."

내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런데 천사옥대와 관련해서 문제가 생길 일이 무엇입니까? 김부가 나라도 넘겼는데, 아무리 보물이라도 천사옥대 같은 허리띠 하나를 바치지 않겠습니까? 삼한을 통일하신 우리 폐하께서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오는 것 아닙니까?"

왕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김부가 천사옥대를 바치고 싶어도 그에 대해 반대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하하하."

나는 왕규를 보며 찬찬히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황룡사의 땡중들이 감히 이럴 수 있느냐? 내 명을 거역하다니!"

한림원에서 격노한 왕건이 주먹으로 서탁을 치며 외쳤다. 어전에서 땡중이란 말을 쓸 수 없으니 한림원에 와서 분을 푸는 것이다. 놀란 한림원 학사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왕건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기뻐하는 내 얼굴이 보일까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김부와 유긍달이 지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겠지. 맛 좀 봐라.'

왕건이 신라의 보물 천사옥대를 탐낸 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런데 김부가 항복할 때도 천사옥대가 같이 안 왔다. 그 당시야 백제를 멸망시키는 일이 급해서 왕건이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큰일을 다 수습하고 왕건이 천사옥대에도 신경을 쓰는데 사고가 터진 것이다.

"왕명이 떨어졌는데도 황룡사의 땡중들이 천사옥대를 못 내놓겠다니 말이 되는가? 김부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야? 경주의 사심관을 맡겼는데 이런 일 하나 처리를 못하다니!"

왕건이 분이 안 풀리는지 계속 외쳤다.

'김부가 천사옥대를 바치기 싫어서 황룡사와 짜고 그러는 거라고 이간질을 시전해볼까? 그럼 김부를 보내버릴 수 있을지도? 아니야 내가 그러면 너무 티가 나.'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내가 안 나서도 이런 의심이 고려 조정에 감돌고 있었다.

"폐하 신에게 군사 백 명만 내려주십시오. 황룡사의 중들에게 몽둥이 맛을 보여주고 천사옥대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런 왕건의 모습을 보고 김악이 불쑥 나서더니 외쳤다.

"아아악."

김악의 말을 듣고 왕건이 더 괴로운지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외쳤다.

"어전에서도 황보제공이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한림원에서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해. 아니 내달라는 군사 숫자까지 똑같아! 왜 백명을 원하는지. 아니 내가 황룡사의 고승들을 두들겨 패서 천사옥대를 가져올 수 있겠어? 그럼 벌써 가져왔지!"

"……"

그런 왕건의 말을 듣고 김악이 말없이 재빨리 물러났다.

"하 골치 아프게 하필 황룡사에 천사옥대가 있었다니. 폐주마냥 중들 머리를 깰 수도 없고. 그랬다가 폐주가 갔잖아!"

왕건이 그리 한탄했다.

"황룡사에 신라 왕족이나 진골 출신 승려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겠다고 천사옥대를 안 내놓는 것 같은데 황룡사 자체도 이제 고려의 것이 됐습니다. 폐하께서 아량을 보이셔서 황룡사에서 천사옥대를 보관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최언위가 곁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

"아니지. 그건 안 되지. 내가 끼고 있어야 내꺼 아닌가?"

그런데 왕건은 최언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그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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