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 북진 >
나는 왕건의 정책이 주먹구구식이라 생각했지만 굳이 나서진 않았다.
'나도 별 능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야. 이런 전국 단위의 행정, 세금 제도 정비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전문가가 달라붙어서 수십 년간 해야 하는 일이니. 거기다가 괜히 왕건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가 찍히면 곤란해. 왕무가 왕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왕건의 말에 따라야 해.'
그런 계산을 하며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하는 척했다. 다른 학사들도 왕건의 말에 딱히 토를 달지 않고 명령대로 재정 장부를 가져와 숫자를 이리저리 맞추기 시작했다.
왕건은 자신이 지시를 내려놓고도 찜찜한 모양이었다.
"이건 그저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임시변통! 나도 이게 장기적인 대책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
왕건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서성이며 말했다.
"지난 수십 년간 내전을 벌였더니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수많은 싸움을 거쳤는데 영토가 하나도 안 늘었어! 전쟁은 끝났지만 그냥 신라 9주를 다시 회복한 것에 불과하다.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나눠줄게 마땅치 않으니……그런 식으로나마 세금이라도 줄여줘야지. 허나 나에게는 이 모든 난관을 해결할 방책이 하나 있다!"
왕건이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뭐 어쩌라는 거야?'
나는 갑자기 일장연설을 하는 왕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곁에 있던 김악이 재빨리 치고 들어왔다.
"그 방책이 무엇입니까?"
"북진을 해서 거란을 토벌하고 발해의 땅을 되찾으면 된다. 원래 발해 형제들은 사람들 숫자는 적은데 땅이 넓었다. 우리 고려는 사람은 많은데 땅이 좁아. 응, 그러니 북방의 땅을 차지해서 호족들에게 나눠주면 이 문제도 해결된다. 내가 북방을 평정하고 나면 향, 부곡, 소들이 세금으로 군비를 열심히 댄 공로를 참작해서 포상을 내릴 작정이다. 지금 조치는 임시변통이지. 하하하."
왕건이 흡족하게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뭐 이론상으로는 맞긴 하고 왕건이 의욕적으로 북진을 노리긴 하는데. 결과적으로 안 되잖아?'
미래에서 온 나는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맛이 썼다.
"중원의 정세가 혼란하니 폐하의 뜻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당나라 유학경험이 있는 최언위가 왕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왕건의 구상이 어느 정도는 그럴 듯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타이밍만 잘 맞았으면 왕건의 계획이 성공했을 수도 있었어. 미래인이 보기에도 왕건의 꿈이 그럴듯하긴 했지. 다만 여러 타이밍이……'
나는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사이 왕건은 신이 나서 외쳤다.
"중원과 요동 땅까지 그려진 지도를 좀 가져와라. 내가 한번 계획을 짜봐야겠다. 여러 호족들도 잘 달래놔야 해. 그 사람들이 말을 좀 안 들어서 얄밉긴 하지만 전장에서는 믿음직하거든."
그러면서 왕건은 학사들이 찾아온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런 왕건의 표정에 생기가 넘쳤다.
'역시 왕건은 거란과의 한판 승부를 꿈꾸고 있어. 그러니 호족 숙청을 하나도 안 했지.'
확실히 이 지점은 왕건의 생각이 맞았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호족들을 숙청해서 힘을 빼야 했다. 그런데 호족들의 힘을 빼다보면 고려의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대신 군사력이 매우 약화됐다. 과거급제한 지방관들이 말은 잘 듣는데 외적이 침공하거나 할 때는 힘이 없어서 허둥지둥 하며 한양의 중앙정부만 바라봤다.
이에 반해 이 시대의 호족들은 확실히 못된 면모가 많고 왕건의 말도 잘 안 듣기는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확실히 후삼국 시대의 난세를 겪어서 군사적 능력은 탁월했다. 군사를 일으킬 때 자기 지역의 자원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왕건도 싸울 때는 호족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리천에서 항복한 백제군까지 포함하면 고려군의 숫자가 10만이 넘는다. 그것도 보병으로 숫자만 채운 게 아니라 거의 5만 명이 기병이야. 기병이 5만 명이면 지금 강성한 거란도 움찔할 규모야.'
왕건이 아예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누이 말하지만 타이밍이 어긋나서 왕건의 구상은 실패한다. 그리고 호족들은 왕건의 이런 구상 덕에 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어. 그 와중에 왕무가 즉위해서 강력한 힘을 간직한 호족들에게 휘둘린 거고. 하 어쩌지?'
발해의 땅을 되찾는다는 희망에 가득 찬 왕건 앞에 가서 내가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헤헤, 어차피 북진은 안 될 일이니 포기하시고 나와 왕무를 위해서 호족들 숙청이나 해주세요. 왕무가 편하게 왕 노릇하게.
이러면 당연히 나는 왕건의 눈 밖에 나고 왕무에게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지금 왕건의 눈빛이나 언행을 보면 옛 땅을 되찾는 일에 진심이었다.
'지금은 왕건의 북진 사업을 도우며 적극적으로 거기에 끼어들어야 해. 그리고 서경유수 왕식렴을 견제해야 한다.'
왕건이 삼한통일을 이루고 나서 북진을 꿈꾸는 와중에 최대의 수혜를 받은 것이 왕식렴이었다.
고려에서 북진을 하려면 서경에 군사와 자원을 모아둘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왕건 시대에 서경 북쪽 청천강 쪽에 성도 여러 개 쌓았다.
이 일을 관할한 게 다 서경유수 왕식렴이었다. 자연스레 왕식렴의 힘이 커지게 됐다.
'지금이야 왕식렴이 여러 대호족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 고려 최대의 실력자가 돼 버린다. 이 왕식렴이 유긍달 등과 손을 잡고 충주원의 왕요를 왕으로 만들지.'
이 일을 막기 위해선 나도 왕건의 북진 사업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왕식렴이 북진 사업에 들어간 군사와 자원을 독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를 위한 좋은 패도 있었다.
'북진 사업에 대광현보다 더 나은 패가 어디 있겠어? 대광현을 고리로 해서 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북방에 심어야지.'
나는 들떠서 지도를 살피는 왕건을 보며 향후 내 방침을 정했다.
한림원 업무를 끝내고 나는 나주원에 돌아왔다. 담장 한쪽에 시녀들이 모여서 벽에 뭘 바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내가 묻자 심복 시녀인 경란이가 와서 대답했다.
"벽에 금이 간 곳이 발견돼서 석회를 바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잦아서 그런지 석회가 나주원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 그래."
경란이의 말을 듣고 나는 새삼 허름한 나주원의 풍경을 살폈다. 처음 봤을 때는 너무 낡아서 놀랐었는데 이제는 정겨웠다.
'수리를 해야 하나? 그런데 여기에 쓸 돈이 있나? 어차피 몇 년 뒤에는 고려 왕궁 전체가 왕무의 것이 될 텐데 굳이 돈을 쓸 필요가?'
돈이 아까워서 나는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처소 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때문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여기에서 왕무와 첫경험을 했는데. 이 추억의 공간을 부수기가.'
내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곁에서 경란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마."
"어 그래. 무슨 일이 또 있니?"
"마마를 뵙기 위해 광주원에서 시녀 하나가 왔습니다. 계속 마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란이의 그 말을 듣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광주원에서? 빨리 만나봐야겠다. 내 처소로 광주원의 시녀를 불러라."
이미 언급했지만 광주의 대호족 함규는 딸 두 명을 왕건의 부인으로 보냈다. 그들의 거처가 광주원이었다.
'예전에 내가 함규를 끌어들이려고 한번 광주원에서 만나자고 권할 때는 빼더니. 통일이 되고 나니 함규도 마음이 급해졌나보군.'
내가 그런 분석을 하고 있는 사이 광주원의 시녀가 경란이를 따라 들어왔다.
"마마를 뵙습니다."
광주원의 시녀가 내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마음이 급한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광주원에서 이번에 새로이 정원을 조성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원 부인께서 정윤비 마마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내일 점심에 시간이 되시는지요?"
시녀가 그리 말했다.
"내일? 음, 대광 함……아니 왕 대인께서도 오시니?"
광주의 대호족 함규도 이번에 대광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왕씨 성도 하사받아서 성도 바꿨다. 함규에서 왕규가 됐다.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네. 함규가 아니라 왕규. 왕규가 됐어. 앞으로 실수하지 말아야지.'
"대광께서도 정원이 완성돼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축하하러 오신다고 합니다."
시녀가 내 질문에 답했다.
"알겠다. 나도 가겠다."
나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여유를 둔 것도 아니고 내일 바로 보자는 것을 보니 왕규도 뭔가 마음이 급한 거 같아. 빨리 가봐야지.'
다음날 나는 한림원에 휴가를 내고 옷치장을 했다. 광주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나도 같이 갈까요."
이날은 왕무도 쉬는 날이었다. 왕무는 옷을 차려입은 나를 보더니 그리 물었다.
'정말 같이 가고 싶다.'
나도 왕무와 될 수 있으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허나 사정상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가 왕규와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쪽에 확실히 붙을지 말지 정해지고 난 뒤에 정윤 전하께서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왕무는 정윤파의 수장인데 함부로 움직이면 곤란했다. 정윤파가 왕규에게 쩔쩔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실제 역사에서 왕규의 딸이 왕무의 첩으로 들어오는데. 설마 왕규가 그런 제안을 하면 어쩌지? 설마 그런 제안을 왕무의 아내인 나한테 하지는 않을 거야. 아니지 왕규가 내 양해를 먼저 구하려고 나를 부른 걸 수도.'
갑자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실제 역사에서 왕무는 첩도 들이는 것이다.
'나쁜 놈.'
나는 갑자기 내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왕무를 노려봤다. 물론 지금 내가 있는 역사에선 왕무가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랬다는 것조차 왠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국선? 무슨 일 있습니까? 얼굴이?"
왕무가 깜짝 놀라서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 광주원에 가면 중요한 일을 논의할 것 같아서 고민을 잠시 했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왕무에게는 그리 둘러대고 재빨리 나주원을 나섰다.
'확실히 광주의 왕규가 부자긴 부자네. 으리으리해. 나주원도 수리해야 하나?'
나는 광주원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광주원 부인, 소광주원 부인이 나를 맞이했다. 그 곁에 대광 왕규의 모습도 보였다.
"잘 오셨습니다. 정윤비 마마. 이쪽으로."
광주원 부인이 나를 정원 한쪽에 있는 정자로 안내했다. 정자에 앉아서 나는 광주원 사람들과 가볍게 담소를 나누었다.
'꽃 종류는 나주원에 핀 꽃이나 광주원에 핀 꽃이나 대동소이하네. 하긴 같은 궁안이니 당연하지.'
정원감상은 명분에 불과했지만 나는 머리도 식힐 겸 진짜 정원 감상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광 왕규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삼한일통은 되었지만 여전히 정세가 어수선합니다. 기실 오늘 정윤비 마마를 모신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충주원의 왕정 태자가 요즘 혼담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십니까?"
왕규가 나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벌써? 왕정의 나이가 10살이 안 됐을 건데. 하긴 나와 왕무도 10살 때 혼약을 맺긴 했어.'
하지만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주 쪽과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왕규와 광주원 부인, 소광주원 부인은 몹시 놀란 듯했다.
"과연 정윤비 마마의 수완은 대단하십니다. 왕정 태자 쪽이 혼담 이야기를 꺼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걸 알고 계셨군요. 저도 정말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인데……"
왕규가 감탄해서 말했다.
"하하하."
나는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었다.
'사실 우리 쪽 정보력은 아직 그 정도로 정교하지 않아. 이건 내 미래 지식 덕에 안 건데. 왕규에겐 미안하지만 우리 쪽 정보력이 막강한 것처럼 꾸며야지. 그래야 왕규가 우리를 믿고 가담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