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 수습 >
"아, 그리고 잡찬과 좌승 등이 사재를 털어 백제인 노비들을 해방시킨다고 했었지? 내가 기대하겠다. 하하하."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명……명을 받듭니다."
공직이 울상이 돼서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공직은 이번에 왕건이 호족들의 요구에 또 물러설 줄 알고, 사재를 쓰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왕건이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버리니 졸지에 공직은 돈만 쓰게 되었다. 유긍달도 공직 곁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다른 호족들이 나서니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나선 황보제공만 순수하게 감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용맹이나 군략은 익히 알았지만 이런 지혜까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의 혜안에 놀랄 뿐입니다. 어떻게 그 백제인의 손톱을 볼 생각을 하셨습니까? 참 그 백제 사람의 말이 참말일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허허."
다른 장수와 호족들은 모두 감탄성을 내뱉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폐하께 달려와서 물어봐야겠습니다."
자기 부하들이 사고를 쳐서 곤란한 처지에 몰렸던 염상이 나서서 외쳤다.
다만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왕건을 당황하게 만든 것 같았다.
"이건 그냥 우연에 불과하다. 허허허. 자 모두 개경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자! 빨리 개경에 가야지."
왕건이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사실 내 지혜를 빌려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사람들이 왕건의 공이라 칭송하니 민망해 하는 것 같았다.
'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왕건은 그나마 양심이 있나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왕무와 함께 나란히 말 위에 올랐다. 이젠 정말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또 일이 터지진 않겠지.'
그날 저녁 왕건 일행은 막사를 치고 적당한 곳에 야영을 했다. 나도 내 처소에 왕무와 함께 들었다. 그런데 군졸 하나가 달려와서 말했다.
"폐하께서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를 부르십니다."
나와 왕무는 군졸의 안내를 받아 왕건의 막사로 달려갔다.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왕건이 군졸들을 막사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왕건이 우리 부부를 보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가 오늘 일을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어서 너희들을 불렀다."
"무엇입니까?"
왕무가 물었다.
"연우가 자기 공을 남에게 넘겨주는 성격이 아닌데, 이번에 이런 꾀를 내놓고도 나더러 말하라고 떠넘긴 게 아무리 생각해도 묘해서 너희들을 불렀다. 연우 성격이면 내 옆에서 끼어들기라도 해야 정상인데?"
왕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쓸데없이 예리해선.'
사실 평소 같았으면 내 공을 가로챈 왕건이 얄미웠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왕무가 왕이 되려면 지금 호족들과 극한대립을 해서는 안 돼. 노비 문제는 호족들에게 매우 민감한 문제인데 내가 나서서 호족들을 물 먹였다는 것이 드러나면 좋지 않아.'
왕무가 왕이 되고 내가 왕후가 되면 호족들이 힘들어질 거라는 인상을 주면 곤란했다. 그러면 호족들이 대동단결해서 왕무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무조건 호족들 편을 들면 왕건의 신임을 잃어. 그래서 이번에 왕건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빌려준 거야. 대신 나와 왕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뒤에 숨어있었고. 하, 이제 또 왕건과 호족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네.'
그런데 왕건은 예민하게 내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내가 당황하는데 곁에서 왕무가 말했다.
"국선은 원래 그런 성품입니다. 세속의 명예 따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그래? 뭐 어쨌든 무 너의 말이 맞겠지. 연우는 네 아내니.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왕건은 왕무의 말을 듣고 잠시 말까지 더듬었다. 나도 굉장히 민망해졌다.
'나는 세속의 명예에 많이 집착하는 성격인데. 참 왕무를 보면 신기해. 어쩔 때는 내 마음을 읽는 것 같은데, 이런 건 또 모르고. 왕무가 내 이런 모습은 모르는 게 낫나?'
나는 저도 모르게 왕무의 얼굴을 바라봤다. 왕무가 곁에 있으면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
'정말 왕무랑 함께 하면 평생 심심할 일은 없겠구나!'
내가 멍하니 왕무를 바라보는데 왕건은 음흉한 낯빛으로 말했다.
"어쨌든 너희들을 부른 것은 기왕지사 일이 이리 되었으니, 이번 길명의 일은 내가 혼자 처리한 것으로 입을 맞추자는 거다. 응! 내가 공을 뺏자는 게 아니고 내가 한 걸로 처리해야 일이 편해요. 뭐 다행히 최언위, 김악 등이 나가고 나서 너희들이 돌아와 길명의 일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줬으니 다행이지."
그런 왕건의 얼굴을 보고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이거 때문에 우리를 부른거구나.'
왕무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국선! 폐하의 뜻대로 해도 괜찮으십니까?"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폐하께서 길명을 구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셔서, 저도 그런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폐하의 공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곤란한 문제를 왕건에게 떠넘긴다는 계산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알겠다."
내 말을 듣고 왕건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이후에 왕건 일행은 별 탈 없이 개경에 도착했다. 개경에서도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왕건을 축하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삼한통일로 느끼는 감동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는 개경에 돌아와서 왕무와 함께 상산저에 들렀다. 아버지인 임희에게 축하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제가 별 공도 없는데 이번에 대광이 되었습니다. 이거 참."
임희는 나와 왕무를 보고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장인께서 여러 번 큰 공을 세우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왕무가 임희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왕건이 벼슬을 아낌없이 뿌려서 수십 명의 중신들이 대광이 됐는데. 그래도 받는 사람 기분은 좋은가봐. 아버님은 기뻐하시네.'
그래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광 벼슬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임희의 비위를 맞췄다.
인사를 받고 싱글벙글 웃던 임희가 조심스레 화제를 바꾸었다.
"배현경, 홍유 두 분 장군께서 편찮으시다고 합니다. 정윤 전하께서는 그 두 분의 저택에 가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오늘 그 두 곳도 한번 가보려고 이리 나왔습니다."
왕무가 말했다.
"막 통일대업이 이루어졌는데 두 분 장군이 병에 걸리셨습니다. 대업을 이루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잠시 그러신 것인지……빨리 쾌차하셔야 할텐데."
임희가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실 것입니다."
왕무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홍유, 배현경 두 사람은 결국 올해 세상을 떠난다. 참 그러고 보면 올해 936년이 역사적인 해네. 견훤도 올해 쓰러졌고.'
평생 염원하던 대업을 이루고 나서 맥이 풀린 것인지 일이 그렇게 흘러갔다. 애초에 홍유와 배현경의 나이가 많기도 했다. 나는 내 친구인 배수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현이를 그러고 보니 한동안 못 봤네. 나도 결혼하고 수현이도 결혼해서 그런가? 어쨌든 수현이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나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서 한숨을 쉬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두 공신의 죽음은 왕무에게 지극히 불리해.'
홍유, 배현경 모두 군부의 원로이고 고려의 1등 개국공신이었다. 공신이니만큼 이 사람들은 무조건 왕건의 뜻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왕건이 왕무를 정윤으로 삼았으니, 자연스레 왕무는 공신들의 지지도 확보하고 있었다.
'문제는 홍유나 배현경을 시작으로 몇 년 뒤 왕무가 즉위할 즈음에는 여러 공신들이 거의 세상을 뜬다는 거야. 그에 반해 왕건의 장인들은 대개 젊어. 그리고 사촌 동생인 왕식렴도 왕건보다 어려서 몇 년 더 살고. 따지고 보면 왕요나 왕소는 이런 점에서 나이가 어린 덕을 봤어. 왕요나 왕소가 장성했을 무렵에는 쟁쟁한 실력자들이 꽤 많이 사라졌어.'
왕건이 왕무를 정윤으로 삼고 밀어줬음에도 왕무가 실제 역사에서 그리 된 것은 이런 요인도 컸다.
'그나마 왕만세나 대광현은 젊은 편이니 다행이지. 실제 역사에서처럼 호락호락 당하진 않는다. 다만 뭔가 호족들을 꼼짝 못하게 할 한방이 필요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침통한 분위기에 잠겨있는 한림원에 조심스레 들어섰다. 왕건은 요사이 한림원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일이 많았다.
홍유나 배현경이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건은 계속 이 상태였다. 왕건은 직접 두 사람의 병문안까지 갔다. 개인적으로 홍유와 배현경은 왕건의 친구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왕건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젠 나이가 많구나."
왕건은 한림원에 혼자 앉아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다만 문제는 지금 왕건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폐하. 이제 삼한 땅이 평정되었으니 여러 주,군,현의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조세는 어찌 거둘지도 논의해야 합니다. 또 자신들의 공을 자랑하며 상을 바라는 호족들도 많습니다."
최언위가 그런 왕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통일 후에 오히려 왕건이 처리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수십 년에 걸친 내전이 끝났으니 나라를 정상화 시켜야 하는데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명림답부나 을파소 같은 사람이 없구나!"
자기 앞에 쌓인 서류 더미를 보고 왕건이 막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명림답부나 을파소 모두 고구려의 명재상으로 국왕을 보좌해 이런 행정업무를 처리했다.
"소신의 재주가 부족해 송구스럽습니다."
최언위가 왕건의 탄식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한림원령의 잘못이 아니다."
왕건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최언위는 당나라 빈공과도 급제했고 오랜 세월 한림원령으로 고려의 행정을 기획했다. 두뇌 자체는 재상의 일을 볼만 했다.
'신라 6두품 출신인 최언위는 정치적인 힘이 없다. 명림답부나 을파소는 그 자신이 상당한 정치적 힘이 있는 귀족이라서 왕이 조금만 힘을 실어줘도 다른 귀족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어.'
그러나 지금 상황은 국왕인 왕건 본인이 무슨 명을 내려도 호족들이 버티는 상황이었다. 감히 왕건의 명을 거스르지는 못했지만 바로 따르지 않고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러다가 왕건이 발끈하면 그때 움직였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이라고 최언위나 다른 사람을 내세워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누구도 재상의 말을 안 따를 테니까.'
여러모로 갑갑한 상황이라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금은 우선 깎아줘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통일이 된 덕을 보지. 그래 우선 수확량의 1할만 세금으로 거두는 법령을 내겠다. 이에 대해 준비하라."
한참 고민하던 왕건이 학사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러면 재정이 부족해집니다."
최언위가 그 점을 지적했다.
"내가 삼한을 통일할 때 나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고을들이 있었다. 그곳을 향이나 부곡, 소로 만들어 버려! 거기서 세금을 왕창 거둬서 부족분을 메운다. 그리고 나를 도왔던 호족들은 세금 부담을 줄여줘라. 그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장부를 보고 숫자를 잘 맞춰봐."
왕건이 입맛을 다시며 그런 방책을 내놨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다니.'
곁에서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물론 왕건이 뾰족한 대책을 내기 힘든 상황이긴 하지만 왕건이 아무래도 행정적 능력은 없구나!'
곁에서 나는 새삼 그걸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