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64화 (164/216)

< 164 : 관심법 >

유긍달은 왕건의 표정을 살피더니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

"저 백제인이 거짓말을 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저 자가 저리 교활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평생 노비로 살게 됐으니 거짓말이든 뭐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가지고 저 백제인에게 죄를 묻고 싶진 않습니다. 게다가 저자가 폐하 앞까지 달려와서 호소를 했습니다. 저 백제인이 이대로 노비가 되면 폐하께서 상심하실까 우려됩니다. 그러니 소신이 사재를 털어 저 백제인의 몸값을 지불하고 싶습니다. 거짓말을 친 죄를 물어 매나 5대 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긍달의 그 말을 듣고 울고 불며 난리를 피우던 길명이 잠잠해졌다. 길명은 일이 어찌 흘러가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왕건의 얼굴이 심란해보였다.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한쪽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길명이 계속 울면서 호소하면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게 된다. 유긍달과 호족들이 불쌍한 길명을 노비로 만들려는 악인으로 보일 수도 있고. 그래서 길명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나선거야. 거기에 유긍달로서는 왕건과 이런 문제로 대립하고 싶지 않겠지. 어느 정도 호족들의 신망도 얻으면서 왕건의 비위도 맞추려고 저런 타협안을 제시한 건데……'

그 와중에 한쪽에 서있던 공직도 나서더니 말했다.

"소신 역시 사재를 털어 이번에 노비가 된 백제인들 20명의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고 싶습니다. 거짓말을 치는 노비까지 아끼시는 폐하의 모습을 보고 소신도 감동받았습니다. 소신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공직도 술자리에서 왕건의 뜻을 거스른 것이 불안한 것 같았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어서 또 왕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호족들도 삼한을 통일한 왕건의 눈치를 보긴 해야 했다.

"소신 역시 사재를 털겠습니다!"

황보제공마저 그리 나섰다.

왕건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벌써 점심때니 밥을 좀 먹고 와야겠다. 배가 고프니까 머리가 안 돌아가. 길명이에게도 밥을 좀 줘라. 다만 그 누구도 길명이에게 접근을 못하게 해! 네가 길명이를 지키고 있어라. 나말고는 누구도 접근시키지 마라!"

왕건은 호위군관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호족들이 길명을 회유, 협박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예."

호위군관이 군례를 올렸다.

"자 그럼 밥을 먹고 모여서 이 문제를 마무리 짓자."

왕건은 여러 장수들과 호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왕건의 명을 받고 호족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윤, 정윤비, 한림원령, 사천관은 나와 같이 밥이나 먹자. 아! 김악이도 와."

왕건이 나와 왕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문제는 호족 출신 중신, 장수들과는 의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건은 왕실 사람인 나와 왕무, 그리고 심복 문관들만 막사에 부른 것이다.

나, 왕무, 최언위, 최지몽, 김악은 왕건을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들이 순식간에 한 상을 차려놓고 물러났다.

시녀들이 나가자마자 왕건이 강경한 어조로 외쳤다.

"돈을 주고 노비들을 풀어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결코 그리 할 수 없다! 한푼도 쓸 수 없어."

"폐하의 돈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호족들이 돈을 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왕건을 보고 김악이 놀라서 물었다.

"내 돈이 아니라 호족들의 돈이라도 안 된다고! 나 참 갑갑해서."

왕건이 김악을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왕건은 왕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윤은 내가 왜 고민하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곁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왕무를 바라보았다.

'왕건이 이제 슬슬 왕무를 시험하네. 무야. 잘 해!'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호족들의 의도는 노비들의 증언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선례를 만드는 것입니다. 유긍달은 길명의 몸값을 내겠다고 하면서도 길명이 거짓말쟁이란 것을 강조했습니다. 공직 역시 길명이 거짓말을 쳤다는 것을 언급하며 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삼한 땅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와중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의 말뿐입니다. 노비들의 증언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선례가 이번에 만들어지면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길도 영영 막히는 것입니다."

왕무가 왕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시대에 노비 문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왕무도 평소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래서 호족들이 하는 행동의 진의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역시 결혼을 하길 잘 했어.'

나는 흐뭇한 심정으로 왕무를 바라보았다. 왕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윤의 말이 옳다. 다만 거짓말에 대해 거론하지 않은 걸 보면 황보제공은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거고. 어쨌든 지금 길명이 하는 말의 진위를 가리기 애매한 상황이다. 그런데 덜컥 유긍달 등의 제안을 받아봐라. 그러면 말의 진위를 가리기 애매하면 노비들의 증언은 거짓말로 본다는 게 선례가 된다. 거기에 노비를 해방시키려면 몸값을 꼭 지불하라는 선례가 만들어지는 것도 문제다. 돈을 주고 노비들을 풀어주면 왕실 재정을 써도 불과 수천 명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왕건이 탄식하며 말했다. 왕건도 나름대로 노비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여러 방책을 썼다. 몸값을 주고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방책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결과는 왕건이 말한 대로였다. 재정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한정적이었다.

"쩝쩝, 소신도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딱히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 문제 하나를 가지고 며칠 동안 고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점심을 다 먹으면 결론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잡찬, 좌승이 내놓은 해결책 외에는 딱히 답이 없습니다."

김악이 젓가락으로 전 하나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김악도 대내학사로서 나름 예리한 면이 있었다. 딱히 대안이 없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궁예가 쇠방망이를 휘두른 이유가 있었다. 진짜 이런 식이면 나도 참나무로라도 방망이를 하나 깎아서 가지고 다니든가 해야지. 아니 이런 못된 사람들이 있나? 응. 정말 어쩜 이럴 수가 있어?"

김악의 예리한 일침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왕건이 속이 끓는지 그리 중얼거렸다. 왕건이 생각해도 딱히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보던 김악이 조심스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궁시렁거리던 왕건이 먼저 최언위를 보며 물었다.

"한림원령은 뭔가 방법이 없나? 뭔가 모양새 좋게 호족들을 꼼짝 못하게 할 방법 말이야?"

"소신도 뾰족한 계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송구합니다."

최언위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왕건이 최지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지몽 역시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 참. 그래 연우야! 너는 어떠니?"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습니다."

나도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슨 책략을 쓰려고 해도 시간 여유가 있어야 해. 그런데 이 건은 며칠 시간을 끌기도 뭐한 문제라서.'

내 곁의 왕무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는 거 같았다.

"어허. 이거 참. 그나마 내 체면을 살려준 잡찬의 말대로 해야 하는가? 최소한 이번 한번은 호족들의 뜻을 꺾는 것이 좋은데."

왕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 다들 나가봐라. 혹여 나중에라도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나에게 얘기해라."

왕건이 힘없이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막사 안에 왕건만 남겨두고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처소로 향했다.

나와 왕무는 서로 손을 잡고 처소로 향했다.

"내가 보기엔 길명 그 사람이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증명할 길이 없으니 갑갑할 따름입니다. 폐하께서 길명의 말을 믿는다고 강하게 밀어붙이시면 호족들도 굴복하지 않을까요?"

왕무가 나를 보며 말했다.

"폐하의 위엄으로 억지로 일을 그리 만들면 나중에 역풍이 불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정윤 전하를 생각해서 순리대로 일을 풀려고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나는 왕무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궁예가 왕위에 올라 사람을 함부로 죽여도 몇 년 동안 호족들이 꼼짝도 못 했어. 왕건도 지금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면 막을 자가 없다. 삼한을 통일한 왕건의 위엄이 막강하니. 길명의 일도 왕건이 그냥 밀어붙이면 돼. 다만 그러면 나중에 역풍이 심하니.'

실제 역사에서 고려 광종은 진짜 호족들을 대규모로 제거하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광종이 죽고 나자 호족들이 힘을 모아 들고일어나서 해방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힘으로 잠시 억누를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아는 나로서는 합리적 방법을 모색하는 왕건의 태도가 정치적으로 더 현명하다고 느껴졌다.

"국선의 말이 맞습니다."

왕무가 내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면서 왕무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왕무의 손을 잡고 있으니 뭔가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착각이겠지. 왕무에게 너무 반했나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앗!"

"국선!"

내 비명을 듣고 왕무가 놀라서 나를 살폈다.

"빨리 폐하께 가야겠습니다!"

나는 왕무에게 그리 말했다. 나와 왕무는 황급히 왕건의 막사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갑자기 입맛이 없으니 죽을 좀 끓여 와. 여러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내 식사가 좀 늦어졌다고 알려라."

왕건이 시녀들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핑계로 시간을 좀 끌어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를 본 왕건은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웬일이냐?"

나는 시녀들이 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길명을 유심히 살피면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걸 지금 깨달았습니다."

"그래. 연우 네가 뭔가를 떠올렸구나!"

그런 나를 보고 왕건이 반색을 했다. 나는 왕건과 왕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왕건은 다시 중신들과 호족들을 소집했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모였다. 나는 왕무의 손을 잡고 한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왕건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

"길명이라는 저 백제인을 풀어줘라! 그리고 내 앞으로 데리고 와!"

왕건의 명을 듣고 군사들이 길명을 데리고 왔다.

"길명이 네 말이 옳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러므로 너는 노비가 아니다. 다만 길명 네가 내 행렬에 뛰어들어서 내가 깜짝 놀랐잖아! 자객이라도 온 줄 알았다. 그 죄를 물을까 하다가 네 절박한 처지를 고려해 죄를 묻지 않기로 했다. 길명에게 여비를 내줘라."

왕건이 길명을 가볍게 타박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폐하. 이 백제인의 말이 옳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백제인이 거짓말을 친 건지 아닌지 어찌 아신 겁니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긍달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섰다.

"관심법을 썼다."

왕건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유긍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유긍달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몸을 떨면서 물러났다. 다른 장수나 호족들의 안색도 변했다. 한쪽에 서있던 문관들도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왕건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다들 관심법 타령을 하며 사람을 함부로 죽이던 폐주 생각을 하나보군. 그러나 내 관심법은 폐주의 것과는 다르다. 자 모두 길명의 손톱을 보라!"

왕건은 직접 길명의 손을 잡아들어 보이며 외쳤다.

웅성웅성

왕건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호족들이 동요했다.

"가만 보니 손금이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김악이 나서서 말하자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손톱을 보란 말이야. 손톱을. 손톱이 짧지 않은가?"

"그렇습니다만. 앗!"

김악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하다가 신음을 흘렸다.

"내가 포고령을 보름 전에 내렸다. 그 뒤 완산에서 연회를 베풀고 쉬다가 지금 올라가고 있다. 장부를 정리하고 남쪽 호족들을 내려 보내는데 시간이 걸렸어. 그 전에 이 길명이 붙들렸다면 손톱이 이리 짧을 리가 있나? 군사들이 포로들의 손톱을 관리해줄 리도 없고, 포로가 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포로 생활을 길게 했으면 손톱이 길게 자라 부러지거나 닳았겠지. 그러나 길명의 손톱은 짧고 깔끔하다. 그러니 길명은 사흘 전에 잡힌 거지. 어떠냐? 내 관심법이?"

왕건이 좌중을 둘러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유긍달과 공직 등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국선! 국선 덕에 폐하께서 일을 해결하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왕무가 나를 보며 속삭였다.

"모두 정윤 전하의 덕입니다. 전하의 손을 잡고 가다보니 문득 손을 의식하게 됐습니다. 저는 처음에 길명의 얼굴을 보고 평민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옷차림도 그렇고 손이 깔끔해서 그런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나는 왕무에게 내가 어떻게 길명의 손톱에 주목하게 됐는지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그 와중에 김악이 나서서 외쳤다.

"아니 이건 관심법이 아닌데 폐하께서 관심법이라 하셔서 소신은 깜짝 놀랐습니다."

김악은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뭐 나만의 관심법이라 할 만 하지 않느냐?"

왕건은 그런 김악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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