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63화 (163/216)

< 163 : 문제 >

왕건이 연회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지만, 장내의 공기는 무거웠다. 호족들과 장수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왕무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나서서 무슨 말을 할 기세라 나는 왕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정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나라도 나서서 폐하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제는 다른 호족들의 도움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들로서 내가 나서야합니다! 또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왕무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확실히 노비 문제에 있어서 왕건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같은 왕족들 외엔 없었다.

나는 아예 왕무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나서도 폐하께 도움이 안 됩니다. 폐하께서도 지금 그냥 넘기시는 것을 보십시오."

삼한을 통일한 후 왕건은 호통 한번으로 견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왕건의 위엄으로도 노비들을 해방시킬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향후 수백 년간 해결을 못한 문제야.'

미래에서 온 나는 이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이 기싸움에 정윤 왕무가 나서도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내 미래지식을 총동원해도 최소 수십 년은 꾸준히 여러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무엇보다 왕무를 지켜야 해! 괜히 여기에서 왕무가 왕건보다 더 강경하게 노비들을 해방시키려는 사람임이 드러나면, 호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정윤파에 기껏 가담한 호족들도 다 떨어져 나갈 거야.'

그 생각에 나는 왕무의 손을 더 힘껏 쥐었다.

"……"

이번에는 왕무도 내 말에 선뜻 따르지 않고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무야!"

내가 그리 속삭이자 왕무도 마침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왕무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 냉수를 한잔 따라서 건넸다.

왕무는 시무룩한 얼굴로 냉수를 마셨다.

'이럴 때는 또 어린애 같아. 귀여워. 하긴 현대에서의 나이까지 합치면 내 나이가 엄청 많지. 이 시대에 떨어진 지도 벌써 7년이니. 헉! 나도 아저씨야? 그런데 왕무랑 이렇게 되다니. 왕무가 이 사실을 알면 충격을 받겠지.'

나도 술에 좀 취한 것 같았다. 중대한 일이 논의되는 순간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에휴. 어째 일리천 전투 전보다 끝난 이후가 더 긴장되고 힘든 것 같아. 일리천 전투 자체가 너무 쉽게 끝나서 그런가? 사람들이 힘이 넘쳐.'

그러면서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일리천 전투가 끝나고 삼한이 통일되면 왕무랑 알콩달콩 같이 지낼 줄 알았는데. 왜 이리 불안하지? 여전히 바쁠 것 같은 예감이…… 아니야. 설마 전쟁 때보다 더 바쁠 리는 없지. 밖에 나와 있으니까 이런 일 저런 일이 계속 터지는 거야. 아 그냥 아무 탈 없이 개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나는 그런 소원을 빌며 냉수 한잔을 따라 마셨다.

왕건도 나와 마찬가지 심정인 것 같았다. 다음날 나와 최언위, 김악 등을 불러 모은 왕건이 명을 내렸다.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군령을 엄히 내려도 고려 대군이 완산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 탈이 난다. 이 달 안으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해. 빨리 장부 정리를 해라. 장부 정리를 다 해야 돌아가지. 동남 3주의 호족들도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야지."

왕건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어제 공직의 한 수에 당해서 기분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공직을 핍박하면 호족들의 엄청난 반발을 부른다는 것을 왕건도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에서 왕건도 우선 근거지인 개경으로 돌아가서 일을 처리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문관들은 열심히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백제 조정이 비축해 둔 물자에 대한 장부였다. 나도 열심히 숫자 계산을 하며 문관들을 거들었다.

중간에 김악이 대강 취합한 장부를 들여다 본 왕건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아니 우리가 이렇게 돈과 물자를 많이 썼어? 이거 참. 상보께서 30년간 모아두신 물자인데, 이만큼밖에 안 남았다니! 지금부터라도 아껴 써야겠다. 어느 정도 남겨서 개경에 가져가야지."

일리천 전투가 끝나고 왕건은 장졸들에게 후하게 인심을 베풀었다. 견훤이 지난 30년간 알뜰하게 완산에 비축해둔 물자 덕이었다. 견훤은 나라를 세운 뒤 30년 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거기에 원래 견훤의 기반이 된 서남 3주가 농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일리천 전투도 하루 만에 결판이 나서 신검이 소모한 물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견훤이 쌓아둔 물자를 보고 신이 난 왕건이 요 며칠 인심을 쓰니 그게 벌써 바닥을 보이는 것이다.

'8만이 넘는 군사들에게 베풀어야 하니 뭐. 그건 그렇고 돈 생각을 하니 견훤에게 고마운지 상보라고 부르네.'

갑자기 다시 상보 타령을 하니 왠지 조롱 같았다.

'이제 고려에 남은 상보는 선필뿐인데. 왕건이 선필을 상보라고 부를 때마다 웃길 것 같아. 선필 본인도 그 소리를 들으면 찜찜할 걸?'

나는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맡은 장부 정리를 척척 해내고 있었다. 내가 한림원에서 일한 지도 한참 됐다. 이젠 짬이 차서 이 정도는 쉬웠다.

왕건이 개경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기 때문에 일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남쪽에서 올라온 호족들은 자신들의 군사들과 함께 속속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생했다."

왕건은 떠나는 호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격려를 해주고 견훤의 창고에서 꺼낸 물자도 쥐어주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왕건은 자신의 직속 병력과 함께 마침내 완산을 떠났다. 나와 왕무도 그런 왕건과 함께 했다.

'무사히 완산을 떠나서 다행이다.'

나는 말 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 자리에서 왕건과 공직이 기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또 뭔 일이 터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내가 장부 정리를 열심히 한 덕에 아무 일 없이 완산에서 나온 것이다. 웬만한 호족들도 거의 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이 터질 우려가 줄어든 것이다.

'자! 이대로 순식간에 개경까지 가자!'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말을 몰았다. 나주원에서 왕무와 하루종일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군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기 때문에 왕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순조롭게 웅진 인근에 당도했다.

"웅진에서 좀 쉬었다가 가자. 웅천주 출신 호족들은 여기에서 흩어지자."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웅진이 이 시대의 주요 도시 중 하나고 교통이 편리했다. 웅천주의 호족들은 여기에서 왕건에게 하직 인사를 하면 쉽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공직도 이곳에서 자신의 군사들을 매곡성에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공직 본인은 고려의 좌승으로서 개경까지 따라오고 휘하 사병들은 공직의 아들들이 인솔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공직도 좀 돌아가면 좋을 것을. 아니야. 공직이 매곡성에 가 있으면 더 불안한가? 하여간.'

그런데 갑자기 왕건을 호위하는 행렬의 한쪽에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가 폐하 쪽으로 침범해 들어온다!"

"막아랏!"

왕건의 근위병들이 그런 고함을 쳤다.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자객이라도 온 거야?'

얼핏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와 왕무 주변의 근위병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들더니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호위를 맡은 군관이 왕건 앞으로 달려와서 보고했다.

"괴인 하나가 행렬을 침범해서 사로잡았습니다."

"자객인가?"

왕건이 침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그건 확실히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괴인은 몸이 묶여있는 채로 행렬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폐하, 살려주십시오!'라고 계속 외쳤습니다. 몸에 숨긴 무기도 없었습니다."

군관의 보고를 듣고 왕건이 놀라서 말했다.

"나를 찾았다니? 뭔가 나에게 호소하고 싶어 온 사람이 아닌가? 데려와라!"

그사이 왕건의 행렬이 멈춘 것을 알고 여러 장수들과 신하들이 왕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여러 장수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다."

왕건이 그리 대답하는데 군졸들이 웬 남자 하나를 끌고 왔다.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이 흰 청년이었다.

'평민은 아닌데? 일을 안 해본 얼굴이야. 옷도 더러워지긴 했어도 꽤 고급이고. 그런데 왜 달려온 거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왕건도 의아한지 입을 열었다.

"너는 무슨 일로 함부로 달려들었느냐?"

왕건이 우선 가볍게 꾸짖자 겁먹은 남자는 온 몸에 경련까지 일으키며 말했다.

"폐하. 소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소인 폐하의 말만 믿고 있었는데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러니 무슨 일인지 차분하게 말을 해보라. 어이 누가 물 좀 갖다줘."

군졸 하나가 물을 가지고 오자 물을 마신 남자가 말했다.

"소인 정읍현령 밑의 속관으로 있던 길명이라고 합니다. 폐하의 대군이 완산에 오자 무서워서 소인은 우선 인근 산속에 숨었습니다. 그러다가 구할 물건이 있어 밤에 현에 내려왔다가 폐하의 포고문을 읽었습니다. 폐하께서 완산에 입성한 날 이후에는 백제를 따랐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붙잡지 않는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그걸 믿고 내려왔는데 사흘 전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소인 이대로 가면 평생 노비가 될 판이라 목숨을 걸고 폐하께 달려왔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길명은 눈물까지 흘리며 왕건 쪽으로 기어왔다. 놀란 군졸들이 길명에게 창을 들이미는데 왕건이 외쳤다.

"저 자를 다치게 하지 말라! 그리고 길명을 사로잡은 군사들은 누구의 휘하야? 빨리 전후 사정을 파악해서 보고를 해!"

왕건이 발끈한 기색으로 말했다. 자신의 포고령을 무시하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노한 것 같았다.

나는 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입맛이 썼다.

'이게 돌아가는 것을 보니 쉽게 안 넘어갈 거 같은데.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나는 내 곁의 왕무를 바라보았다. 왕무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왕건의 행렬이 멈추자 놀란 장수들과 호족들이 계속 달려왔다.

어느새 왕건 주변에는 웬만한 신하들은 다 모여 있었고, 길명의 이야기도 모두 알게 되었다. 상당히 예민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는지 호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길명은 장군 염상이 거느리는 부대에 잡힌 자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다가 군졸들을 뿌리치고 달려온 것입니다. 길명을 쫓던 염상의 군졸들을 데려왔습니다."

근위대 군관이 달려와서 그런 보고를 올렸다.

"아니 염상의 부대라고? 염상 그 사람이 왜 그랬지?"

왕건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염상은 왕건의 직계 장수였고 개국공신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부하가 이런 일에 연루되자 왕건도 놀란 것이다.

"아니 내 부하들이? 포로 관리를 맡은 군관을 데려와라!"

장수들 사이에 있던 염상이 놀라서 외쳤다. 염상 부대의 군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폐하께서 포고령을 내리셨는데 너는 그걸 몰랐느냐? 왜 사흘 전까지 백제인들을 잡아왔느냐?"

염상이 직접 나서서 부하를 추궁했다.

"어이쿠. 장군. 저는 글을 못 읽습니다. 포고령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포로들을 관리만 하지 직접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붙잡아 온 포로들을 인솔만 했습니다. 저자가 언제 붙들려왔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군관은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왕건과 염상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기실 왕건의 직계 세력은 거의 궁예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궁예가 도적 출신이었다. 근본이 그러니 왕건 휘하 직계 부대의 하급 군관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평소처럼 1만 정도의 군사를 운용했다면 입에서 입으로 왕건의 명이 전해졌을 텐데, 이번에는 10만 가까운 군사가 동원됐다. 그래서 명령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글을 몰랐다 해도 내 명을 몰랐으니 녹봉을 좀 깎아라. 그리고 길명에게는 곡식을 좀 내주고 돌려보내."

왕건이 얼렁뚱땅 일을 그리 넘기려했다. 그런데 호족들 사이에서 유긍달이 나오더니 외쳤다.

"폐하. 이 일은 저 군관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백제인의 말만 믿고 그를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교활한 저 백제인이 포고령이 내리기 전에 잡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포로가 돼서 끌려오다가 포고령을 읽고 사흘 전에 잡힌 거라고 폐하께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호족들 사이에서 유긍달에게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맞습니다. 폐하의 포고령을 악용하려는 무리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저 처지에 놓이면 무조건 포고령이 내린 뒤에 잡혔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길명이 절규했다.

"아닙니다. 포고령을 봐서 산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왕건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 가운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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