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62화 (162/216)

< 162 : 암투 >

왕건은 백제 왕궁에 들어가 연회를 베풀었다. 고려의 장수와 중신들뿐만 아니라 부장과 군관들, 거기에 고려 군졸들 중 각별히 공이 큰 사람들은 모두 백제 왕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항복한 백제의 장수들과 중신들도 모두 참여했다.

일리천 전투의 승리와 삼한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연 연회였다. 궁에 들어온 군졸들에게까지 음식이며 술이 넉넉하게 지급되었다.

"이 왕궁을 이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도 마지막이니 마음껏 즐겨라!"

왕건이 술잔을 들며 그리 말했다.

완산의 백제 왕궁은 조만간 해체될 예정이었다. 이 큰 왕궁을 유지하려면 유지비가 엄청 들었다. 그래서 해체하고 왕궁의 목재, 석재 등은 성을 수리하는데 사용할 작정이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더라도 통일이 됐는데 백제 왕궁을 그대로 남겨둘 순 없지.'

왕건은 완산에 들어와 약탈을 하거나 방화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완산을 예전 그대로 남겨둘 생각은 없었다. 그야말로 철저히 해체할 작정이었다.

이 왕궁이 곧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좀 아쉬웠다. 나는 백제 왕궁의 정원을 유심히 감상했다.

여태 군사들을 이끌고 고생을 한 고려 장수들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을 푼 것 같았다. 유금필마저도 편한 차림으로 술을 마시며 옆에 앉은 박수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장군들과 호족들은 끊임없이 왕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축하를 건넸다.

"그래, 그래. 여기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 개경에 가서 또 연회를 열어야 하니."

왕건이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으하하하."

고려 장수들은 모두 왕건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자 서남의 호걸들도 모두 와서 한잔씩 받아."

왕건은 한쪽에서 복잡한 얼굴로 앉아있는 백제 출신 호족, 장수들에게도 살갑게 말했다.

"예, 폐하."

그러자 박영규를 필두로 백제 출신 호족들도 일제히 왕건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술을 받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눈을 빛냈다.

'이젠 박영규가 서남 3주의 대표가 된 것 같군. 백제 출신 인사들이 뭘 할 때 박영규가 항상 가장 먼저 움직이고 있어. 유긍달이 이 박영규의 가문과도 혼사를 맺었지. 참 유긍달도 대단한 게 혼인만으로 자연스레 자기 외손자가 왕이 될 수 있게 구도를 다 만들었어. 이걸 어떻게 막지?'

그런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내 곁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먹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너무 갑작스레 연회를 여셨습니다. 그래서 소장이 먹을 걸 못 챙겨왔습니다."

박술희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들었다 놨다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냥 먹지 음식을 가지고 저러다니? 그냥 확.'

다만 이번 전투를 통해서 박술희는 정치적으로 정윤파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무가 고려군 선봉 1만 명을 빈틈없이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련한 박술희의 도움이 컸다. 1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면서 왕무와 박술희는 몇 달간 호흡을 맞췄다. 이 과정을 거치며 왕무와 박술희는 두터운 친분을 쌓고 정치적 동지가 된 것이다.

'애초에 왕건이 박술희를 왕무에게 붙여줄 의도기도 했고.'

그나마 실제 역사에서 왕무가 빈약한 세력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박술희의 힘 덕이었다. 군부 내에서 박술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박술희를 바라봤다.

"내가 나중에 장군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 때는 꼭 장군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참으십시오."

왕무는 박술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를 기대하겠습니다."

박술희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더욱 떨떠름한 심정이 되었다.

'왕무가 연회를 베풀면 나도 참석을 해야 해. 아니 그럼 내가 이상한 곤충들을 밥상에서 계속 봐야 한다는 거잖아! 박술희가 왕무의 심복이 됐으니 자주 봐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으, 왕건은 하필 박술희를 왕무에게 붙여줘서. 물론 왕건이나 유금필 다음 세대의 장수들 중에 박술희가 으뜸이긴 해. 외척 출신도 아니고. 도움은 확실히 되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 난감하네.'

그런 내 곁에서 왕무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연우야. 이제는 일통삼한의 대업도 이뤄졌어. 앞으로는 매일 같이 있자. 널 나주원에 혼자두지 않을 거야!"

나는 왕무의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 나도 그간 왕무와 많은 시간을 못 보내는 것이 제일 아쉬웠다. 그런데 왕무가 때마침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이다.

'왕무를 위해서라면 박술희를 위해 곤충 밥상을 마련해주는 일도 괜찮을 것 같아. 맞아. 지금 메뚜기가 제철인가?'

내가 직접 메뚜기를 잡아서 튀겨주면 감동받은 박술희가 왕무에게 더 충성을 바칠 것 같았다. 그때 왕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좌승 공직은 앞으로 나오라!"

연회 자리에서 왕건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했다. 나는 메뚜기 생각은 잠시 관두고 왕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직이 나와서 왕건에게 예를 올렸다.

"예, 폐하."

"좌승이 매곡성의 군사들과 함께 나에게 귀부해서 고려에 큰 힘이 됐다. 다만 그 때문에 좌승의 자식들이 심한 고초를 겪어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내가 공직 그대의 자식을 구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지. 이제 대군과 함께 완산에 입성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왕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좌승은 공직이 고려에서 받은 관직이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왕무에게로 돌렸다.

'저거야 뭐 당연한 일이지. 백제가 망했으니 공직의 자식들을 구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야. 다리 힘줄이 잘려서 치료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대호족인 공직은 그런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니.'

그냥 순리대로 풀릴 일이라 나는 왕무의 얼굴이나 감상하기로 했다. 왕무는 박술희며 군부의 여러 장수, 군관들과 계속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탕하고 약간은 거친 장수의 모습이 언뜻 엿보였다.

'나말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저런 얼굴도 하는구나.'

같은 왕무인데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 모습이 낯설어서 오히려 좋았다.

'평생 왕무는 얼굴만 봐도 재밌겠어.'

그 사이 왕건은 공직의 자식들을 구하기 위한 일을 신속하게 진행시키고 있었다.

"견훤이 공직의 자식들을 고문한 뒤 노비로 삼았다고 들었다. 누가 데리고 있는가?"

왕건이 백제 출신 호족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신이 매곡성주의 자제 분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그대 이름이?"

"분령군의 강량이라고 합니다. 폐하."

강량이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공직의 아들, 딸은 잘 있나?"

"그것이……원래 그분들을 귀빈으로 대우해야 맞는 일이지만, 견훤의 눈치를 봐야 해서 일을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니 농장에서 새끼줄을 꼬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래도 제가 뒤로 은밀히 제 노비들에게 그분들의 수발을 잘 들라고 명을 내려놨습니다. 지금은 귀빈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분들에 관해 말씀을 올리려고 했는데 기회를 못 잡아서."

강량이 두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이 일로 생색을 좀 내고 싶은 거 같았다. 이미 공직이 왕건에게 항복할 무렵 많은 사람들이 고려가 대세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강량도 공직의 자식들을 노비로 데리고 있으면서 나름 보살펴 준 것 같았다.

"잘 했다."

왕건은 강량을 그리 칭찬했다.

짝짝짝

곁에서 고려의 여러 호족들도 손뼉까지 치며 축하를 해줬다.

"자 그럼 좌승 공직의 자제들은 그냥 돌려보내야지. 안 그래?"

왕건이 말하자 강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 했다.

"당연한 일……"

그때 공직이 불쑥 끼어들더니 말했다.

"잠깐 그 일은 그리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식들을 구하는 일을 두고 공직이 그리 말하자 좌중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왜 저래? 술을 너무 마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황보제공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좌승. 너무 취하신 것 같구려. 당신의 자식들을 빼내오는 겁니다. 당신 곁으로 자식들이 돌아온다고요. 술이 약하시구려."

황보제공이 공직 곁에 다가가서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을 해줬다.

"황보 공, 나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공직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공직이 왕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소신의 자식들을 챙겨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소신은 고려의 좌승으로서 국가의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제 자식들은 어쨌든 한번 노비가 되었습니다. 강량 공이 그냥 제 자식들을 해방시켜주면, 노비들을 그냥 해방시켜주는 잘못된 선례가 만들어지는 셈입니다. 한번 이런 선례가 만들어지면 나중에 여러 공신, 호족들도 자신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그냥 풀어줘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 중신들이 제 자식들을 풀어주는 일에 찬동하면, 나중에 가서 자신들의 노비들을 지킬 명분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국가의 법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공직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앗!"

황보제공은 놀라서 입을 막았다. 공직의 말을 듣고 뭔가 느낀 것이다.

나도 놀라서 왕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왕건은 당황한 얼굴로 공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직의 말이 옳았어. 왕건이 술수를 부린 거야. 왕건이야 국왕으로서 어떻게든 내전 와중에 늘어난 노비들의 숫자를 줄이고 싶겠지. 그래서 술자리에서 짐짓 공직의 자식 이야기를 꺼낸 거군. 취한 상태에서 호족들이 모두 이 일에 찬동하면, 왕건은 나중에 반드시 이때 일을 선례로 삼아서 다른 노비들도 해방하라고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직이 이를 눈치채고 왕건의 속내를 폭로한 것이다. 공직의 말을 듣고 다른 호족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왕건을 바라보았다.

"공, 공직……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 나는 그리 깊게 생각을 안 했는데. 어쨌든 자식들을 구하면 좋은 일 아니야? 안 그래? 아니 그럼 좌승은 자식들을 그냥 내버려둘 건가?"

"그건 아닙니다. 소신은 당연히 소신의 자식들을 구할 작정입니다. 강량 공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고 말입니다."

공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왕건은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 말했다.

"설마 좌승은 자식들에게도 가격을 매길 작정인가? 그래 그러면 얼마를 매길 건가? 어떤 가격을 매기든 체면이 손상될 텐데?"

"하하하. 소신이 무정하다고는 하나 자식들에게 가격을 매기겠습니까? 일찍이 백제 장군 구도의 아들 단서가 유금필 대장군에게 사로잡혀왔습니다. 노비가 된 단서를 소신이 샀습니다. 그 단서와 소신의 자식들을 교환하면 됩니다."

공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

공직의 말을 듣고 왕건은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장내에 있던 공신과 호족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히 있던 유긍달이 문득 입을 열었다.

"좌승의 말이 옳습니다. 실로 국가의 법도를 지키면서 일을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폐하께서 일리천에서 사로잡은 3천명의 포로를 석방한 것이야, 큰 전쟁이 끝난 참이고 또 그들이 공식적으로 노비가 되기 전이니 법도에 맞습니다. 허나 한번 노비가 된 사람을 함부로 풀어주는 일은 안 될 일입니다."

"좌승의 말대로 하십시오."

황보제공이나 다른 호족들도 유긍달을 거들었다. 왕건은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정신이 혼미하다. 이럴 때 중요한 나랏일을 보면 실수를 할 거 같아. 자 술이나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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