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 완산 >
왕건은 차분하게 몇몇 지시를 내렸다. 왕건은 신검에게 관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양검, 용검 형제도 유배만 보냈다. 극소수의 백제인들만 처벌받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막사 안의 고려 장수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신검에 대해 걱정하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견훤을 그리 보내버린 것을 보면 왕건이 뭐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나도 그리 생각하면서 왕건에게 굽신거리는 시늉을 했다. 견훤을 한방에 보내버리는 왕건의 모습을 보니 나도 쫄 수밖에 없었다.
"곧 완산에 입성할 것이니 장수들은 모두 부대를 정돈하라! 완산의 무리들에게 우리 고려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
왕건이 그런 당부를 했다.
"명을 받듭니다."
"박영규 등이 우리에게 항복했는데 그 군세가 얼마나 되지?"
왕건이 왕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영규 등은 고려 좌군에게 항복했다. 좌군을 이끌던 견훤이 그리 됐으니 이젠 왕무가 좌군의 주장이 됐다. 그래서 왕건이 왕무에게 묻는 것이다.
'왕무가 좌군을 이끌고 완산에 입성하게 됐구나.'
견훤이 약간 불쌍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게 나에게는 기뻤다.
"박영규 및 백제 장수들이 거느린 군사가 족히 2만은 됩니다. 그들은 완전히 우리의 통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일리천에서도 열심히 싸웠고 그 이후에도 좌군의 명대로 움직였습니다."
왕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정윤의 고생이 컸다."
왕건의 그 말에 왕무가 잠시 움찔했다. 고려 좌군이 거둔 공은 거의 견훤 덕이었다. 그런데 왕건은 교묘하게 견훤을 지워버리고 모든 공을 왕무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순수한 면이 있는 왕무는 마음이 무거울 것이다. 견훤의 공이 자신의 것이 됐다고 기뻐할 왕무가 아니었다. 왕무가 무슨 대답을 할지 나는 조마조마했다.
"모두 폐하의 힘입니다."
왕무는 그리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왕무도 많이 성장했구나.'
나는 왕무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왕무는 저 짧은 대답 하나로 견훤의 공을 빼앗지도 않고 왕건을 거스르지도 않으며 빠져나왔다. 저 대답이 딱히 아첨도 아니었다.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 정윤의 말이 옳다. 기본적으로 다 내 힘이지. 어쨌든 우리에게 항복한 백제군의 숫자가 많다. 그들의 체면을 봐서라도 우리 군사들이 완산에 들어가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아예 황산에 머물며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상을 내려주고 완산에 입성한다. 장수들은 군사들을 잘 단속하라."
왕건은 웃으면서 그런 지시를 내렸다. 왕건은 평화롭게 완산에 입성하고 싶은 것 같았다. 확실히 백제 지역 호족들이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완산을 약탈하거나 하면 그들이 분노할 것이 뻔했다. 또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사들이 딱히 고생을 하지도 않았다. 쉽게 끝난 싸움이기에 적당한 상만 내려줘도 군사들이 만족할 수 있었다.
"명을 받듭니다."
왕건의 지시대로 하기 위해 고려 장수들은 군례를 올리며 막사를 나섰다. 나도 막사를 나가려는 왕무의 뒤에 따라붙었다. 왕무가 좌군을 수습하는 일을 거들기 위해서였다.
"한림원 소속은 모두 남아서 나를 돕도록 해라. 신검이 완산의 호적이며 여러 문서들도 바쳤는데 그걸 정리해야 한다. 완산에 들어가 오래 머무르면 좋지 않으니 그냥 여기에서 얼추 일을 처리하고 들어가야 한다."
왕건이 좌중을 둘러보며 그런 명을 내렸다.
최언위나 김악 등의 문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막사에 남았다.
'나는 왕무를 따라가도 상관없지 않나? 그냥 못 들은 척 하고 따라 나갈까?'
그러나 방금 전 견훤을 날려버린 왕건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그럴 엄두가 안 났다. 나는 왕무의 손을 살짝 한번 잡고 나선 막사에 남았다.
장수들이 떠나자 왕건은 나와 문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완산을 약탈하진 않는다고 해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견훤이 30년간 수도로 삼아서 그런지 너무 큰 고을이 됐다. 원래부터 완산에 살던 토박이들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순차적으로 고향에 돌려보내야 한다. 완산의 호적이며 창고의 장부를 보며 그들을 돌려보낼 계획을 수립하도록."
완산이 지금 규모로 있으면 구 백제 세력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왕건은 이런 식으로 완산을 해체시킬 작정인 것이다.
"필요한 호적과 장부를 챙겨오겠습니다."
최언위가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그러도록."
왕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언위와 문관들이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나가려고 하는데 왕건이 나를 불렀다.
"연우는 나랑 같이 기다리렴."
그 말을 듣고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막사에 남았다.
'나한테 또 뭘 시키려고.'
문관들이 다 나가자 왕건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 내가 견훤을 혼내줄 때 연우 너의 공도 컸다."
"예? 아니 제가 뭘?"
나는 기겁을 했다. 왕건 본인이 한 일을 가지고 나까지 엮으려 드는 그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나는 왕건의 공범이 아니야! 물론 견훤의 모습을 보고 방조하긴 했지만.'
그 생각을 하니 나도 양심에 찔리긴 했다.
"내가 견훤과 대화를 나눌 때 정윤비인 연우 네가 곁에 있어서 견훤이 속은 거지. 정윤비인 네가 있으니 후대까지 잘 대해줄 거라 생각한 거다. 하하하. 거기에 네가 견훤을 데려오지 않았니? 결국 연우 네 공이 컸다."
왕건이 끝까지 나를 이 일에 엮었다.
"그런데 견훤을 친다고 해도 굳이 지금 칠 필요가 있었습니까? 좀 몇 달은 있다가 쳤다면……"
견훤이 워낙 위협적인 인물이라서 견훤을 친 것 자체는 이해가 갔다. 다만 일리천 전투가 끝나자마자 이러니 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왕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아니 견훤을 치다니? 내가 언제 견훤을 쳤니?"
"예? 분명 방금 전에?"
시치미를 떼는 왕건을 보고 내가 놀라서 묻자 왕건이 입을 열었다.
"견훤을 입으로 혼내준 거지 언제 쳤다는 거니? 입을 썼지 손은 안 썼다. 내가 손바닥으로 견훤 등판을 쳐서 등창을 터뜨린 게 아니지 않니? 음, 연우 너는 견훤을 칠 생각이 있었던 거구나. 참 무섭다. 견훤이 칠십 노인인데 어찌 그런 생각을? 나야 그냥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견훤을 꾸짖었을 뿐이야."
그런 왕건의 모습을 보니 나는 속이 끓어올랐다.
'나도 견훤처럼 등창을 앓았으면 지금 터졌을 거 같아.'
화가 난 내가 물었다.
"견훤의 등창이 터지지 않았다면 그냥 견훤을 내버려두실 작정이셨습니까?"
"그렇지. 견훤이 나를 위해 여러 일을 해줬는데 도의상 내가 어떻게 손을 쓰니? 다만 입으로는 견훤을 계속 꾸짖을 수도 있지. 견훤이 연약해서 충격을 받아 꾸짖음 한 번에 무너진 거다. 나는 그런 것도 다 이겨냈어. 예전에 폐주 시절에 폐주가 나더러 갑자기 반역자라고 추궁한 적도 있었다. 나는 폐주 밑에서 그 일을 당하면서도 몇 년이나 버텼는데. 견훤은 한번을 못 버티니. 쯧쯧."
왕건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왕건 본인이 궁예 시절에 비슷한 일을 겪었지. 최고권력자에게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고통이 큰지 알아서 견훤에게 계책을 베푼 거야. 견훤의 나이나 건강상 도무지 못 버틴다는 확신이 있었겠지. 왕건도 그때는 젊어서 버텼지 지금 나이였으면 궁예 밑에서 못 버텼을 걸.'
나는 이 말을 왕건에게 할까 하다가 무서워서 관뒀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왕건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연우 네 공을 내가 잊지 않으마. 다만 이 일은 기밀을 지켜야 하는 일인걸 알지? 남궁에서 견훤과 했던 대화를 굳이 글로 써서 남기거나 남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알겠지? 연우 네 공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비로소 나를 남긴 왕건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런 식으로 입막음을 하려고 하는구나. 다만 내 공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대가를 주겠다는 건데. 에라 모르겠다.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잖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 그리고 견훤의 처자들이 살고 있는 남궁도 비워야겠구나. 그 부지를 다른데 써야지. 그래도 견훤의 공이 크니 그 막내아들은 살려줘야지. 적당한 저택 하나를 마련해서 견훤의 처자들은 잘 먹고 잘 살게 해줘라. 연우 네가 그들을 살펴라."
왕건이 그런 식으로 일을 나에게 떠넘겼다.
"예. 폐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도 왕건이 견훤의 처자는 살려주려는 것이다.
'남궁에서 왕건과 만날 때 능예가 철없는 모습을 보여서 산거다. 괜히 똑똑한 척 했으면 이리 좋게 안 끝났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사의 문이 열리더니 문관들이 들어왔다. 밖에서 호적과 장부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일을 처리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나에게 반드시 물어봐라."
왕건은 흡족하게 웃으며 문관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나도 문관들 사이에 껴서 완산의 호적을 살피는 일을 시작했다.
"만세! 만세!"
고려군이 완산에 입성하자 길가에 완산 백성들이 몰려나와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왕건은 선두에서 그런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왕무와 나란히 말을 타고 그런 왕건의 뒤를 따랐다. 감개무량하긴 했다. 이로써 삼한통일이 완벽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견훤이 그리 됐다고 해도 완산 백성들을 지켜준 것을 보면 왕건이 어느 정도는 성군 비스무레한 존재이긴 해.'
도무지 왕건=성군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어서 성군 비스무레한 존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을 환영하는 완산 백성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려군 밑에 옛 신라출신 군사들도 많았다. 그들이 서라벌의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 완산 백성들은 큰일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이 미리 군령을 내린 덕에 고려 군사들은 완산 백성들의 민가를 침범하지 않고 행군만 했다.
그리고 백제 왕궁 앞에 당도한 왕건이 말을 멈추더니 외쳤다.
"일리천에서 사로잡은 백제 군사들을 데려오라!"
일리천 전투에서 끝까지 맞서 싸우던 백제 중군 병력 중 3천명이 넘는 군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포박당한 백제 포로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왕궁 앞에 끌려왔다.
"너희들은 갈 곳이 있느냐?"
왕건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포로들에게 물었다.
"예, 고향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왠지 미리 교육을 받은 것 같은 포로 20여 명이 나와서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 그럼 이들을 다 풀어줘라. 고향으로 돌려보내. 완산의 창고에서 이들이 고향까지 갈 식량을 내주도록 하라."
왕건의 말이 떨어지자 고려 군사들이 백제 포로들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선두에 서 있던 백제 포로들이 모두 큰절을 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3천명에 이르는 백제 포로들이 모두 왕건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포로라서 노비가 돼도 할 말이 없었는데 왕건이 선뜻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다 풀어준 것이다.
왕건은 그들의 절을 받고 말 위에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웃고 있었다. 왕건이 웃으면서 다음 명을 내렸다.
"오늘 이후로는 구 백제령 전역에서 설사 포로를 잡더라도 노비로 삼지 않는다. 이 포고령을 백제……아니 서남 3주의 각 군현에 보내라!"
고려군 주력은 왕건과 함께 완산에 입성했지만, 다른 부대들은 백제 전역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부대로 나뉘어 각 군현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런 고려군에 저항하는 백제 지방군도 있었다. 백제 전역에서 소규모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건이 이런 포고령을 내리면 백제 지방군도 순순히 투항하겠지. 화합의 효과도 있고.'
얄미운 면이 있긴 해도 왕건이 확실히 성군 비스무레한 존재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