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 황산 >
신검이 직접 이끄는 중군은 끝까지 싸웠다. 그래도 백제를 지키려는 군사들이 있긴 있었다.
"이미 싸워봤자 의미가 없는 것을……너무 많은 사람이 죽다니 유감이다."
어느새 왕건은 안 울었던 것처럼 눈물을 다 닦아내고 나서 중얼거렸다. 왕건은 그간 전투에서 적군에게 한번도 동정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례적으로 왕건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왕건의 마음속에선 삼한통일이 이루어졌고, 이젠 백제 사람들도 남이 아닌 것 같았다.
일부 백제군이 열심히 싸우기는 했지만 이미 신검이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검도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백제군의 진영에서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퇴의 신호였다. 신검과 그를 호위하는 일부 기병들이 퇴각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신검의 모습을 보고, 끝까지 싸우던 백제 중군도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신검을 따라가지 못한 백제군은 속속 항복하기 시작했다.
"됐다!"
그 모습을 보고 김악이 환성을 질렀다. 마침내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얼굴을 굳힌 채 몸을 일으켰다.
"선봉을 거느린 유금필과 좌군의 견훤에게 전령을 보내라! 기병을 앞세워서 신검을 추격하라고 해라! 반드시 신검을 잡아야 한다. 신검을 죽여서는 안 돼! 우군의 홍유에게도 전령을 보내라. 홍유는 우군과 군소호족들의 보병을 이끌고 전장을 수습한다. 우리도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신검을 잡아야 한다!"
왕건의 명이 떨어지자 중군의 장수들이 속속 움직일 준비를 했다.
"폐하! 저도 추격에 함께 나서야 합니까? 문관들은 홍유 장군님 밑에서 전장의 뒷정리를 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김악이 그리 물었다.
"신검의 항복을 받을 때 의례나 예법을 어찌 할지 정하려면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또 그 역사적인 순간을 잘 봐뒀다가 기록으로 남겨야지. 서둘러라!"
왕건의 독촉에 김악과 문관들도 허겁지겁 말에 올라탔다. 다만 나는 잠시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었다.
'뭔가가 이상한데? 왜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김악이 내 곁에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서두르십시오. 폐하께서 마음이 급하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문관들과 함께 말에 올라타 추격을 시작했다.
"어이쿠, 이미 다 끝난 싸움인데. 신검 이 녀석은 언제까지 도망을 칠거야? 힘들어 죽겠구나!"
내 곁에서 김악이 그리 투덜거렸다. 다른 문관들도 지친 기색이었다.
'이 정도면 천천히 추격을 하는 건데. 견훤과 유금필이 열심히 뒤쫓고 있으니 왕건의 중군은 속도를 높일 필요가 없지. 뭐 여러 차례 실전을 거친 나와 문관들의 실력 차이겠지.'
힘들어서 숨을 몰아쉬는 문관들과 달리 나는 여유롭게 말을 몰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언제 이 추격전이 끝날지도 알고 있으니 기약 없이 계속 말을 모는 문관들과는 상황이 달라. 신검이 황산에서 겨우 포기하고 항복한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내 예상대로 왕건의 중군이 황산 근처에 당도하자 전령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신검이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신검과 백제 중신들은 유금필과 함께 왕건의 진영에 왔다. 신검은 유금필의 부대에 항복한 것이다.
신검은 고상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다만 이렇게 항복해야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왕건은 나름 신사적으로 신검을 맞이했다.
"군영 한쪽에 신검과 백제인들을 머물게 하라. 예의를 갖춰 대접하라."
왕건은 그런 명을 내린 뒤 자신의 막사에 장수들을 모았다. 항복한 신검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신검을 어찌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왕건이 말했다.
그런 왕건을 보고 유금필이 조심스레 나섰다.
"신검이 나름 군재가 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제군 중군은 끝까지 저항했는데 이는 신검이 군내에 신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검은 일리천에서 달아나면서도 어떻게든 방어선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끈질긴 사람입니다. 상보께서 고려에 오셨기에 우리가 신검을 쉽게 이긴 것입니다."
유금필의 의도는 명백했다. 신검이 죽이자는 소리였다.
"허허. 이거 참. 이제 삼한이 통일됐다. 항복해 온 신검을 죽인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이제는 덕치를 베풀어야 할 때다."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왕건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왕건이 평소와 너무 다른데? 갑자기 성군이 됐어! 역시나 삼한을 통일하고 나자 마음이 변한 건가? 눈물을 흘린 것도 그렇고 죽어가는 백제군에게 동정을 표한 것도 그렇고. 어쩌면 내가 그동안 왕건을 오해한 걸 수도 있어.'
어찌 됐든 왕건은 역사 속에서 삼한통일이란 업적을 남긴 영웅이었다.
'삼한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너무 힘들고 위기가 많으니 왕건도 때때로 각박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거야. 이제 삼한을 통일했으니 마음이 바뀐 거고. 삼한통일 이후에는 역사서에 기록된 것처럼 성군이 된 거야.'
나는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부처처럼 차분한 미소를 짓는 왕건의 모습을 보니 비로소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실감됐다.
다만 장내의 고려 장수들은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모든 장수들이 유금필과 비슷한 의견이었는데 왕건이 저리 나오는 것이다.
그 와중에 군졸 하나가 막사 안으로 달려오더니 외쳤다.
"상보께서 정윤 전하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고려 좌군도 중군에 합류한 것이다. 그리고 견훤과 여러 장수들이 왕건의 막사에 들어왔다. 견훤 바로 곁에서 왕무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왕건도 이제 부처님처럼 변했고 평화가 왔어. 어느 정도 기반도 다져놨고. 이제 왕무와 함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왕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도 그 이후 여러 일이 터져서 같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그 고통도 끝날 것 같았다.
견훤은 왕건 바로 곁에 놓인 의자에 자연스레 앉았다. 왕무는 그런 견훤 바로 아래쪽에 앉았다. 다른 장수들도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소란이 이는 틈에 은근슬쩍 왕무의 곁에 가서 앉았다. 이제는 전투도 끝났고 편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내가 옆에 오자 왕무는 환하게 웃었다.
다만 행복해진 우리 부부와 별개로 장내의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견훤이 오니 고려 장수들은 더 입을 열기 힘들어졌다. 견훤 앞에서 아들인 신검을 죽이자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장수들을 보고 왕건이 입을 열었다.
"옛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그때 당나라 조정이 의자왕을 꾸짖긴 해도 죽이지 않았다. 관직도 내리고 저택도 내려줬다. 아니 다른 나라인 당나라도 그리 했는데, 내가 신검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왕건의 말을 듣고 견훤도 어떤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견훤이 침통한 듯 두 눈을 감았다.
"……"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장수들이 신검을 죽이자고 주장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순간 견훤이 눈을 뜨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 신검을 도려내십시오. 신검 때문에 저는 병이 깊어져서 오래 못 살게 됐습니다. 제 한을 풀어주십시오. 제 아들로 남아있는 것은 능예뿐입니다. 어리고 무능하긴 하지만 효심이 깊은 아이입니다."
견훤의 말을 들은 장내의 고려 장수들은 모두 반색을 했다.
"상보!"
김악이 감격해서 견훤을 향해 외쳤다. 고려를 위해 견훤이 어려운 말을 해준 것이다. 견훤이 이리 나서주면 고려 쪽에서도 명분이 섰다. 별 부담 없이 신검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견훤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군사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계속 살아 있다가 반란 같은 거라도 일으키면 견훤의 막내인 능예도 연루되어 죽겠지. 견훤이 자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능예는 살리려고 하는군.'
막사 안의 사람들은 모두 왕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왕건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이다.
견훤의 말을 듣고 왕건은 몹시 묘한 표정으로 견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순간 왕건이 고함을 쳤다.
"견훤! 네 이놈! 참으로 모질고 악하구나! 그래도 신검이 네 아들이거늘 아들을 죽이자고 권한다는 말인가? 또한 감히 신하인데 내 곁에 나란히 앉다니! 견훤의 너의 무례를 내 용서치 않으리라! 어서 장수들 사이로 돌아가라!"
왕건의 말을 듣는 순간 장내의 모든 고려 장수들은 크게 놀랐다. 제일 충격이 큰 것은 견훤 같았다.
왕건의 말을 들은 견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비틀거리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왕건을 바라보았다.
왕건은 그런 견훤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나도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장수들과 달리 나는 남궁에서 견훤과 대화를 나누는 왕건을 자주 수행했다. 그래서 왕건이 얼마나 살갑게 견훤을 대했는지 다 지켜봤다. 그런데 왕건이 갑자기 이러자 나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게 왕건의 진심이었어. 그동안 견훤의 도움을 받아야 백제를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니 견훤을 예우한 거고. 다만 이론상 그렇다고 쳐도 1년 넘게 견훤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리 지냈는데……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왕건이 내지른 고함 한 번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래 내가 일리천 전투가 끝난 직후에 이상함을 느낀 이유가 있었어. 왕건은 견훤이 온 뒤에 견훤이 없는 자리에서도 항상 상보라고 불렀어. 한림원에서도 그렇고 나와 대화를 나눌 때도 그렇고. 그런데 전투가 끝나자마자 전령에게 명을 내릴 때 견훤을 견훤이라고 불렀어.'
그 사이 견훤은 장수들의 대열로 내려가라는 왕건의 명을 따르려는지 아래로 내려갔다.
콰직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서 장내의 사람들이 두리번거렸다.
"등, 등이……"
군졸 하나가 견훤의 등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견훤의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견훤이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흘러나올 정도였다. 견훤은 등창을 앓고 있었는데 그게 엄청난 충격을 받자 터진 것이다.
'미래 역사를 다 보고 온 나도 경악했는데. 견훤이 받은 정신적 고통은 더 엄청나겠지. 그래서 등창이……'
그런데 하필 견훤은 비틀거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 정윤비!"
나는 견훤이 왜 내 쪽으로 다가오는지 깨달았다. 나는 남궁에서 왕건과 견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견훤은 모든 것을 아는 나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증인이라도 서달라는 눈빛이었다.
"어, 어?"
나는 당연히 견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다가오던 견훤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의원을 불러라. 견훤을 치료한다."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왕건이 명을 내렸다. 의원들이 허겁지겁 들어와 견훤을 갑옷을 벗기고 등창을 살폈다.
"위중하십니다."
의원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인근에 절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서 견훤이 요양할 수 있게 하라. 군영에서는 병을 보살피기 힘들 것이다. 죽으면 절에서 알아서 장례를 치르면 된다."
왕건은 담담한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예."
건장한 군졸 하나가 견훤을 업고 물러났다. 그리고 왕건이 문관들 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견훤이 참 신검에 대한 한이 깊었던 모양이야. 내가 부탁 하나 안 들어줬다고 저리 되다니. 후세에는 이렇게 적어서 전하면 되겠지?"
"폐, 폐하. 그것은……"
김악이 이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서 뭐라 말하려 하는데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김악아. 네가 보고 들은 그대로 기록하면 된다. 견훤이 신검을 죽이라고 권했고 내가 안 들어주니 견훤이 등창이 터져 죽은 것 아니냐? 내가 유학자로서의 지조를 꺾으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니?"
그 말에 김악도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확실히 왕건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보고 들은 대로만 쓰면 왕건이 말한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