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 일리천 >
'확실히 김순식이 이번에 군사를 3천명이나 끌고 온 건 얄밉긴 해. 평소에는 6백명 정도 보내다가 일이 잘 풀리니 허겁지겁 달려온 격이니.'
김순식이 우리 편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넘어가는 거지, 내가 황보제공 입장이었다면 더 분노했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황보제공이 왕건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흠, 그대들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런데 내가 꿈을 꿔서."
왕건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꿈이라면?"
강경 발언을 해놓고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왕건의 반응을 기다리던 황보제공이 당황해서 반문했다.
"아니 꿈에서 고승 한분이 나타나서 소매를 휘저으며 3천명의 기병들을 나에게 주고 떠났어. 무슨 꿈인가 했는데 과연 김순식이 3천 군사를 데리고 이리 오는군."
왕건이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
황보제공과 패서 호족들이 뭐라 답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어떤가? 내 꿈이 신통하지 않는가? 내가 천명을 받아서 그런가?"
왕건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맞장구를 쳤다.
"과연 폐하께서 천명을 받으셔서 꿈도 백발백중입니다. 척후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
천명 얘기가 나오자 황보제공과 패서 호족들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김순식을 견제한다고 계속 나서면, 왕건이 천명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왕건이 달래듯이 말했다.
"공산 전투 이후 내가 고단한 처지에 놓였을 때 김순식이 입조하고 군사를 지원해서 내가 버텼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보리 한 되를 준 격이다. 김순식이 그때 보낸 6백명이 보리 한 되와 같다. 물론 집에 곡식을 잔뜩 쌓아두고 보리 한 되만 줬다고 서운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쨌든 빚이 있으면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김순식의 공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대들의 공을 잊겠는가?"
"……김순식은 그런 공이 있다쳐도 다른 자들은 어쩌실 것입니까? 김순식은 정예한 기병을 데리고 왔다 쳐도 군소 호족들 중에는 변변찮은 훈련도 못 받은 보병을 데리고 온 자들이 많습니다."
황보제공이 묻자 왕건이 말했다.
"그 사람들도 다 오라고 해! 기껏 왔는데 우리가 돌려보내면 그 사람들이 집에 가서 불안해서 잠도 못 잔다. 보병이라도 그냥 후방에서 군사들을 데리고 서있기만 하라고 해라. 일리천에 가면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이다. 일리천에 고려의 깃발을 들고 9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 있어야 일이 쉽게 끝난다."
왕건이 뭔가 알고 있다는 기색을 풍겼다.
'백제의 박영규가 지금 왕건과 내통하고 있으니 무슨 정보를 줬겠지.'
내가 느낀 것을 황보제공 등도 눈치 챈 것 같았다. 마침내 그들도 체념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전령의 안내를 받으며 김순식이 왕건의 막사에 들어섰다.
"명주도독! 내가 신기한 꿈을 꿨는데 한번 들어보도록."
왕건은 김순식의 얼굴을 보자 넉살좋게 또 꿈 이야기를 꺼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살짝 민망함을 느꼈다.
'급조해낸 꿈 이야기를 굳이 또. 황보제공이 물러났으면 됐지.'
그런데 김순식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다니 과연 신통합니다. 소장이 출진하는 길에 고승 한분을 모신 사당이 있어서 제사를 지냈는데 폐하에 꿈속으로 그분이 달려간 모양입니다."
김순식이 왕건 앞에서 굽신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무슨 순발력이 이리 좋아? 왕건이 미리 알려준 것도 아닌데……이름이 순식이라서 그런가? 순식간에 이런 이야기를 급조해 내다니.'
그런데 김순식의 말을 들은 왕건은 너무 기뻐했다. 김순식이 맞장구를 잘 쳐서 왕건 취향의 이야기 하나가 뚝딱 만들어진 것이다.
"김악아. 빨리 이 이야기를 기록해 둬라! 다른 사람들도 나중에 내 신통함을 알아야 해!"
왕건이 대내학사 김악을 닦달했다.
"예, 폐하."
김악이 허둥지둥 붓을 들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김순식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호족들 사이에 끼었다.
황보제공은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손까지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온갖 사람들을 다 받아주며 고려군은 마침내 일리천에 당도했다. 집결한 고려군은 숫자도 많고 질적으로도 수준이 뛰어났다.
말갈기병을 제외하고도 고려 기병의 숫자만 4만에 이르렀다. 수많은 실전을 거친 후삼국 시대의 장수와 대호족들은 야전에서 기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십년 간의 내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장을 운영하며 군마를 모았기에 이만한 기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정도 기병이면 거란과도 한번 대결을 해볼 만한 전력이다.'
나는 고려군의 진형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왕건이 보내놨던 척후들이 일제히 돌아와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신검이 이끄는 백제군도 일리천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백제군의 깃발이 10리에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적의 숫자가 많습니다."
척후들의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여러 고려 장수들은 깜짝 놀랐다.
"적이 10리에 이르는 대형을 이루고 있다니. 그게 정말이냐? 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깃발만 세워둔 것이 아니냐?"
황보제공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아닙니다. 그럴까봐 조심스럽게 접근해 살펴보았는데 모두 군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척후들이 그리 대답했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척후들의 보고를 종합한 고려군 수뇌부는 신검이 이끌고 온 군사가 4만은 넘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저들이 어찌 저만한 세력을……"
홍유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다만 왕건, 견훤, 유금필만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유금필이 나서서 말했다.
"신검이 일리천에 오는 것이 상책이란 것을 알아도, 군사를 1~2만 밖에 못 모았으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숫자를 어느 정도 채웠으니 우리 고려군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백제 땅이 원래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이 많습니다. 허나 백제군이 숫자는 그럴듯해도 기병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왕건도 동요하는 장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백제 장군 박영규, 효봉, 애술 등이 우리와 내통하고 있다. 전투가 시작되면 그들이 신검을 공격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군세가 백제의 2배다. 저들이 약속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여러 장수들은 왕건이 왜 김순식과 여러 군소 호족들까지 다 받아주며 군세를 늘렸는지 깨닫는 기색이었다.
박영규 등이 내통하기로 약속했다 해도 막상 전장에서 왕건의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존재했다. 고려군의 숫자가 6~7만 수준이었다면 백제군의 세력으로 도전해볼만 하기에 박영규 등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건이 말갈 기병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받을 수 있는 호족은 모두 받았기에 일리천에 집결한 고려군의 수는 엄청났다. 고려군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박영규 등이 약속을 지킬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장수들이 감탄하는 얼굴로 왕건을 바라보는데 왕건이 군령을 내렸다.
"군사들을 중군, 좌군, 우군으로 나누어 백제군을 친다."
그리고 왕건은 미리 정해놓은 편제를 장수들에게 알려주었다.
좌군에 견훤을 배치하고 왕무와 박술희도 있었다.
'왕건은 견훤을 앞세운 좌군을 전진시켜 백제군을 무너뜨릴 작정이야. 실제 역사에서도 고려 좌군의 역할이 컸고. 왕무는 견훤을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거겠지.'
왕무가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에 갔는데 내 마음은 심란했다.
'나는 중군에서 왕건과 함께 있어야 하니 왕무와 또 못 보네. 고려 좌군이 계속 백제군을 추격하게 되는데, 그게 또 며칠은 걸려.'
이상하게 이 중요한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려군은 3군으로 편성되어 백제군을 압박해들어갔다. 나는 중군 본영이 설치된 언덕 위에 여러 장수, 문관들과 함께 왕건 곁에 있었다.
고려군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중군의 규모만 4만에 이르렀다. 왕건은 유금필과 말갈 기병들을 중군의 선두에 내세웠다. 나머지 장수들은 왕건의 본영에 대기하고 있었다. 유금필의 선봉이 불리해지면 예비대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언덕 위라서 일리천에 전개된 고려군과 백제군의 대형이 잘 보였다. 백제군도 진형 자체는 그럴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안타까워졌다.
'확실히 후삼국 시대에 훌륭한 군인들이 많이 나타났어. 신검도 나름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백제 호족들이 다 딴마음을 먹고 있으니.'
백제 호족들도 나름 사력을 다해 군사를 모아왔다. 그런데 그 의도가 백제를 지키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그냥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려는 측면이 컸다. 백제가 망하더라도 자신들이 이만한 군사를 모을 능력이 있으니, 고려 조정에서 자기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신검은 그걸 알까? 하긴 백제 호족들의 그런 의도를 알아도 어쨌든 일리천에 나오는 게 신검에게는 가장 상책이었으니.'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대치하고 있는 양군을 바라봤다.
왕건도 이 순간만큼은 딱딱한 표정으로 본영 한가운데 앉아서 언덕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왕건이 신호를 보내기만 하면 고려군이 진격하고 전투가 벌어질 판이었다.
'너도나도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게 이 일리천 전투인데, 나도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하나 얹어야겠다. 아직 숟가락을 얹을 거리가 하나 남아있어. 나도 알뜰하게 챙겨먹어야지.'
나는 왕건과 여러 장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늘이 우리 고려군이 진격할 때를 알려줄 것입니다. 그때 진격하면 삼한이 통일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거창한 예언을 하나 했다.
'역사서를 보면 일리천 전투가 벌어진 날 하늘에서 창검처럼 보이는 구름이 일어나서 백제군 진영 쪽으로 흘러갔다고 되어있다. 그 모습을 보고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서 이겼다고 적혀 있어. 물론 현대에도 하늘을 몇 시간이고 쳐다보고 있으면, 길쭉한 구름 조각이 흘러갈 때가 있지. 정직하게 말하자면 언제 어느 때나 볼 수 있는 의미 없는 징조이긴 하지만, 오늘은 삼한 사람들에게 뜻깊은 날이니까.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거겠지.'
어찌 보면 삼한통일은 왕건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서있는 8만 7천 5백명의 고려 사람들, 그리고 4만명에 이르는 백제 사람들의 소원이기도 했다. 10만이 넘는 삼한 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하늘을 바라봤고 그날의 일이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진성왕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지난 수십년간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고통이 오늘 이 일리천에서 끝나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왕건과 장수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연 역사서의 기록대로 길쭉한 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왕건이 그 구름을 바라보더니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외쳤다.
"북을 쳐라! 진군한다! 오늘 비로소 삼한이 통일된다."
군령을 내리고 나서 왕건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고려군은 북소리를 듣고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견훤을 앞세운 고려 좌군과 대치하고 있던 백제군은 고려군은 막기는커녕 오히려 신검의 중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박영규와 효봉 등의 백제 장수들이 왕건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다른 쪽의 백제군도 신검의 중군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다가오는 고려군에게 속속 투항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백제군의 좌우익이 무너지고 신검의 중군은 삼면이 포위되어버렸다.
와아아아
거센 함성을 지르며 유금필과 말갈 기병들이 신검의 중군을 공격했다. 이미 배반한 박영규, 효봉 등이 견훤의 고려군과 합세해서 신검의 측면을 치고 있었다. 신검은 유금필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도 못했다.
본영에 모여있던 고려 장수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유금필이 이끄는 말갈 기병 9천 5백기, 견훤을 앞세운 고려 좌군의 기병 1만기를 제외하면 고려군 중에 제대로 싸운 장졸들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그대로 전투가 끝나가고 있었다.
"폐하!"
그 와중에 김악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나와 고려 장수들은 그 소리를 듣고 왕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는 왕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