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 상책 >
나는 개경 교외에서 옷을 두툼하게 걸친 채 서 있었다. 드디어 왕건이 백제와의 결전을 위해 출진하는 날이었다.
당연히 나도 참모로서 종군하게 되었다. 내 곁에는 최언위, 최지몽, 김악 같은 문관들도 모두 옷을 단단히 입고 서 있었다.
고려 조정은 이번 전투로 백제를 멸망시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백제를 평정하고 나서는 군현과 호적을 정리하는 행정업무가 엄청 많았다. 여기에는 문관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래서 고려 문관들도 그야말로 총동원 됐다.
"아이고. 춥다."
내 곁에서 김악이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이때가 이미 9월이었다. 고려 대군의 식량보급을 위해 추수가 막 끝난 9월에 출진하는 것이다. 날이 상당히 쌀쌀했다.
'좀 추워도 이런 전투가 낫다.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없어.'
나는 개경 교외에 도열해 있는 고려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고려 군사들은 웃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기쁜 기색이었다. 이 전투는 이미 고려의 승리라는 것을 보통 군사들도 확신하고 있었다.
집결한 군사의 숫자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거기다가 왕건이 물자와 식량을 주며 말갈 기병까지 일종의 용병으로 고용했다.
돈을 쓴 만큼 전투가 벌어지면 이 말갈 기병들을 앞세울 것이다. 고려 출신 군사들은 잘 하면 백제까지 행군해서 함성만 지르다가 전투를 끝낼 확률이 높았다.
'원래 역사도 거의 그렇게 흘러갔고. 일리천 전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그냥 쉽게 끝났어.'
그때 군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폐하께서 오신다!"
"견훤과 김부가 같이 온다! 견훤과 김부다!"
그런 외침이 들리며 군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과연 멀리서 백마를 탄 왕건이 근위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좌우에는 견훤과 김부 역시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백제 전(前) 국왕과 신라 전(前) 국왕을 거느리고 대군을 사열하는 왕건의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미래에서 와서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또 왕건을 곁에서 보좌해서 왕건이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아는 나도 이 순간 감동받을 뻔했다.
왕건, 견훤, 김부가 나란히 달려오는 모습을 직접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내 곁에서 김악이 그리 중얼거리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창검을 든 채 도열한 장수들과 군사들은 아예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그리고 유금필, 황보제공, 황보금산, 왕식렴, 임희, 홍유 등의 장수들이 그런 군사들 앞에서 입을 모아 외쳤다.
"일통삼한!"
장수들이 유도하는 바를 알아채고 군사들도 재빨리 일통삼한의 구호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먼길을 떠나는 군사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개경 주민들도 두 손을 번쩍 들며 따라 외쳤다.
그 함성 소리 속에서 왕건이 외쳤다.
"가자!"
왕건이 신호를 보내자 북채를 쥔 군사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고려 대군은 일제히 남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문관들과 함께 왕건의 뒤에 따라붙었다.
매일 저녁마다 고려군 장수들은 왕건의 막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나 역시 참모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상황이 너무 유리한 것이다. 대호족들과 장수들은 고상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리한 고창 전투 전에는 서로 죽일 기세로 싸우던 사람들이……'
그때 모습을 알고 있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장수들 사이에서 임희가 일부러 입을 열었다.
"정윤 전하와 박술희 장군의 실력이 대단합니다. 대군이 쉽게 이동할 수 있게 길도 잘 닦아두고 군량도 넉넉하게 준비해뒀습니다. 허허허. 우리가 이리 막사에 모여도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정윤파인 임희는 은근히 정윤 왕무의 공을 강조했다.
"뭐……그렇긴 합니다."
황보제공이 몹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보제공 가까이에 앉은 유긍달, 왕식렴 등의 장수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너무 기뻤다.
'아버님이 과장된 칭찬을 한 게 아닌가봐. 저 사람들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왕무가 정말 준비를 잘했고 군사를 다루는 데는 능력이 있구나.'
그러는 사이 막사를 경비하는 군졸들이 외쳤다.
"폐하께서 상보와 함께 오십니다."
잠시 뒤 왕건이 견훤과 함께 막사에 들어섰다. 막사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는데, 왕건만은 몹시 긴장한 기색이었다.
"뭔가 실수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도 왕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대군은 천안에서 정윤 전하의 선봉과 합류한 뒤 일리천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일리천에서 서진하면 바로 백제의 수도 완산을 칠 수 있습니다."
대장군 유금필이 지도 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일리천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구미시였다.
"신검이 어찌 나올까?"
왕건이 초조한 기색으로 유금필에게 물었다.
"신검이 군사를 모아 일리천까지 나와 싸우는 것이 상책, 황산까지 나와 우리와 대치하면 중책, 완산에서 수성전을 준비하면 하책입니다."
유금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럼 신검이 무슨 계책을 쓰겠는가? 하책인가?"
왕건이 묻는데 유금필이 말했다.
"신검과는 소장이 서라벌에서 한번 싸워본 적이 있습니다. 신검은 군사를 잘 다룹니다. 아마 상책을 택할 것입니다."
유금필의 이 말에 장내에 잠시 동요가 일었다. 유금필의 예견은 그동안 백발백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유금필이 신검이 상책을 택할 것이라 말하자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왕건도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그러자 유금필이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제가 신검이 일리천까지 나오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한 것은 그러면 신검이 그나마 일전을 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싸우면 당연히 우리 고려가 압승을 거둘 것입니다! 신검이 황산까지 나오면 군사를 모을 수는 있어도 우리 고려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신검이 완산에 웅크리고 앉아있으면 군사를 모으지도 못하고 그대로 항복해야 합니다. 신검이 상책을 쓰더라도 무조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런 판이 만들어졌습니다."
유금필의 호언장담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정됐다. 그러나 왕건은 영 마음이 안 놓이는 것 같았다. 왕건이 견훤 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진성왕 이래 전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할거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중 세 사람이 가장 뛰어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견훤이 궁금한 지 물었다.
"폐주 궁예가 그 중 하나입니다. 그야말로 빈 몸으로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후에도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 연전연승했습니다."
왕건이 태연하게 말했다. 궁예의 이름이 나오자 나와 여러 고려 장수들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왕건은 그런 반응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저 역시 완산에서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견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으로 뛰어난 사람은 상보입니다. 내가 고려 군사들을 거느리고도 상보께 여러 번 패했습니다."
"허허허."
왕건의 그 말에는 견훤이 쓴웃음만 지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인정하는 장수는 바로 대장군입니다. 대장군이 없었다면 내가 상보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대장군이 저보다 낫습니다. 운주에서 그것을 실감했습니다."
견훤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높이 평가하는 세 사람 중 하나인 유금필이 저에게 무조건 이긴다고 했으니 안심이 되긴 하지만 완전치가 않습니다. 상보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상보께서 말씀을 해주시면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왕건이 간곡한 어조로 청했다. 견훤의 표정은 몹시 복잡해보였다. 기실 유금필이 신검을 높이 평가할 때부터 견훤의 얼굴이 묘해졌다.
다만 왕건의 얼굴을 보고 견훤도 결심을 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백제 땅은 풍요롭지만 적을 막을 관문이 없습니다. 백제 땅 안에서 전투를 벌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평생 계속 신라 땅에서 싸우려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신검도 이 이치를 나에게서 배웠으니 반드시 일리천까지 나와 싸우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리천까지 나온다하더라도 결과는 대장군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견훤은 말끝을 흐렸다.
신검이 상책을 택해도 무조건 지는 형국이 된 것은 견훤의 귀부 때문이었다. 견훤이 없었다면 신검의 능력으로 몇 년은 더 버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보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왕건은 견훤의 두 손을 꽉 잡더니 그리 말했다. 한결 편해진 표정이었다.
나는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그 대화를 억지로 다 들었다.
'이건 사료적 가치도 없는 대화야. 어차피 이기는 싸움인데 왕건이 혼자 긴장해서.'
이후로도 고려군은 아무 탈 없이 남하해서 마침내 천안에 이르렀다. 왕무가 박술희와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왕건을 맞이하러 나왔다.
"일리천까지 가는 길을 모두 닦아놨습니다."
"잘 했다."
왕건은 그런 왕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나는 당장에라도 왕무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천안이면 일리천과 그리 멀지 않았다. 전투가 코앞이라 분위기가 엄중했다. 부부끼리 만나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다. 거기에 편제상 왕무는 선봉이었고 나는 왕건의 중군에 속해있었다. 나도 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전투는 금방 끝나.'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왕무의 얼굴을 훔쳐봤다.
'짝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부인데 이리 만나기가 힘들어서야.'
이 상황에 나는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천안에서 왕무의 선봉과 합류한 뒤부터 매일 저녁에 열리는 회의 때는 왕무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왕건은 그대로 일리천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 와중에도 웅천주 및 동남 3주의 호족들이 속속 합류했다.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김순식의 합류였다.
"김순식이 기병 3천을 데리고 달려왔습니다. 폐하께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전령이 그런 소식을 전했다.
나와 임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기뻐했다. 김순식은 정윤파와 인연이 있는 사이인데 3천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나나 임희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김순식이 왕건, 견훤 다음으로 세다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의기양양해 하고 있는데 황보제공이 분을 못 참고 외쳤다.
"폐하.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지난 십여 년간 고려가 힘들 때 군사와 물자를 대며 고생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순식이는 그런데 그럴 때는 명주에서 눈만 굴리고 있다가 지금 일이 다 이루어지니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서 숟가락을 얹으려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김순식이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일이 다 끝나가고 힘들게 안 싸워도 될 것 같으니 이제야 기어 나오는 호족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래놓고 통일의 공신들 사이에 끼려는 속셈입니다. 폐하. 그 사람들은 내치십시오. 지금 우리 고려군의 숫자가 7만에 이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신검을 깨뜨리기에는 넉넉합니다."
황보제공이 엄청난 폭언을 내뱉었다. 나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패서 호족들 중에도 황보제공의 발언에 호응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