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57화 (157/216)

< 157 : 진군 >

견훤이 귀부한 이래 고려 조정은 계속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군세가 집결하고 있었다. 각지의 대호족들이 어느 정도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지도 드러나고 있었다.

"황주 황보 씨가 군사 2천 1백명을 모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황보제공, 황보금산 형제가 장수로서 출진하기로 했다. 유긍달은 이번 신라의 귀부 때 돈을 많이 써서 1천 7백명만 동원한다는구나. 서경의 왕식렴도 서경 방비를 위해 최소한의 군사만 남기고 1천 5백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 외에 평주 박씨, 신주 강씨는 1천명씩 숫자를 맞추기로 했다."

임희가 상산저에서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임희는 전직 병부령이기도 했고 임연객은 지금 병부경이었다. 병부의 인맥을 이용해 각 호족들이 어느 정도 군사들을 동원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임희가 거론한 호족들은 정윤파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으니 임희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평주 박씨나 신주 강씨도 대놓고 왕무 반대편에 서지는 않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유긍달, 왕식렴 등이 대세를 쥐자 바로 그쪽에 가서 붙었으니.'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임희에게 말했다.

"황주에서 그만한 군사를 모을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곳이야 원래 땅이 비옥하다. 그리고 황보제공이나 황보금산이나 무장으로서 재주가 있으니."

나는 황보제공의 얼굴을 떠올렸다. 왕건 앞에서도 항상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역시 이런 힘이 있기에 가능했다. 힘 자체는 황보제공이 유긍달보다도 강한 것 같았다.

"평산 유씨나 광주 함씨는 얼마나 동원한다고 합니까?"

나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평산 유씨는 유금필의 가문이었고 광주 함씨는 함규가 당주로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고 지금 상황을 보면 그 가문들은 우리 쪽에 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평산 유씨는 7백명을 동원한다고 한다. 광주 함씨는 1천 3백명의 군사들을 일으켰다."

"그들을 포섭하고 발해유민들과 수군의 도움을 받으면 어느 정도 싸움이 되긴 됩니다."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역사에서 왕무는 수군, 발해유민, 표천현도 없었어. 유금필도 왕무의 편이 아니었지. 상산과 광주의 군사력만 가지고 대호족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리 시달린 거고. 지금은 얼추 숫자상 상대가 가능하다.'

내 계산에 임희도 동의하긴 했다.

"연우 네 말이 맞다. 다만 그들을 확실히 제압할 숫자는 못 모았구나."

"차후에 그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엄청난 대군이 모이겠습니다."

지금 왕건의 장인들이 총동원되어 군사들을 모으고 있었다.

'왕건의 장인들이 지금 한 20명쯤 될 거야. 그 중 제일 세력이 미약한 선필도 군사 5백명은 모아올 수 있다. 왕건의 장인들이 모아오는 군사들을 다 합치면 2만은 넘을 테고. 왕건 본인도 지금 자기 직계 세력을 총동원하고 있고. 이럴 때는 왕건이 결혼을 많이 한 보람이 있긴 있어.'

그런데 왕건은 자신과 장인들의 군사만 모으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내가 임희와 대화를 마치고 나주원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데, 시녀 경란이가 달려와서 알렸다.

"대장군께서 정윤비 마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어서 모셔라."

유금필이 왔다는 소식에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경란이의 안내를 받아 유금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의 명을 받아 북방에 가게 돼서 정윤비 마마께 인사를 드리려 왔습니다."

"말갈 기병들을 데리고 오실 작정입니까?"

"과연 영민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곡식과 재물을 주고 징발해서 최대한 많은 군사를 모을 작정입니다."

유금필이 웃으면서 말했다.

"말갈 기병까지 소집하니 이제 우리 대군이 곧 백제로 진군하겠군요."

말갈 기병들은 일종의 용병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이민족 용병인 이들을 고려 내에 오래 두면 위험했기에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데려와서 써먹고 돌려보내야 했다. 왕건이 이들을 소집하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안에 전투가 벌어진다는 의미였다.

"정확합니다. 허허허."

유금필은 내 말을 듣고 기쁜 듯 웃었다. 그런 유금필을 보니 나는 안타까웠다.

'유금필만 오래 살아주면 왕무의 왕위계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텐데. 이번에도 유금필이 말갈 기병을 9천 5백명이나 모아온다고. 엄청난 대군이지. 물론 고려 내 내전에 말갈기병들을 동원할 수는 없지만. 그만한 군세를 쉽게 모아오는 유금필의 능력이 사라지게 되다니.'

이미 언급했지만 유금필은 왕건이 죽기 전에 죽는다. 수명이 다해서 죽었기에 미래인인 내가 끼어들어 역사를 바꿀 여지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도상으로는 몇 년 안 남았네.'

나는 눈앞에서 웃는 유금필을 보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금필이 언제 죽을지 알고 있는데 이리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다니 뭔가……'

예전에는 시간이 한참 남아있어서 이런 걸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이상하게 슬퍼져서 나는 겨우겨우 유금필과의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유금필이 떠난 뒤 나는 멍하니 나주원에 혼자 앉아있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왕무가 나주원에 돌아왔다.

"정윤 전하!"

나는 평소보다 더 반갑게 왕무를 맞이했다.

'왕무가 곁에 있으면 이런 복잡한 생각을 다 잊을 수 있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왕무를 껴안으며 매달렸다. 왕무도 그런 나를 껴안더니 말했다.

"오늘 상보께서 어전에 나와 군사를 일으켜 백제로 진군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보께서 그렇게까지 나오시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상보께서 워낙 강력하게 부탁을 하시니……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어전에서 마침내 백제를 치는 일이 결정된 것 같았다. 나는 왕무에게 비밀을 말해주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왕건이 견훤이랑 입을 맞춘 거야.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견훤을 완산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기로 약조를 했지. 내가 남궁에서 이야기를 다 들었어.'

왕건이 견훤을 보고 김부가 사심관이 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다가 갑자기 완산의 호구와 관리들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견훤을 완산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신호였다.

'견훤도 이런 보장이 있으니 백제로 진군할 것을 청한 거야.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고 견훤 본인이 나서서 공을 세워서 사심관 자리라도 챙기려는 거지. 그런데 운 좋게 견훤이 백제 멸망 이후 바로 죽은 거고. 왕건이 설마 사심관 자리를 주기 싫어서 자객이라도 보낸 건가? 미래인인 나도 이건 알 수 없으니. 꼭 일이 어찌 흘러가는지 두고 봐야지.'

그런 결심을 하며 나는 왕무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만 왕무의 순수한 얼굴을 보니 비밀 얘기를 해주기가 망설여졌다.

'왕건이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도 했고. 그냥 하지 말자. 괜히 왕무만 심란해져.'

나는 입을 열지 않기로 마음먹고 왕무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런 내 등을 쓸어내리며 왕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나와 박술희 장군에게 선봉을 맡기셨습니다. 선봉은 바로 출진을 해서 대군이 움직일 수 있게 준비를 해놔야 합니다. 조만간 개경을 떠나 천안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나에게 군사를 1만이나 맡기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몇 달 동안 왕무를 못 보잖아! 그건 안 돼.'

오늘만 해도 왕무 없이 유금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나마 왕무가 와서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는 왕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

"제가 내일 폐하께 정윤 전하와 함께 출전하겠다고 말씀을 올릴게요!"

나는 여러 차례 출전해서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참모로서 왕무를 보좌할 자격이 충분했다.

'오히려 함께 출전하면 하루종일 붙어있을 수도 있고 더 좋을 수도.'

"아니 그야 당연히 안 된다. 연우 네가 선봉과 함께 출진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니? 괜히 공을 탐내지 말고 얌전히 개경에 있다가 내가 주력을 이끌고 진군할 때 함께 가렴. 최언위, 김악, 최지몽 등의 문관들도 다 그때 출진할거다. 내 옆에 있다가 뭔가 애매한 일이 생기면 연우 네가 처리해야지. 정윤이 이미 선봉이라서 큰 공을 세울 수 있다. 너까지 끼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마라. 하하하."

왕건은 일언지하에 내 부탁을 거절하며 웃었다.

부글부글

나는 속이 끓었다. 왕무와 졸지에 몇 달간 떨어지게 되니 멍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왕건에게 가게 해달라고 떼를 쓸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좋긴 해도 전쟁준비를 하는 와중이었다. 평시라면 몰라도 전시에 총사령관인 국왕의 말에 토를 달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연우 네가 세운 공이 컸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남궁에 가서 상보를 만날 때마다 연우 너를 데리고 갔다. 그간 나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연우 네가 많이 지루했을 거다. 오늘은 내가 혼자 남궁에 갈테니 연우 너는 한림원 일만 마치면 돌아가서 쉬렴."

왕건이 나에게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왕건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나는 기가 막혔다.

'견훤과 무슨 비밀 얘기를 하려고 나를 떼놓고 가는 거지 뭐. 그 비밀이 뭔지도 나는 알고 있어. 확 다 말해버릴까?'

사서를 보면 백제의 장군 박영규가 이때 견훤을 위해서 고려에 항복했다. 이 박영규가 전장에 나와서 신검의 뒤통수를 쳐서 고려가 쉽게 승리했다. 그런데 박영규가 이미 항복했다는 이야기를 왕건이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한테는 그 비밀을 숨기려고 하는구나. 왕건이 일을 처리하려면 고려 중신들 중 몇 사람은 비밀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누구와 일을 처리하는 걸까? 나를 배제하는 걸 보니 나는 아니고.'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왕건이 나를 신임하고 있긴 해도 거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왕건은 자신의 비밀을 한 사람이 모두 알지 못하게 나눠서 공유하는 것이다.

심란한 마음으로 나주원에 돌아왔는데 내 처소에는 서신 한 장만 놓여있었다.

-천안에 먼저 가서 국선을 기다리겠습니다. 군무가 급해서 국선에게 서신만 남기고 떠납니다.

왕무는 그냥 떠난 것이다. 이 중요한 전쟁에서 선봉을 맡았으니 왕무도 나에게 연연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왕건이 지정한 날이 되자 그냥 훌쩍 이리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림원에서 나는 오히려 일에 매달렸다. 엄청난 숫자의 대군이 움직여야 하는 만큼 문관들도 바빴다.

대군이 지나가는 길목의 호족들에게 어느 정도의 군량을 준비할지 명령서를 내리고 행군계획을 짜고 하는 것은 다 문관의 업무였다.

나는 바쁜 한림원 학사들 사이에서 있는 힘껏 일을 거들었다. 그래야 심란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북방에서 대장군이 말갈기병들을 이끌고 개경까지 내려오면 개경 인근에만 5만의 대군이 집결하게 됩니다. 천안에는 우리 선봉군 1만 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웅천주 및 동남의 호족들도 우리 군사들이 내려가면 합류할 예정입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된다면 도합 8만 7천 5백명의 군사들이 집결할 것입니다. 엄청난, 엄청난 대군입니다!"

최언위가 손을 벌벌 떨며 왕건에게 군사들의 편제를 적은 보고서를 바쳤다. 이 대군의 규모에 최언위도 놀란 것이다. 왕건은 결국 이만한 군사를 모으는데 성공한 것이다.

왕건도 약간은 지친 기색이었다. 근 몇 달간 이만한 군사를 준비하느라 왕건도 엄청난 심력을 쏟아야했다.

"이젠 진군한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자!"

최언위가 바친 보고서를 읽은 왕건이 짧게 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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