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56화 (156/216)

< 156 : 사심관 >

최치원의 장례를 마치고 나는 바로 한림원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더 쉬는 게 좋지 않아? 태사께서 그리 떠나셨으니."

왕무는 나주원에서 나를 걱정스레 보며 말했다. 왕건은 최치원에게 고려국 태사의 관직을 추증했다. 그래서 왕무가 최치원을 태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정윤 전하. 혼자 나주원에 있으면 더 심란합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제 신라의 항복도 얼추 마무리 됐다. 왕무는 다시 군영에 나가야 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바빠졌다. 신라의 항복으로 이젠 신검의 백제만 평정하면 삼한통일이 되는 상황이었다. 군사를 준비하는 일이 급했다. 왕무도 매우 바빠졌다.

왕무도 없는 나주원에 있다보면 더 우울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왕무는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심란하기보다는 정세를 살펴야 할 때니 한림원에 가려고 합니다."

그런 왕무의 얼굴을 보고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어쨌든 왕무와 그런 대화를 마치고 나는 한림원에 왔다. 한림원의 자리에 앉는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왕무와 헤어지기 전에 했던 입맞춤이 뇌리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한동안 못 볼 것 같아서 더 절실하게 했다.

'최치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래도 되나? 아니야. 그래도 이건 일상이니까.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다만 입맞춤 하나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긴 했다.

'남자였던 내가 이러다니. 아니야.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어. 나는 그냥 임연우니까.'

이런 생각을 해도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고 무심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국 마후라 대사와 최치원 덕에.'

나는 다시 그들이 떠올라 한숨을 쉬며 한림원에서 책을 뒤적거리며 일을 하는 척 하는데 왕건이 들어왔다.

왕건의 얼굴을 살핀 나는 깜짝 놀랐다.

'오늘은 왕건의 기분이 불편해 보이는데? 최치원이 세상을 떠났으니 침통할 수밖에 없나?'

견훤이 항복한 이래 몇달 간 왕건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기색이었다.

자리에 앉은 왕건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학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정승 김부에게 서라벌, 아니 이제는 경주라고 불러야지. 경주의 사심관을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신라국왕이었던 김부의 체면을 고려해서 특권을 준건데, 다른 대호족들도 따라서 사심관 자리를 달라고 하는군. 나 참. 약삭빠른 사람들이야. 어쨌든 해달라는 대로 우선 해줘야지. 여러 주요 고을들의 호구며 지도를 가져와라. 내가 사심관으로 임명할 사람들을 선정해봐야겠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약간 실망했다.

'최치원 때문이 아니라 사심관 때문에 기분이 나빴나 봐. 물론 왕건의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김부가 항복해왔는데 그를 예우하려면 아예 허수아비로 둘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실권을 줘야 했다. 그래서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사심관에 대해 거칠고 단순하게 현대식으로 비유하면 5급 이하의 지방 공무원은 사심관이 다 임명하고 통제하는 격이야. 그러면 개경에 있으면서도 그 지방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왕건도 처음에는 김부는 어느 정도 대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심관으로 임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례가 만들어지자 여러 대호족들이 자신들도 자기 지역의 사심관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통일이 가까워지니 대호족들이 딴 생각을 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통일이 되면 왕건이 전국의 주군에 도독과 태수를 임명할 수 있다. 여러 대호족들이 지금처럼 마음대로 성주며 태수를 자칭하는 일은 관둬야지. 그런데 사심관 제도를 활용하면 왕건이 보낸 도독들이며 태수도 허수아비가 되니. 하급관리들이 다 대호족들의 사람들인데 도독이며 태수가 혼자 덜렁 와서 뭘 하겠어? 그런데 왕건 입장에서는 이걸 안 들어줄 수도 없으니.'

왕건이 여러모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그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신라 김씨들이야 수백년간 왕 노릇을 하며 힘이 강해서 삼한통일 이후 전국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고려 왕씨는 왕건의 아버지 때만 해도 그냥 일개 호족이었다가 왕건의 힘으로 당대에 삼한을 통일한 거라 기반에 한계가 있어. 호족들의 무리한 요구도 수긍해야지.'

왕건도 이런 현실을 파악하고 호족들의 말을 들어주기는 하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왕건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왕건이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연우야. 이리 와보렴."

"예."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왕건 앞에 다가갔다.

"연우 너도 표천현을 사실상 다스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연우 너도 공식적으로 표천의 사심관으로 임명해줄까?"

왕건은 뜻밖에 그런 제안을 했다.

'이거 대답을 잘해야 하는데 어쩌지?'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런 내 뇌리에 왕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젠 표천현도 조정에서 다스리는 것이 옳습니다. 은광도 바치겠습니다."

나는 왕건에게 그리 말했다.

'내가 표천현의 은광을 여태 잘 써먹었는데 이젠 그 효용이 다했다.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는데도 성공했고. 어차피 왕건에게 은광을 바쳐도 거기 나오는 이익은 지금처럼 발해 유민을 위해 쓸 수밖에 없어. 발해 유민들은 왕건의 기반이기도 하니. 또 어차피 왕무가 왕이 될 건데. 왕무가 왕이 되면 사심관 같은 것은 서서히 정비하고 없애야 해. 그때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내가 사심관을 맡아선 안 돼.'

나는 약간은 아쉬웠지만 더 큰 것을 위해 은광은 잠시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덧붙였다.

"은광도 바치고 이참에 격구단도 역시 조정에 바치든지 해체하든지 하고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은광이 있어서 나에게 고통만 주던 격구단까지 만들었다.

"아니 연우 네가 격구를 그토록 싫어하는 줄 몰랐다. 은광과 표천현을 포기할 정도라니!"

왕건이 놀라서 나에게 말했다.

"하하하. 조정에서 전국을 다스리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하긴 어차피 왕무가 왕이 되면 연우 네가 옆에서 다 차지할 수 있으니 은광이야 잠시 맡겨도 된다는 생각이니?"

왕건이 또 내 꿍꿍이를 알아채고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워낙 충의로운 사람이라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나는 내 속내가 드러나자 깜짝 놀라서 반쯤 화를 내듯이 말했다. 왕건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알았다. 연우 너의 충의야 내가 알지. 그래도 뭐 지금 조정에서 그쪽에 보낼 사람이 없으니 굳이 사심관을 맡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은광 일을 보렴. 그쪽에 있는 윤신달은 나를 위해 해줄 일이 있고. 그리고 격구단 해체라니 어림없는 소리!"

왕건이 일을 그리 정리했다.

'결국 은광을 가져간다고 하지도 않고 내가 잘한 거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물러나려고 하는데 왕건이 말했다.

"오늘도 상보께서 계신 남궁에 들릴 것이다. 연우 너도 나를 따라오렴."

한림원 업무를 마치고 나는 왕건을 따라 견훤을 만나러 갔다.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닌가? 이게 몇 번째야?'

이제는 남궁을 지키는 백제인들도 왕건의 방문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처음처럼 긴장하지도 않고 우리를 안내했다.

"정승 김부 공이 입조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왕건을 보자마자 견훤이 그리 말했다. 견훤의 얼굴은 씁쓸해보였다. 견훤도 신라를 그토록 원했는데 못 얻고 왕건이 냉큼 신라를 차지한 것이다.

"상보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왕건이 그런 견훤을 보고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허망하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견훤이 그리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김부 그 사람과 제 딸아이가 혼인을 하기로 했습니다. 김부가 제 사위가 되는 셈입니다. 또한 나도 김부의 사촌 동생과 혼인을 하게 됐습니다."

왕건이 소상히 그런 일들을 견훤에게 알려주었다.

'아니 무슨 견훤이 진짜 집안어른이야? 뭐 그런 걸 다 알려줘? 자랑하려고 저러나? 게다가 왕건은 또 결혼? 그건 그렇고 유설란이 결국 김부와 혼인을 하네.'

나는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견훤이나 김부나 한 때 왕이었던 것을 고려해서 정윤 왕무보다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다. 고려 서열 2위가 된 것이다.

'견훤이야 일찍 죽는다 쳐도 김부는 지금 30대라 앞으로 40년 넘게 산다고. 엄청난 실권은 없어도 서열 2위 자리에 그리 오래 머물러 있으면……솔직히 왕무가 왕이 돼도 김부를 처리하거나 할 수는 없고. 참 난감하게 됐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다.

"축하드립니다."

견훤은 왕건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반복했다.

"또 김부가 경주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게 그 사람을 그곳의 사심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상보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완산의 호구는 얼마나 됩니까? 상보께서 지난 30년간 근거지로 삼은 곳이었으니 호구가 많겠지요? 경주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농사는 잘 됩니까?"

왕건이 은근한 눈빛을 견훤에게 보내며 물었다.

완산이야 백제의 수도였고 지난 30여 년간 고려 사람들은 완산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견훤에게 그것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큰둥하게 계속 축하한다는 말을 하던 견훤은 사심관과 완산의 호구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완산의 인구는 가히 경주에 비견됩니다. 제가 완산을 점령한 이래 그 주변에는 단 한 번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또 그 인근이야 원래 비옥한 곳이라 자급자족이 가능합니다. 제가 유사시를 대비해 그리 만들어놨습니다."

"그곳의 호장들이나 촌주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다 신검을 따르고 있겠지요?"

왕건이 또 미묘한 어조로 물었다.

"억지로 따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완산 인근의 관리들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말을 잘 듣고 순한 사람인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견훤이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아들인 신검의 반란은 왜 못 막고 이리 개경에 와 있어?'

나는 견훤의 말을 듣고 혀를 찼다. 이걸 그냥 확 견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왕건과 견훤 사이에 중요한 말이 오가는 와중이라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문득 내 눈에 왕건과 견훤이 매우 닮아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기엔 무리지만 무슨 숙부와 조카 수준으로는 닮았네.'

그사이 견훤의 말을 들은 왕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원래는 김부에게만 특혜를 줘서 사심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는데, 다른 호족들이 불공평하다고 자기들도 사심관 자리를 달라고 하니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특정인만 편애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왕 일이 이리 됐으니 사심관들을 잘 활용해 삼한 땅의 정세를 파악하고 안정시켜보려 합니다. 상보께서 완산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견훤이 몸을 일으켜 왕건에게 다시금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럼 이만."

왕건이 견훤에게 답례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견훤에게 인사를 하면서 남궁 밖으로 나왔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엄청난 거래의 현장을 목격하다니. 이걸 사료로 남기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왕건이 갑자기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오늘 상보와 나눈 대화는 절대 누설하지 말거라."

"예."

"우리 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왕건이 나를 보며 그리 신신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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