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 이별 >
"만세, 만세."
천덕전 앞에서 고려 중신들은 계속 함성을 질렀다. 왕건은 아예 직접 김부의 손을 잡고 축대 위로 올라가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 사이에 껴서 열심히 만세를 부르던 나는 슬슬 피로를 느꼈다. 너무 고함을 쳐서 목이 아팠다. 만세라고 외칠 때마다 두 팔도 번쩍 들어야 해서 팔도 뻑뻑했다.
'내가 언제까지 왕만세 이름을 부르짖어야 해?'
나는 속으로 그리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왕만세도 중신들 사이에 껴서 열심히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젠 지위가 많이 올라서 이런 자리에도 꼭 참석해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내 곁의 왕무도 열광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나야 미래에서 와서 이 일을 미리 예상한 지 오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감동할 수밖에 없겠지. 천년 가까이 이어온 신라가 고려에 귀부했으니. 미래에서 온 나도 처음에는 살짝 감격했어.'
나도 이 시대 사람이었다면 너무 기뻐서 하루종일이라도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한계였다.
나는 살며시 왕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왕무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목이 너무 말라서 차를 한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정윤 전하."
"그럼 같이."
왕무가 대뜸 나를 따라오려고 해서 나는 손사래를 쳤다.
"정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좋지 않습니다. 저 혼자 마시고 돌아오겠습니다."
나 대신 왕무가 이 자리를 지켜줘야 해서 나는 그리 말했다. 나는 그냥 나주원으로 돌아가 쉴 작정이었다.
'음. 혹여 왜 자리를 비운 거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뭐라 변명하지? 차를 마시기 위해 잠깐 천덕전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입구쪽에 꽉 차 있어서 못 돌아왔다고 해야겠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천덕전 앞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주원을 향해 걸었다.
차나 한잔 마시고 누워서 쉴 작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왕무도 오늘은 나주원에 돌아오겠지? 오늘 같은 날 군영에 돌아갈 리가 없으니까. 그러면 오늘 밤도?'
나는 나주원에서 몸을 씻고 왕무가 오기 전까지 푹 쉬며 힘을 비축해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얼굴이 상기된 것이 나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주원에 들어섰는데 시녀 경란이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윤비 마마! 잘 오셨습니다. 상산저에서 급한 소식이 왔습니다!"
경란이가 내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최 선생이, 최치원 선생이 지금 위독하시다고 전갈이 왔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궁을 나와 수레를 타고 상산저로 향했다.
'내가 최치원 생각을 미처 못 했어. 최치원은 나이도 많고 신라가 이런 식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문득 나는 그동안 임희의 태도에도 묘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상산저에서 아버님과 대화를 나누면 아버님이 항상 최 선생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말씀하셨어. 그런데 요 근래에는 한번도 그런 말씀을 안 하셨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치원을 봤을 때 책 정리를 하고 있었구나!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최치원이 위독하다니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조용히 은거하던 최치원의 정체를 밝혔다. 그래서 최치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최치원은 주머니 속의 글을 통해 나를 깨우쳐 줬어. 최치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왕무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지 못 했을 거야. 최치원과 아직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지도 못했는데. 마후라 대사 때처럼 나는 또 후회하게 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수레는 상산저 앞에 이르렀다.
"잘 왔다. 오늘 연우 네가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마침 왔구나!"
상산부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황급히 상산부인과 함께 최치원이 묵고 있는 별채로 들어갔다.
"허허허. 이 늙은이의 병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내 모습을 보고 최치원은 난감한 듯 말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산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했다. 나는 상산부인이 왜 다급하게 사람을 보냈는지 깨달았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이 봐도 최치원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이 확실했다. 최치원을 곁에서 보살피고 있는 의원의 얼굴도 어두웠다.
나는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더니 최치원이 입을 열었다.
"정윤비 마마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상산부인과 의원은 그 말을 듣고 별채에서 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나는 최치원을 향해 말했다. 왠지 모르게 최치원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습니다."
침상 위에 누워있는 최치원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최치원의 반응에 놀라서 내가 말을 못 잇고 있을 때 최치원이 말했다.
"신라인들은 모두 김유신이 33천에서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간 사람임을 믿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셨지요. 저는 정윤비 마마께서도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다만 정윤비 마마께서 진정한 대업을 이루시는 것을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허허허."
"33천이라……"
나는 최치원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내가 원래 살았던 현대에 대해 설명하려면 최치원처럼 이야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다른 세상에서 오셨으니 제가 죽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슬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 역시 정윤비 마마처럼 또 다른 세상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최치원은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최치원은 내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내 말을 믿는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려국 폐하께도 따로 글을 남겼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폐하께 전해주십시오. 고려국 폐하의 관대함은 고금에 드뭅니다. 저는 평생 신라의 운명을 걱정해왔습니다. 그런데 고려국 폐하의 관용으로 모든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또한 고려국 폐하 덕에 이 늙은이가 말년을 편히 보냈습니다."
최치원은 서신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최치원의 진심일까? 그러나 최치원으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나는 최치원이 건넨 서신을 품속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좀 쉬십시오."
말을 길게 한 최치원이 지쳐보였다.
"제가 남길 것은 책밖에 없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정윤비 마마께 남길 책이 있고 한림원령에게 부탁할 책이 있습니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서책들은 한림원령이 맡아서 끝내줘야……"
최치원이 최언위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한림원령께서도 오늘 중에 오실 것입니다."
나는 최치원의 손을 한번 잡아주고 여러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산부인을 나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폐하께도 알려야 하니? 어찌할지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도 아직 안 돌아오시고."
최치원은 어쨌든 지금 아무 관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워낙 명성이 드높고 왕건도 최치원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상산부인도 이를 어찌 처리할지 고민이었던 모양이다.
"우선 한림원령의 저택에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 선생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제가 한림원에 못 나간다는 소식을 내일 폐하께 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일쯤에 폐하께서 이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오늘이야 신라가 항복한 당일이니 이런 소식을 전하기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조치를 취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나는 상산부인과 함께 하인들을 이리저리 보내서 소식을 전했다.
최언위는 밤늦게 허겁지겁 상산저로 달려왔다. 그때까지 천덕전에 붙들려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 이런 일이?"
최언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채에서 최 선생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말을 듣고 최언위는 별채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최언위는 허탈한 기색으로 별채에서 나왔다.
"최 선생께서 너무 지친 기색이라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저와 잠깐 이야기를 하신 것도 힘드신지 그대로 잠이 드셨습니다. 삼한 땅의 삼최 중에 이제 남은 것은 저뿐입니다. 최승우도 그리 가고 이젠 최 선생마저."
최언위가 소매로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한림원령. 따뜻한 차라도 드십시오."
나는 차를 건네며 최언위를 위로했다.
"어쨌든 한동안 상산저에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최 선생의 임종은 지켜야 하니."
나와 최언위는 밤새도록 별채 밖에서 최치원의 용태를 살폈다. 최언위와의 대화를 마친 최치원은 이제 말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침상에 누워 의원이 먹여주는 죽과 약만 먹고 지냈다.
최치원이 위독하다는 사실이 가져온 파장은 꽤 컸다. 내가 보낸 소식을 들은 왕건은 즉시 답신을 보내왔다.
-내가 직접 조만간 상산저에 갈 것이니 이와 관련된 준비를 부탁한다.
그와 함께 왕건을 경호하기 위해 용호군 군사들이 상산저 앞으로 달려왔다. 왕건이 직접 올 채비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부 쪽에서도 사람이 왔다.
"우리 폐……아니 정승께서도 최치원 선생을 뵙고자 합니다. 최 선생이 개경에 머물러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정승께서는 한번 최 선생을 만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이리 되니."
김부를 대신해 달려온 신라인은 여전히 신라가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제 왕건이 김부의 항복을 받아들임으로서 신라는 사라졌다. 김부는 고려 정승이 되었다. 다만 심부름을 온 신라인은 그 상황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와주십시오."
나는 신라인에게 황급히 말했다. 어쨌든 신라 국왕이었던 김부가 직접 6두품이었던 최치원을 문병하는 것은 최치원에게 큰 영광이었다. 김부가 오면 최치원이 힘을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신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견훤이 머물고 있는 남궁에서도 사람이 왔다. 최치원의 병세가 위독하니 한번 문병을 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 위로의 말을 전하는 고려 중신들의 대리인들이 끊임없이 상산저를 방문했다. 대외적으로 내가 최치원의 제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을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그 사람들의 응대를 마치고 나서 나는 최치원이 누워있는 별채 밖에서 최언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정승께서 빨리 오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최언위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 순간 갑자기 별채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최치원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휴우."
나는 최언위의 얼굴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별채 안에 들어가니 최치원이 두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마지막까지 저 책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의원이 침상 옆 서탁에 놓인 책 한권을 가리켰다. 표지를 살펴보니 최치원이 쓰고 있던 제왕연대력이란 책이었다.
최언위는 한숨을 쉬며 제왕연대력을 집어 마지막 장을 펼쳤다.
-김부 대왕이 개경에 들어와 고려에 귀부를 청하고 고려국 대왕 폐하께서 이를 받아들이셨다. 마침내 991년만에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의 대업이 마무리 되었다.
최치원이 마지막 순간에 적었는지 필체가 흐릿했다.
"흐흐흑."
제왕연대력의 그 구절을 보는 순간 최언위가 통곡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