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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54화 (154/216)

< 154 : 마지막 >

"이번에 고려국에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 발해 유민들은 군사 2천명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 대다수가 기병입니다."

내 앞에서 대광현이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겨우 대광현에게 예를 표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국선이 요 근래 바빠서 몸이 피곤합니다. 발해 기병의 구체적인 운용에 대해서는 나와 함께 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곁에 앉아있던 왕무가 맑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나는 그런 왕무를 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제 밤에 왕무 때문에 지금 내가 이리 힘든 건데. 어제는 힘이 없으니까 서로 껴안고만 있으려고 했어. 그런데 왕무가 갑자기 손을 내 옷 안에……'

어제 침상 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나는 이 자리에 계속 앉아있기 민망했다. 왕무는 침상 위에서 나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었다.

'그런데 그게 왕무 마음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기도 했으니. 정말 신기해. 침상 위에서 서로 몸을 꽉 붙이고 있으면 마음도 느껴져. 왕무는 힘이 세서 어떤 자세를 취해도……'

일을 하는 도중에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내가 미친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대광현에게 말했다.

"저는 군사들을 구체적으로 배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어디에 혼자 가서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십시오. 몸을 잘 살피십시오."

대광현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왕무가 또 그 곁에서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국선 푹 쉬세요."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황급히 별채로 향했다. 거기서 좀 쉴 작정이었다.

'왠지 내가 알던 왕무가 아닌 거 같아. 근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한번 왕무를 사랑하게 됐으니까. 사랑하기 전이면 몰라도. 사랑해버린 후에는 설사 왕무가 어찌 변하더라도 계속 사랑할 수밖에……그리고 솔직히 변한 모습도 매력적……'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계속 이런 일만 떠올리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솔직히 어떤 모습의 왕무든 내 곁에 있어주면 좋았는데 시간은 너무 빨리 갔다.

"이제는 군영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대광현과의 협의를 마치고 나온 왕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나주원에 안 들어와?"

나는 냉큼 그것을 물었다.

"일이 많아서…… 여러 군졸, 군관들도 몇 달 동안 집에 못 돌아가고 있어. 그나마 어제는 잠시 시간이 나서……"

왕무는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임연우. 정신차려! 왜 왕무가 부담되게 그런 걸 물어!'

심란해 하는 왕무의 모습을 보고 나는 나 자신을 다잡았다.

"그래. 백제를 무너뜨리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나겠지."

"어쩌면 폐하께서 백제를 공격할 때 나를 선봉으로 세우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 그에 대비해서 준비를 잘해야 해서……"

왕무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왕건은 너를 선봉으로 세워! 왕건 나름대로 너를 밀어준 거지. 이 큰 전투의 선봉이 되면 그만큼 명성을 얻을 수 있으니.'

미래에서 온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걸 당장에라도 왕무에게 말해주고 왕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 열심히 준비해."

나는 짐짓 웃으며 왕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연우야!"

왕무는 그런 나를 잠시 끌어안았다. 그렇게 서로 껴안고 있다가 왕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로 군영을 향해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니 나는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다음날 나는 힘없이 한림원에 나갔다.

'뻔히 이긴다는 걸 아는 전투인데도 바빠서 왕무를 못 보니 이리 힘드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한림원 한쪽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왕건이 걸어 들어오더니 외쳤다.

"김부가 곧 개경에 온다는구나. 허허허."

왕건은 온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신라국왕인 김부가 입조한다는 것은 곧 신라의 항복을 의미했다.

"경하드립니다."

몇몇 한림원 학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왕건이 전한 소식에도 장내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이미 신라에게 남은 길은 항복 외에 없다는 것을 모두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몇 년 전에 항복을 한다고 해놓고 신라가 시간을 여태 끌었으니 기대감이 다 사라졌어. 견훤이 오니 허겁지겁 항복하는 꼴이라.'

나는 속으로 그런 논평을 하면서 신라의 항복을 폄하했다.

'유긍달 등이 힘을 써서 이뤄낸 일이라 깎아내리는 건 아니야. 객관적인 논평이라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건은 너무 기뻐서 주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김부가 온다! 김부가 온다고!"

왕건 입장에서는 본인 인생 최고의 순간이니 저런 반응도 당연했다. 아무래도 저런 왕건에게 호응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눈치를 보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만세! 고려 만세!"

다른 학사들도 모두 나를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진정하라. 아직은 일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 왕건은 짐짓 근엄한 척 하며 그리 말했다. 그러더니 학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김부가 개경에 와서 나라를 바치면 내가 바로 받을 수는 없고 거절을 몇 번 해야하는데 몇 번이나 하면 좋을까? 이와 관련된 자료를 좀 찾아와."

"예전에 같은 명을 내리셔서 자료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김악이 그리 말했다.

"그때 생각해 놨던 걸 까먹었어. 다시 생각을 해야겠으니 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와라. 허허. 김부가 오면 그들을 어찌 대접해야 할지. 이것도 큰 문제군."

왕건은 막상 고대하던 일이 다가오자 어쩔 줄 몰라했다.

"김부가 서라벌을 출발했다고 하는구나. 신라의 중신, 귀족, 궁인들이 신라의 보물을 가지고 따라온다고 한다. 그 행렬의 길이가 30리에 달한다고 들었다."

임희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임희와 신라 항복문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상산저에 들렀다.

"아니 다 망해가는 무리들이 어디에서 돈이 나서 30리에 걸친 행렬을 꾸몄는지 의문입니다."

제대로 된 군사가 없어 허덕이던 신라의 사정을 훤히 아는 내가 혀를 찼다. 30리에 걸친 행렬을 위해선 족히 2~3천은 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개경까지 올 때 먹고 자는 비용이 엄청날 것이다.

"너무 그러지 마라 연우야. 아마 유긍달 등이 비용을 댔을 거다. 거기에 옛 신라령의 호족들도 힘을 썼겠지. 이제는 정말 마지막 아니냐? 김부 아니 신라 국왕 폐하께서도 이번에 개경에 들어오시면 다시는 왕을 칭하지 못하실 테니.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도 비용을 보탠 사람들도 그것을 다 알고 있다."

임희가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그말을 들으니 나도 애잔한 마음이 들긴 했다. 보통 사람이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수십 년 된 식당 하나를 폐업할 때도 마음이 무거울 것이다.

그런데 김부는 1천년 가까이 내려온 신라를 왕건에게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 이번만큼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예를 다해 신라 사람들을 맞이해야지.'

거기에 솔직히 나도 역사학도로서 김부가 끌고 오는 30리나 되는 행렬의 모습이 궁금하긴 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곧 이룰 수 있었다.

"정윤과 정윤비는 군사 1천을 거느리고 개경 교외까지 나가 신라 국왕 폐하를 영접하라! 절대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서라벌에서 개경까지 먼 길을 와준 사람들에게도 대접을 후히 하라!"

김부 일행이 개경 가까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나와 왕무를 내보냈다. 따지고 보면 고려 측에서 성의를 보이려면 나와 왕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거 하나는 좋네. 한동안 왕무를 못 볼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보게 됐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왕무의 손을 잡고 김부 일행을 기다렸다. 이미 주위는 인산인해였다. 우리가 이끌고 온 1천명의 군사들 외에도 수많은 개경 주민들이 신라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김부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깃발을 든 신라 군졸들이 선두에 서 있었다.

수많은 목간과 책을 담은 수레 수십 대가 깃발을 따르고 있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200년 넘게 삼한을 통치했다. 통치를 위해 만든 호적이며 민정문서들이 여전히 서라벌에 남아있었다. 항복의 의미로 신라는 그것들을 실어가지고 온 것이다.

그 문서를 여태 지켜온 신라의 하급 관리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목간과 책을 쓰다듬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골동품이며 보물을 실은 수레들도 끝이 없었다. 그 사이사이에 신라 왕실의 궁인들이 걷고 있었다.

흐흐흑

마음이 약해 보이는 몇몇 신라 사람들은 걸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구나!'

나는 새삼 그것을 실감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신라인들의 이 화려한 행렬을 잘 기억해두기 위해 나는 애를 썼다.

내 곁에서 왕무 역시 격동한 기색이었다.

김부는 이 행렬의 중간쯤에서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폐하!"

나와 왕무는 재빨리 김부에게 가까이 다가가 예를 갖추었다. 구경을 나온 개경 주민들도 김부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절을 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김부도 말에서 내려서 답례했다.

"정윤 전하께서 이리 직접 나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신라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천막도 쳐놓고 물과 죽도 준비했습니다."

왕무가 김부에게 권했다.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끝내고 나서 쉬고 싶습니다. 허허허."

김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나와 왕무도 그런 김부를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우리 부부는 입을 모아 그리 대답했다. 그리고 나와 왕무는 1천 명의 군사들과 함께 신라인들의 행렬을 호위했다.

나와 왕무는 신라국왕 김부를 호위해서 궁까지 올라갔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는 김부를 보며 다시금 궁의 위치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온 사람에게 이 언덕을 또 오르라고 하니.'

우리 뒤를 따라오는 신라 중신들도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참 안타까웠다.

어쨌든 나와 왕무는 김부와 함께 천덕전 앞까지 왔다. 왕건이 정사를 돌보는 곳이었다. 이미 왕건의 수많은 왕후, 부인들 거기에 태자며 공주들이 다 나와 있었다. 조정 중신들도 모두 천덕전 앞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김부가 와도 왕건이 천덕전의 문을 안 열어줬다.

"폐하께서 눈물까지 흘리시며 신라 국왕 폐하의 항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천덕전의 시위가 나와서 그리 말했다.

"다시 여러 사람들의 뜻을 전해라!"

시중 김행선이 시위에게 명했다. 그런데 밖에서 몇 차례나 요청을 해도 왕건이 천덕전의 문을 안 열어줬다.

나는 슬쩍 대내학사 김악에게 가서 물었다.

"폐하께서 몇 번이나 거절하시려고 마음먹은 겁니까?"

"자료만 달라고 하시고 혼자 결정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나는 혀를 차며 천덕전 밖을 둘러봤다. 김부와 신라 사람들은 지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냥 김부를 데리고 확 내려가 버릴까? 그러면 왕건이 진짜 당황할텐데.'

홧김에 그런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폐하께서는 덕망이 깊으셔서 이 고려를 세우실 때도 정주 왕후 마마의 요청에야 겨우 움직이셨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왕건의 왕후와 부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여러 왕후와 부인들도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마침내 왕후와 부인들이 나서서 천덕전 안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왕무의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이러면 안 됩니다."

천덕전을 지키는 시위들이 문을 열어주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천덕전 안에서 왕건이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나는 신라의 항복을 받을 수 없다. 어허."

나주 왕후 및 여러 왕후들의 부축을 받으며 왕건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천덕전 밖에 나온 왕건을 보고 고려 중신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

천덕전 앞에서 중신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궁안의 시녀와 시위들도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안 것 같았다. 그들도 일제히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함성을 지르니 그 소리가 언덕 아래 개경 시가지에도 다 들렸다. 이미 김부가 궁에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많은 하급 관리들과 개경 주민들이 궁 앞 구정에 모여 있었다.

그들도 모두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니 개경 전체가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언덕 아래서 외치는 만세 소리가 천덕전 앞에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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