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 영끌 >
"오늘은 파평성주 윤신달 공과의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시녀 경란이가 아침에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래. 알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오늘도 힘들겠구나. 요새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네.'
나는 임희의 충고대로 표천현에서 군사를 모을 작정이었다. 은광이 발견된 이후 표천현은 사실상 내 영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은광이 표천현 경제의 중심이니 은광을 쥐고 있는 내 뜻대로 표천현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형식상으로는 파평성주 윤신달이 느슨하게나마 표천현을 관리하고 있었다. 표천현에서 군사를 모으기 전에 윤신달에게 이야기를 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가 조만간 윤신달도 엄청 출세를 하게 된다. 윤신달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좋아. 지금 윤신달이 거느리고 있는 파평의 군사력도 꽤 되고. 슬쩍 우리 쪽으로 오라고 권해봐야지.'
요사이 임희의 말대로 여러 대호족들은 군사를 모으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신달도 한번 포섭해 볼 작정이었다.
다행히 이날은 한림원 업무만 끝나면 시간이 났다. 왕건이 오늘은 일이 있어서 견훤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상보께 떡과 술을 가져다 드려라. 오늘 내가 먹어보니 맛있더라. 상보께서 못 드시면 꼬맹이 왕자라도 대신 먹겠지."
왕건은 자기가 안가는 대신 음식을 보냈다. 왕건이 견훤을 엄청 후대하긴 했다.
'과연 무슨 꿍꿍이일까? 아직 항복을 안 한 김부 때문인가?'
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왕건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왕건이 이리 견훤을 후대하니 고려 조정 내에서도 견훤에게 힘이 실리고 있었다.
이때 고려 조정 내에는 신숭겸의 동생이며 김락의 친인척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건이 견훤을 후대하니 이 사람들도 견훤 앞에서는 예를 갖출 정도였다.
어쨌든 이날 한림원 업무가 끝나자마자 나는 수레를 타고 윤신달의 저택으로 갔다.
"당연히 표천현은 정윤비 마마께서 관할하는 곳이나 다름없으니 마음대로 사람을 뽑아가셔도 됩니다. 저야 그냥 문서상으로만 표천현이나 다른 속현들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는 표천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하인을 통해 서신만 보내주셔도 될 일을 이리 직접 찾아와서 일러주시니 황송합니다."
윤신달과 차를 한잔 마시며 잡담을 나누던 내가 본론을 꺼내자마자 윤신달은 그리 대답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표천현이 파평과 붙어있는 땅입니다. 내가 뽑은 표천현의 군사들을 성주님의 지휘 아래 넣으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관리하기에도 편하고 나도 든든합니다. 성주님께서 워낙 군사를 잘 부리시니."
나는 윤신달을 보며 슬쩍 미끼를 던졌다. 내 제안을 얼핏 들어보면 윤신달에게 좋아보였다. 표천현의 군사들을 윤신달에게 맡긴다는 것이니 윤신달의 군세가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표천현이 내 직할 영지나 다름없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 표천현의 군사들을 휘하에 넣으면 윤신달도 최소한 정윤파에 가까운 인사로 분류되겠지.'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윤신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이쿠! 저는 그렇게 많은 군사들을 지휘할 능력이 없습니다. 파평의 군사들을 다스리는 것도 벅찹니다. 저에게 너무 과중한 일을 맡기지 마십시오. 정윤비 마마께서는 군략에 뛰어나시니 표천현의 군사를 잘 다스릴 장수를 따로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윤신달은 손사래를 치며 내 제안을 거부했다.
'아직은 중립을 지키며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보겠다는 건가?'
나는 짐짓 겸손한 척 하며 몸을 수그리는 윤신달을 보며 입맛이 썼다. 노련한 윤신달 같은 사람의 반응을 보면 지금 고려 조정의 여론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정윤파의 세력을 그토록 키우고 견훤을 데려오는 대공을 세웠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에게 왕무가 반대파들을 제압할거라는 확신을 못줬구나. 그런 확신을 줬으면 윤신달도 당연히 우리 쪽에 가담했을 텐데. 다만 내가 표천현에서 군사를 뽑아가는 것을 윤신달이 막지 않았다. 이는 윤신달이 유긍달 쪽에 붙은 것도 아니란 소리야.'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윤신달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성주님. 제가 따로 장수를 뽑겠습니다."
우선은 중립을 지키려는 윤신달의 입장을 존중해야 했다.
나는 윤신달의 저택에서 나와 바로 상산저에 들렀다. 윤신달과의 대화에 대해 임희에게 알려주고 앞으로 어찌할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윤신달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호족들이 당장은 관망만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지. 우리가 세력을 키우지 못했다면 다 유긍달 쪽에 붙었을 사람들이야."
내 말을 듣고 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자리를 찾아 은광에 온 건장한 장정들이 많습니다. 그 덕에 표천현에서 600명의 군사들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잘 됐구나. 상산에서도 족히 1천의 군사는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1천명이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상산은 큰 고을이 아니라서 동원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임희가 내 예상보다 더 많은 군사를 모은 것이다.
"연객이의 처가에도 연락을 해서 군사를 모으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인근의 여러 작은 가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다행히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1천명을 모았다. 음 그리고 왕만세의 직할 수군도 1천 5백명은 되지 않느냐?"
임희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수군이라 아쉽기는 해도 숫자는 그 정도 됩니다."
"수군을 우리가 쥐고 있으니 예성강이며 아리수 같은 수로를 통제할 수 있다. 그 덕에 어느 정도 싸움이 되는구나. 그래도 내가 헤아려보면 유긍달, 황보제공 등이 모은 군사들의 수가 우리보다 많긴 많을 거다."
임희는 냉정하게 현실을 말했다.
"충주, 황주가 워낙 큰 고을이니 도리가 없습니다."
나도 씁쓸하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정윤 전하께 나주의 오씨들도 모을 수 있는 군사들을 모아 상경시켜야 한다고 말씀드려라. 50명이라도 숫자를 맞춰서 보내라고 해야 한다. 한 명이라도 더 우리 쪽 사람들을 모아야지. 아 참. 발해 태자도 꼭 만나서 사람을 모아달라고 부탁하렴. 발해 유민들이 숫자가 많으니."
임희가 나에게 그런 당부를 했다. 임희의 표정이 절박해보였다. 어떻게든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마음이 엿보였다.
'아버님 말씀대로 나주 오씨에게 연락을 해야하니 군영의 왕무를 한번 찾아가 볼까? 이건 일처리를 위해서 왕무를 꼭 찾아가야 하는 거잖아. 사사로운 내 감정 때문이 아니야.'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임희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요 근래 고려의 호족들은 모두 군사들을 모으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대호족들뿐만이 아니라 군소 호족들도 열심히 뛰고 있었다.
왕건도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몇 년 전만 해도 어디서 군사 500명을 빌릴 곳이 없어서 사방에 서신을 보냈다. 그런데 요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참 황당하다. 여러 사람들이 진작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훨씬 더 일찍 삼한을 통일했을 것이다."
한림원에서 왕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건 입장에서는 지금 열심히 뛰는 호족들의 모습이 얄밉긴 할 것이다.
다만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떳떳했다.
'아버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왕건이 어려울 때도 전력을 다해서 도왔어.'
다만 왕건은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다. 옛날 일이 계속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곁에서 김악이 말했다.
"그래도 지금 군사들이 모이는 것을 보니 6만 아니 7만명의 군사가 모일 것 같습니다. 신라가 평양성을 쳐서 옛 고려를 무너뜨릴 때 20만 대군을 동원했습니다, 그 이래 200년 넘게 삼한 땅에서 이만한 군사가 모인 적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위엄으로 오늘 이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를 경하드립니다."
역사에 밝은 김악이 그렇게 왕건을 위로했다.
'이건 확실히 김악의 말이 맞다. 왕건의 위엄으로 이만한 군사가 모이는 거지.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는 왕건을 달랠 겸 몸을 일으켜 예를 올렸다. 다른 학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몸을 일으켜 왕건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런 학사들을 보며 왕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예전의 서운함은 잊고 군사를 모아야 할 때지."
그나마 김악의 말 덕분에 왕건의 마음이 약간은 풀린 것 같았다.
한림원 일을 마치고 나주원에 돌아가자마자 경란이가 나와서 외쳤다.
"정윤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피곤하신지 처소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래?"
나는 반색을 하며 내 처소로 달려갔다. 안 그래도 임희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왕무를 찾아갈 작정이었는데 왕무가 딱 맞춰서 나주원에 온 것이다.
일이 바쁘긴 해도 가끔씩 나주원에 돌아올 짬은 나는 것 같았다.
침상 위에 잠든 왕무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힘든 지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고 잠들어 있었다.
"자는 모습도 잘 생겼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잠들어 있는 왕무의 모습을 내려다보긴 처음이네."
나는 또 새로운 왕무의 모습을 알아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계속 왕무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피곤한데 한숨 자야겠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힘들었어.'
나는 겉옷을 벗고 잠들어 있는 왕무 곁에 누웠다. 그리고 왕무의 허리를 껴안고 그 품속에 파고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왕무의 팔이 나를 꽉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왕무가 웃으면서 눈을 떴다.
"깨셨습니까?"
나는 미안해져서 그리 말했다. 간만에 와서 자고 있는 왕무를 괜히 내가 깨운 것 같았다.
"미안해하지마. 연우야. 원래 지금쯤 깨려고 했어."
왕무는 또 귀신같이 내 속내를 눈치 채고 그리 말했다.
"알았어."
"연우야. 요새 바쁘지."
왕무는 다시 잠을 잘 마음이 없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응.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나주 오씨 집안에 연락을 하라고 하셨어. 아무리 수가 적어도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아예 지금 해야 할 일을 처리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왕무에게 그 말을 했다.
"그럴게."
"아 그리고 발해 태자도 만나야겠어. 발해 유민들도 모아야 하니."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왕무가 나를 더 세게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만나러 가?"
그리고 왕무가 약간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쯤?"
"꼭 같이 가자. 연우 너 혼자 가지 마."
왕무가 나에게 그런 당부를 했다.
"요새 일이 많은 거 아니야? 바쁠텐데. 그리고 발해 태자도 나라가 망해서 온 사람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겠어?"
왕무가 지나치게 대광현을 의식하는 것 같아 나는 그리 말했다.
"어쨌든 꼭 같이 가자. 발해 사람들은 우리 고려군과 군제가 달라. 거기에 대광현이 낙타를 타고 온 걸 보면 낙타 부대도 운용하는 것 같아. 당연히 발해 유민들을 군사로 동원하려면 군제를 맞춰야지. 안 그러면 전장에서 사고가 날 수도 있어. 내가 가서 협의를 해야 해."
왕무가 군사전문가다운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왕무의 말이 다 옳았다. 나는 왕무를 잠시 오해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왕무를 더 세게 껴안았다. 나나 왕무나 요 근래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힘이 쭉 빠진 상태였다. 이 와중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고 있으니 힘이 솟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