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52화 (152/216)

< 152 : 달걀 >

한림원 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왕건을 따라 견훤이 살고 있는 남궁에 갔다. 남궁은 한림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버님이 부러워할 만하네.'

나는 남궁 앞에서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궁이었다.

"폐하."

왕건이 남궁에 왔다는 소식에 남궁을 관리하던 백제인들이 달려 나왔다. 그사이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운주 전투 때 고려군에 사로잡혔다가 내 도움으로 살아난 술사 종훈, 의원 훈겸이었다. 그들은 남궁에서 견훤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상보께서는 어디 계신가?"

왕건이 물었다.

"밤새 몸이 불편하셔서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밤에 잠을 못 이루셔서 지금 잠깐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느라 지금 폐하를 맞이하러 나오지 못하신 것입니다. 곧 사람을 보내 폐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남궁을 관리하는 아관 신강이 어쩔 줄 몰라하며 대답했다. 견훤이 왕건을 맞이하러 나오지 않은 것을 무례하다 여길까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어어. 절대 상보를 깨우지 말라!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말고. 내가 잠깐 남궁에서 쉬고 있겠다. 상보께서 깨어나시면 만나고 가겠다."

왕건은 소맷자락을 휘저으며 그런 명을 내렸다. 왕건의 그 말을 듣고 백제인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명을 어길 수도 없어서 결국 견훤을 깨우지 않았다.

"상보께서는 어디가 편찮으신 건가?"

나는 의원 훈겸에게 물었다. 왕건의 얼굴을 보니 이걸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재빨리 나섰다.

"나이가 많으시고 등창이 심하십니다. 거기에 근래 온갖 일을 다 겪으셨습니다. 근심과 분노가 심하시니……"

훈겸이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어허. 이런 큰일이다. 상보의 병을 낫게 할 방법은 없는가? 약재는 내가 넉넉히 대겠다."

훈겸의 말을 듣던 왕건이 불쑥 끼어들었다.

"약재는 지금도 충분합니다. 전력을 다해보겠습니다."

훈겸이 왕건에게 굽신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남궁에 있는 객사에 들었다. 자고 있는 견훤 대신 견훤의 후비와 막내아들인 능예가 우리를 접대하기 위해 나왔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왕건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이 늙은이와 같이 있으면 지루할 것이다. 인사를 받았으니 됐다. 물러나서 편하게 있으라. 나는 정윤비와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겠다."

견훤이 데리고 온 능예는 확실히 어리긴 어렸다. 견훤의 후비도 정치에 능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가라고 했다고 진짜 가나?'

왕건의 말을 듣자마자 능예는 신이 나서 왕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견훤의 후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긴 정치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후비와 왕자들은 신검이 이미 제거했겠지. 말 그대로 견훤을 시중들기 위해 신검이 붙여준 후비와 왕자니. 정치적으로는 어리숙하군.'

그런 판단을 하며 왕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내가 말했다.

"상보를 후히 대접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너무 후하게 대접하시니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면 상보께도 오히려 부담 아닐까요? 지금만 해도……"

잠든 견훤을 깨우지 않고 이리 기다리는 게 아무리 봐도 지나친 것 같아서 내가 물었다. 또 왕건이 이런 질문을 기다리는 기색이라 내가 일부러 입을 열었다.

'지금 문밖에 남궁의 하인들이 우리가 부르면 달려오려고 대기하고 있다. 나와 왕건의 대화도 그들이 들을 수 있어. 여기서 무슨 말을 하면 그 하인들을 통해 자연스레 견훤에게 왕건의 의중을 전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런 식으로 뜻을 전하는 게 효과적이지. 왕건이 굳이 나를 데려온 것도 이런 걸 바라서야.'

과연 왕건은 반색을 하며 내 물음에 답을 해줬다.

"내가 상보께 궁과 식읍을 드리긴 했다. 그러나 그것만 한다고 상보의 근심이 사라지겠느냐? 이렇게 내가 찾아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에 대해 알아야 상보의 마음도 편하고 내 마음도 편하다. 내가 삼한을 통일하려면 상보의 도움이 절실하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교류를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허허허. 연우 너도 잘 알아두거라. 거기에 까놓고 말해서 상보께서 나이가 많으신데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느냐? 생전에 후하게 대접해 드려도 나에게 위협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내 명성만 높아지지. 다 나를 위해 이러는 것이다."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건이 하도 진지한 표정이라서 나도 헷갈렸다.

'이게 왕건의 진심인가? 왕건이 삼한을 통일한 사람인 만큼 통이 크긴 한데. 왕건의 의도가 이렇다면 실제 역사에서 견훤이 삼한통일 직후 죽은 건 역시나 병 때문인가? 왕건이 손을 쓰거나 한 건 아닌 거 같고. 그런데 내가 팔관회 때 왕건이 신숭겸이나 김락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우는 것도 봤는데. 긴가민가하네.'

따지고 보면 역사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꽤 있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도 리디아를 멸망시키고 나서 리디아의 국왕 크로이소스를 크게 우대했다. 그래서 크로이소스를 페르시아 왕가의 어른으로 받들었다.

우리나라도 신라 법흥왕 같은 경우 귀부해 온 금관국 국왕을 엄청 우대하고 왕실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었다.

'왕건이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가? 왕건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 아니 지난 몇 년간 대화를 그리 많이 나눠도 모르겠어.'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더니 하인들이 외쳤다.

"상보께서 기침하셨습니다. 사정을 다 들으시고 이곳으로 황급히 오고 계십니다."

"그래?"

왕건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견훤을 기다렸다. 그래서 나도 따라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글부글

내 눈앞에서 화로 위에 걸린 냄비가 끓고 있었다. 내 속도 끓고 있었다.

'아니 견훤을 후대하고 싶으면 그냥 말만 좋게 해주면 되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서 이런 걸 시켜.'

왕건이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견훤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를 가운데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공산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연우가 낸 계책 덕에 내가 살았습니다. 오오 그래. 연우야. 네가 쓴 계책을 상보께 보여드려라! 달걀과 백반, 식초, 먹물만 있으면 이 자리에서 시연할 수 있지 않니?"

이야기를 하다가 흥이 오른 왕건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바람에 졸지에 나는 왕건과 견훤 앞에서 달걀을 삶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내가 아무리 정윤비라고 해도 고려 현 국왕인 왕건, 백제 전 국왕인 견훤 사이에 있으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달걀을 삶는 동안 나는 열심히 백반, 식초, 먹물을 섞었다. 왕건과 견훤 두 사람은 그런 나를 구경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저러면 달걀에 글씨를 쓸 수 있습니까?"

견훤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왕건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왕건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달걀이 식자 나는 그 위에 글씨를 썼다.

-천지홍황(天地鴻荒)

달걀 4개를 집어 그 위에다가 4글자를 썼다. 먹물이 스며들어서 달걀 겉에는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달걀 4개를 쟁반에 올려놓고 견훤에게 바쳤다. 견훤은 떨리는 손으로 달걀을 깠다. 그러자 그 속에 내가 쓴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에는 참으로 뛰어난 재사가 많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윤비가 우리 예부령도 서예로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견훤이 연거푸 감탄하며 그런 말을 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기고만장해진 왕건이 자신도 달걀 하나를 집어 들어 까면서 외쳤다. 어느덧 쟁반 위에는 천지홍황이 적힌 달걀 4개가 나란히 늘어섰다.

"그건 그렇고 연우야. 이 달걀은 그냥 먹어도 되는 거냐?"

왕건이 나에게 그것을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먹물이 딱히 몸에 해로운 것은 아니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도 확신이 안 서서 그리 대답했다.

"그래 그럼 됐다. 자 연우 네가 고생했으니 이걸 좀 먹으렴. 상으로 내리마."

왕건은 그러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쟁반을 직접 들어 나에게 건넸다.

그 뒤에도 한참 견훤과 대화를 나누던 왕건은 겨우 자리를 마무리 짓고 나와 함께 남궁을 나섰다.

"상보께서 몸이 불편하신데 너무 오래 대화를 나눈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오늘 나는 그야말로 녹초가 됐다. 먹기 싫은 삶은 달걀도 눈치를 보면서 4개를 다 먹었다.

'그냥 1개만 삶아서 그 위에다가 글씨를 작게 쓰면 됐는데 내가 너무 미련했어.'

나는 그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 잘했다. 앞으로도 내가 상보를 만날 때 연우 너를 꼭 데려와야겠다. 연우 너도 앞으로 몇 달간은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상보를 보살피는데 힘을 쓰도록 해라."

왕건이 그런 나를 향해 외쳤다.

'한번 이리 해줬으면 됐지? 또 견훤을 방문한다고? 아니 그때마다 나를 데리고 올 작정인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한림원에 온 왕건은 학사들에게 들으라는 듯 외치기 시작했다.

"상보께서 김부보다 먼저 개경에 오실 줄은 내가 상상도 못 했다. 응! 내가 대군과 함께 완산으로 진격하기 전에 서라벌을 한번 보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라벌 인근의 자료를 가지고 오라. 서라벌에서 완산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겠다."

그러더니 왕건은 약간 불쾌한 듯 주먹으로 서탁을 내리쳤다.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한림원 학사들은 쭈뼛거리면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서 왕건에게 바치기 시작했다.

'왕건이 한림원에서 이러면 자연스레 이 이야기가 유긍달이나 다른 대호족들에게도 들어가지. 신라 왕실과의 교섭을 맡고 있는 호족들은 엄청난 압박을 받을 거고 신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설거야. 신라가 이러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견훤이 오는 순간 모든 게 끝난 거다. 그리고 왕건이 견훤에게 잘해주는 것을 보면 신라의 김부도 항복할 수밖에 없어.'

실제 역사에서도 견훤이 항복하자 신라는 몇달만에 따라서 항복한다.

'내년까지 쉴 틈 없이 일이 진행되겠구나. 무야. 보고 싶은데 한동안 못 볼 거 같아.'

급박한 정세 때문에 왕무와 만나기 힘들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한림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상산저에서 전갈이 왔다. 잠시 상산저에 들렀다 가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달려가니 임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라가 조만간 항복할 것 같다. 폐하께서 오늘 김부에게 크게 역정을 내셨다. 그 소리를 들으면 신라가 조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어전에서도 열받은 왕건이 압박을 가한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전하려고 임희는 나를 부른 것이다.

"신라가 항복하면 유긍달 등이 공을 세우는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공에 비하겠습니까? 결국 견훤이 와서 김부도 따라 오는 것입니다."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임희에게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연우 네가 견훤을 데려오지 못한 상태에서 김부가 항복했다면 상상만 해도 난감한 일이다. 유긍달 등의 기세를 누구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는 확실히 일통삼한의 대업이 이루어지겠구나! 조만간 나도 상산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폐하께서 전국의 군사들을 총동원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연우 너도 표천현에서 사람을 모으거라. 네가 표천현의 은광을 쥐고 있으니 그 재력으로 군사를 상당히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임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미 승부가 난 싸움입니다. 우리 대군이 백제로 진격하면 백제는 그대로 무너질 것입니다. 굳이 표천현 사람들까지 동원해야 할까요?"

군사를 일으키면 돈을 많이 써야 해서 내가 망설이는데 임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군사들을 일으키는 것은 백제 때문이 아니다. 백제가 끝난 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내가 군사를 모으려 하는 것은 이번에 우리 정윤파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지금 다른 대호족들이 전력을 다해 군사들을 모으는 것도 나와 같은 의도다. 자신들의 힘을 이 기회에 보여주려는 거지. 우리 측도 한 명의 사람이라도 더 동원해야 한다. 연우 너도 전력을 다해 군사를 모으거라."

"알겠습니다."

임희의 말을 들으니 나도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아낄 때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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