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 대접 >
"연우 너는 참……"
임희는 내 앞에서 말을 못 이었다. 나는 개경의 정세에 대해 듣기 위해 상산저에 달려왔다. 나주에 가 있느라 오랫동안 못 본 부모님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평소에 명석하던 임희가 저러는 것이다.
"하하하. 제가 없는 동안 개경의 정세는 어찌 흘러갔습니까?"
나는 그런 임희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별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내다가 정윤 전하와 연우 네가 견훤을 데리고 온다는 전갈을 보내면서 난리가 났다. 나도 그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는데 정말 견훤이 왔구나. 견훤이 왔어!"
임희는 멍하니 그 말을 반복했다.
"대호족들이 정윤 전하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움직이진 않았습니까?"
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무리 대호족들의 힘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 일에 대해 수작을 부릴 수 있겠느냐? 견훤이 오는 일을 가지고 무슨 수작을 부렸다가는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들도 이번에는 꼼짝도 못했다. 그런데 진짜 견훤이 오다니. 견훤이!"
임희가 또 멍청한 표정이 돼서 중얼거렸다.
"아버님. 진정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임희가 걱정됐다.
"그 견훤이 왔는데 이 정도면 내가 대단히 침착한 거지. 그런데 연우 너는 설마 견훤이 올 줄 알고 나주로 간 것이냐? 아니면 네가 배후에서 일을 꾸민 것 아니냐?"
임희가 넌지시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수로 제가 그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견훤이 금산사에 갇혀있었다고 들었다. 연우 네가 화엄종의 인맥을 동원해 견훤을 어찌 한 것 아니냐?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된다."
임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금산사는 법상종에 가깝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제가 화엄종 쪽과 인맥이 있어도 백제 내 화엄종들에게는 전혀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화엄종이나 법상종이나 같은 교종 아니냐? 이번 일이 우연이라면 참 공교로운 일이다. 정말이냐?"
임희는 재차 물었다.
"영향력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책략을 쓰면 큰일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새 흐르기 시작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할 줄은 나도 몰랐다.
임희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연우 네가 꾸민 일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다른 대호족들은 어느 정도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화엄종 계열 사찰에 가는 일을 꺼리고 있다는 구나. 원래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에 견훤의 귀부를 보고 뭔가 확신을 얻은 모양이다."
"오호 그렇습니까?"
나는 눈을 번뜩였다. 왠지 이 상황을 한번 이용하면 그럴듯한 책략이 나올 것도 같았다.
"앞으로 우리가 화엄종에 영향력이 큰 것처럼 허장성세를 펼치면 좋겠구나. 그러면 대호족들을 어느 정도는 위축시킬 수 있겠지."
임희가 턱을 쓰다듬더니 그런 의견을 냈다.
"좋습니다."
나는 임희의 말을 듣고 속이 다 시원해져서 외쳤다.
"그 일은 그리 처리하도록 하고. 그건 그렇고 폐하께서 견훤을 이리 후하게 대접하실 줄은 몰랐다. 부럽구나."
임희가 또 견훤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요사이 개경에서는 견훤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대호족들부터 서민들까지 견훤에 대한 소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임희마저도 이런 유행에 휩쓸린 것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준 것이 어마어마하긴 했다.
'저택 수준이 아니라 궁을 하나 내주고 이외에 노비며 식읍도 어마어마하게 줬지.'
물론 나는 미래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다 읽고 왔다. 그런데 이 시대에 와서 직접 체감을 해보니 느낌이 달랐다.
'현대로 치면 강남의 빌딩 몇 채를 왕건이 견훤에게 준 거나 다름없어. 빌딩에서 월세 받듯 식읍에서 소득이 나니. 아니 이 시대 체감상 빌딩 수준도 넘어섰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네.'
임희가 부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견훤을 후하게 대접해야 통일이 되니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건 그렇고 최 선생께서도 근래 너를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상산저에 온 김에 한번 뵙고 가렴."
임희의 말을 듣고 나는 약간 움찔했다. 최치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속에 있던 최치원의 글을 보면 통찰력이 넘치는 사람인데. 설마 나에 대해 뭔가 눈치 채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냥 내 필체를 보고 이상함을 느껴 그런 조언을 남긴 거야.'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임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최 선생께서 확실히 대단하신 분이구나. 연우 네가 이리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다니. 허허허. 그런 분을 상산저에 모시게 된 것은 내 영광이구나."
"최 선생께서는 학문이 워낙 높으시니."
나도 임희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윤비 마마께서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상산저의 별채에서 최치원이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견훤을 만나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제 공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책 정리를 하십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견훤을 데려온 일에 대해 칭찬을 하니 이젠 민망했다. 그래서 나는 교묘히 화제를 돌렸다.
확실히 최치원이 묵고 있는 별채가 어수선했다. 여기저기 책더미가 쌓여있었다.
"상산저에 머물면서 일도 안 하고 글만 쓰니 책 몇 권을 더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책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어서 일을 벌였습니다. 아 그건 그렇고 요사이 공부는 열심히 하십니까?"
최치원이 부담되게 또 그것을 물어왔다.
"요새 하도 시간이 없어서."
나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하긴 견훤이 개경에 왔으니 조만간 일통삼한의 대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바쁘시겠지요. 그래도 나중에 모든 일이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면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세상에는 정윤비 마마께서 제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리 충고를 드립니다."
최치원이 근엄하게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나중에 꼭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보고 최치원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치원을 만난 이후에도 나는 상산저에서 상산부인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주원에 돌아왔다.
내 처소는 텅 비어 있었다. 왕무는 아직도 군영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독수공방인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 동원한 군세가 5만이었다. 고구려 멸망전 때는 신라가 20만을 동원했다.
한반도 내에서 한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선 그 정도 군세가 필요했다. 왕건도 신검을 격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견훤이 귀부해 왔기에 왕건도 이제 최종국면이 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어마어마한 군사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렸다.
왕무는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 요새 군영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대군의 군량, 무기를 준비하고 징발한 군사들의 훈련을 맡았으니, 나주원에 올 시간은 없는 것이다. 아니 왕무가 나주원에 온다면 내가 그런 왕무를 군영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시기였다.
왕무가 이 대군을 준비하는 일을 잘 해내야 차기 국왕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내가 투정을 부릴 새가 없었다.
애초에 왕건이 왕무에게 이 일을 맡긴 것 자체가 대단한 호의였다. 이 과정에서 왕무가 군부 내에서 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심심하다. 오지수나 부를까?'
나는 잠시 그리 마음먹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오지수가 곤란할 것이다. 나는 잠도 안 오는데 억지로 침상에 가서 누웠다.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새벽쯤에야 겨우 잠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차를 한 잔 마시고 한림원을 향해 갔다. 한림원도 요새는 여러 일로 바빴다.
대군을 일으켜 백제를 멸망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한림원도 여러 자료를 준비해서 왕건에게 바치고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 내가 한림원에 들어서자 여러 학사들이 쭈뼛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견훤을 데리고 온 이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면 대개 이런 반응이었다.
'아버님의 허장성세가 통했나? 내가 엄청난 정보력으로 모든 사람의 뒤를 캔다고 생각하고 나를 좀 두려워하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자리에 앉아 일을 하는데 왕건이 대내학사 김악과 함께 한림원에 들어섰다. 그러더니 왕건도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연우 네가 상보께서 결국 나에게 올 것이라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네가 절망하고 있는 나를 격려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연우 네가 결국 그 일을 해냈구나!"
왕건의 말은 뭔가 미묘했다.
'내 예측이 맞았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해냈다고 말하네. 설마 왕건도 이 일을 내가 꾸몄다고 생각하나? 난감하군.'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 어쨌든 상보께서 오셨으니 이번에는 확실히 통일이 되겠지? 내가 고창에서 100명이 넘는 호족들을 항복시켰을 때, 서라벌을 방문했을 때, 공직이 항복했을 때마다 통일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때마다 백제가 수를 내서 버텨냈다. 이번에는 반드시……"
왕건은 한림원의 학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곁에서 김악이 말했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백제가 버틴 것은 다 견훤이……아니 상보의 군략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보께서 개경에 오셨으니 백제가 버티겠습니까?"
김악은 신나게 입을 열다가 왕건의 눈치를 보며 견훤을 상보로 높여 불렀다. 왕건이 견훤에 대해 부를 때는 반드시 상보로 높여 부르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최소한 왕건이 보는 앞에서는 견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김악의 말이 이번에는 확실히 옳았다.
"그래. 그래야지."
왕건도 김악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김악은 왕건을 따라가지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 공을 이루신 것을 보고 새삼 저는 공자의 위대함을 깨달았습니다."
"예?"
나는 김악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다.
"결국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 선조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그 먼 나주까지 가신 덕에 상보를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공주 마마의 효심에 감동해서 하늘이 일을 이리 만든 것입니다. 공자께서 쓰신 춘추를 보면 이런 이치가 다 적혀있습니다. 사람이 성인의 말씀을 따라 효를 다하면 일이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도 이번 일을 보고 이 이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께서 큰일을 하셨습니다."
김악이 흐뭇하게 나에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김악은 유학자고 상당히 신념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보고 유학자인 자기 입맛에 딱 맞는 사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일부러 와서 칭찬까지 건네는 것이다.
'김악의 반응을 보니 오지수가 최소 고려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명성을 날리겠는데.'
나는 이번 일로 정윤파가 얻은 정치적 이득이 크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 와중에 왕건이 우리 쪽을 보며 말했다.
"김악이는 그런 말을 늘어놓아 연우를 귀찮게 하지 마라. 김악이 네가 책을 써서 그런 내용을 기록해 놓으면 되지 뭘 말을 길게 늘어놔? 그건 그렇고 연우야. 오늘 일을 마치면 나와 함께 남궁에 가서 상보를 만나고 오자. 상보께서 지금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시겠느냐? 내가 가서 마음을 좀 달래드려야지. 연우 네가 그나마 상보와 안면도 있으니 중간에서 잘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