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 상보 >
전각에서 견훤 일행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저택 정리를 마쳤습니다. 귀인들이 지낼 수 있게 만들어놨습니다."
나이 든 시녀 하나가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폐하.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준비가 됐다는 소리를 듣고 왕무가 의젓하게 예를 갖추며 견훤에게 말했다. 견훤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견훤의 후비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그 막내 아들인 능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주까지 도주해 오느라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견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일행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나와 왕무는 몸을 일으켜 그런 견훤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시녀들과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견훤은 우리가 준비한 저택으로 향했다. 견훤이 사라지자마자 왕무는 나를 보며 외쳤다.
"견훤이 오다니!"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왕무가 저런 표정도 짓네. 눈을 저리 크게 뜨고. 이 모습도 잘 생겼다. 이런 왕무의 얼굴은 처음 봐. 나주까지 온 보람이 있네.'
왕무는 평소에 표정 변화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왕무와 오래 지낸 사람만이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왕무도 정말 놀란 것 같았다. 누가 봐도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왕무의 이런 새로운 모습을 계속 찾아내야지.'
내가 흐뭇하게 왕무를 바라보는데 왕무는 나를 보며 물었다.
"설마 국선은 이것을 짐작하고 나와 함께 나주에 온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물론 백제의 내정이 어지러우니 나주에 있으면 적당한 백제의 귀족이 투항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견훤이 올 줄은……"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왕무에게 둘러댔다.
'왕무에게는 내 모든 걸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걸 알려주면 일만 복잡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왕무에게 적당히 듣기 좋게 둘러댔다. 그런데 이게 점점 힘들어졌다.
"그렇군요. 국선. 어쨌든 국선 덕에 우리가 이번에……"
왕무는 감격에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왕무도 이번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견훤을 무사히 고려까지 데리고 가면, 고려의 삼한통일 과정에서 최대의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정윤 전하."
기뻐하는 왕무의 모습을 보니 내 복잡한 마음도 가라앉는 것 같아서 나는 왕무의 손을 잡았다.
그때 우리가 견훤에게 딸려 보냈던 시녀들 중 하나가 황급히 달려왔다.
"견훤 일행이 저택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윤비 마마의 명대로 은밀히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습니다."
"잘했다. 반시진마다 1명씩 와서 이리 보고를 해라. 어 그래 이걸 좀 받아라."
나는 시녀를 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조그마한 은조각 하나를 건넸다. 견훤을 감시하는 일은 워낙 중요해서 시녀들 사기를 북돋을 필요가 있었다.
"정윤비 마마.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냐?"
"견훤이 아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준비해둔 처소에 들자마자 견훤의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창가에 몸을 웅크리고 들었는데 계속 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녀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보고를 마친 시녀가 물러나자마자 왕무가 나를 보며 말했다.
"견훤이 아프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대화를 나눌 때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심하다니."
"우리 앞에서는 멀쩡한 척을 해야 좋은 협상을 할 수 있으니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왕무에게 대답했다. 견훤의 병에 대해 떠올리니 나는 알쏭달쏭 했다.
'견훤은 실제 역사에서 삼한통일 직후에 병으로 죽는다. 그런데 견훤이 죽는 시점이 왕건과 고려에게 너무 유리하다. 병으로 죽었을지 아니면 왕건이 손을 썼을지? 어쨌든 이 시대에 와서 이것 하나는 좋군. 견훤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알 수 있겠어.'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견훤이 왔다는 소식에 나주성은 한동안 떠들썩했다.
"신검이 견훤을 찾아가려고 나주를 칠 수도 있습니다.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지난 밤사이 그나마 얼추 수비태세를 정비해놨습니다. 또 이 소식을 폐하께 전하기 위해 5척의 배를 개경에 보냈습니다. 조만간 개경에서 지시가 내려올 것입니다."
유금필은 약간 지친 표정으로 우리에게 와서 말했다. 유금필이 함께 와서 다행이었다. 이런 실무는 다 처리해주는 것이다.
"제 생각엔 최대한 빨리 견훤과 함께 개경에 오라는 명이 내려올 것입니다."
왕무가 그런 예측을 했다.
'정확해!'
나는 왕무가 정답을 맞히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저도 그리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개경에서 지시가 내려오자마자 움직일 수 있도록 전선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저는 계속 국경 쪽을 살피겠습니다."
유금필은 그리 말하고 다시 전각을 나섰다. 전각에 찾아오는 것은 유금필뿐만이 아니었다. 나주 인근의 관리들, 호족들이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달려오고 있었다.
왕무는 침착하게 그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 상황을 알려줬다.
그리고 오지수 역시 달려왔다.
"견훤이 왔다니 그게 정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나서서 오지수에게 답해줬다.
"아니 그럼 이 기회에 견훤을 혼내줘야죠. 견훤이 여태까지 한 일이 있는데. 우리 쪽에 와서 호의호식하는 게 말이 되나요!"
오지수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따지고 보면 오지수의 외가가 견훤에 의해 망했다. 당연히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게 상식적이고 평범한 반응이야. 그래도 오지수를 잘 달래놔야지. 당장은 견훤의 비위를 맞춰야 해. 실제 역사를 보면 왕건은 귀부해온 견훤을 후대했으니. 그에 장단을 맞춰야지.'
그래서 나는 또 오지수의 손을 잡고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왕무는 한참 나주성의 전각에서 사람들을 상대했다. 겨우 그 일이 끝나니 또 견훤이 마음에 걸렸다.
"국선. 아마 견훤이 지금 상당히 초조할 것입니다. 개경의 폐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견훤의 운명이 결정되니 말입니다. 견훤에게도 가서 그 마음을 달래놔야 하지 않습니까?"
왕무가 나에게 말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맞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견훤의 처소에도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견훤이 귀부해 오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고 있었다.
'역시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를 진작 열어보기 잘 했어. 지금처럼 바쁜 때였다면 그 주머니를 열어볼 엄두도 못 냈어. 설사 열었다 해도 왕무에게 제대로 고백할 겨를도 없었을 거야.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니.'
나는 새삼 내가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를 지었다.
초조해 하는 견훤도 달래주고 나주의 호족들도 진정시키며 시간을 보내는데 우리의 보고를 받고 개경에서 답신이 왔다.
-정윤과 정윤비, 대장군은 수군을 거느리고 즉시 개경으로 귀환하라! 내가 왕만세를 보내 중간에 합류하게 하겠다. 신검이 움직이기 전에 견훤을 개경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동봉한 서신을 견훤에게 건네주도록.
견훤에게 줘야 하는 서신을 보고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견훤에게 주기 전에 한번 몰래 열어볼까? 왕건도 나보다 먼저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를 열어봤잖아. 이 서신의 내용이 진짜 귀중한 사료가 될텐데.'
나는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왕무는 냉큼 그 서신을 집어 들더니 말했다.
"서둘러 견훤에게 이 서신을 전해줍시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 왕무를 보고 나는 서신을 몰래 열어볼 생각을 접었다.
'왕무 덕에 고민을 할 필요도 없어졌네. 그냥 견훤에게 주자.'
우리는 황급히 견훤의 처소로 달려가서 서신을 건넸다. 견훤은 한참 동안 그 서신을 읽었다. 서신의 내용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반복해서 서신을 읽으며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막상 개경으로 가려니 견훤의 심정이 복잡한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견훤은 개경에 갈 수밖에 없다.'
시간을 끄는 견훤을 보고 나는 갑갑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왕건의 서신을 다시 한번 보던 견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개경에 가겠다."
나와 왕무, 오지수, 유금필 그리고 견훤 일행은 준비된 전선에 올라탔다.
"꼭 저도 견훤과 같은 배에 타야 하나요? 좁은 선실 안에 있으면 견훤을 봐야만 하잖아요? 저는 다른 배를 타고 가면 안 되나요?"
배에 오르기 전에 오지수가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공주 마마. 좀 참으세요. 개경까지 가는 길만 참으면 돼요."
나는 또 그런 오지수를 달래기 위해 애를 썼다. 다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개경에 당도하면 수많은 개경 주민들이 선착장에 구경을 하러 나올 것이다. 그때 나와 왕무, 오지수가 견훤과 함께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견훤이 고려에 귀부하는 순간이 사실상 삼한통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개경 주민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견훤 곁에 나와 왕무, 오지수가 견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대호족들이나 개경 주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오지수의 정치적 체급도 이번 일로 올릴 수 있어. 그래야 향후 오지수의 혼인 문제도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오지수를 설득했다.
"공주 마마가 없으면 개경까지 가는 길이 너무 지루할 것 같아요. 제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요."
나는 그런 거짓말까지 쳐가며 오지수를 달랬다.
'나는 너무 바빠서 지루할 틈이 없어. 욕구불만인 상황인데 지루할 리가?'
따지고 보면 왕무에게 고백을 하고 며칠 동안만 함께 시간을 보냈지 그 이후에는 너무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나주에 오는 선실에서도 눈치를 보느라 못 했고, 나주에 가서도 견훤이 오니 일이 많아서 못 했고, 이번 항해 때는 손도 못 잡아. 견훤도 있고 그 일행도 타고 있는데 그럴 수가 없어.'
나는 갑자기 좀 서글퍼졌다. 왕무와 며칠 내내 한 침상에서 지내던 때가 그리웠다. 그런데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오지수는 놀란 것 같았다.
"언니. 걱정마세요. 제가 언니랑 같이 배에 탈게요. 견훤한테도 잘 할 게요."
그러면서 오지수가 서글퍼하는 나를 달래주었다.
유금필이 이끌고 온 고려 수군은 나와 왕무, 견훤 등이 탄 배를 호위하며 북상하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신검이 전력을 다해 수군을 내서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유금필이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말했다. 그래서인지 유금필은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수군 군사들을 감독했다.
그렇게 이틀 정도 항해했을 때 척후병들이 외쳤다.
"우리 앞에서 엄청난 대함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적, 적이 아닙니다. 왕만세 장군이 오셨습니다. 대장기의 이름이 보입니다."
이윽고 200척은 될 만한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선두에는 대장인 왕만세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왕건이 그야말로 고려의 전 수군을 총동원했군. 아예 개조가 안 된 상선이며 조운선도 숫자를 채우려고 싹 다 끌어모아 보냈구만. 이렇게 숫자로 무력시위를 해서 신검의 기를 꺾을 심산이야.'
나는 함대의 규모를 보고 왕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왕만세는 작은 배로 갈아타고 우리가 탄 배로 건너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견훤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상보! 폐하께서 이미 상보의 칭호를 내리시고 상보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쳐놨습니다."
그러더니 왕만세는 나와 왕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이번에 대공을 이루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지금 온 개경이 이 일로 인해 떠들썩합니다. 또한 우리 수군이 삼한 땅을 위해 이 일을 맡게 돼서 영광입니다."
왕만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왕만세의 얼굴만 봐도 개경의 반응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왕만세는 정윤파 인사여서 더 감격하는 것 같았다.
나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왕무의 손을 꽉 쥐었다.
왕만세가 합류해 270척 가까운 대함대가 된 고려 수군의 앞을 막을 것이 없었다. 신검도 감히 나올 엄두가 안 난 모양이다.
함대는 그대로 개경까지 무사히 당도했다. 멀리 벽란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직접 선착장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벽란도에서 배가 와서 그런 소식을 알렸다. 벽란도를 바라보니 이미 인산인해였다. 왕건과 고려의 중신들 외에도 수많은 개경 주민들이 선착장에 나와 있었다.
그 사람들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견훤의 귀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상보! 상륙할 준비를 하시지요."
나와 왕무는 견훤에게 말했다. 견훤은 따로 준비한 비단옷을 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개경! 저곳이 개경인가?"
견훤은 자신의 후비, 그리고 막내아들 능예와 함께 배 갑판에 섰다.
나는 재빨리 왕무, 오지수, 유금필, 왕만세와 함께 백제인 3인을 둘러싸듯이 섰다. 왕무는 정윤의 예복을 입었고 나와 오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유금필과 왕만세도 지위에 어울리는 예복을 걸쳤다.
'이러면 고려 정윤파가 견훤을 데려왔다는 것을 개경주민에게 시각적으로 알릴 수 있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배 갑판에 섰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개경 주민들에게 손도 가끔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견훤이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왕건이 다가오는 모습도 보였다.
'견훤이 상륙하고 나서부터는 왕건이 돋보여야 하니 뒤에서 시립하고 있자.'
나는 그런 판단을 하고 상륙하고 나서부터는 견훤과 약간 떨어져서 뒤에 시립했다. 왕무와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중신들을 거느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왕건의 얼굴도 보였다. 왕건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그러더니 견훤의 두 손을 쥔 왕건이 대뜸 외쳤다.
"아버님! 아버님을 직접 봬서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