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 경악 >
나는 박영규가 보낸 서신을 읽고 잠시 헷갈렸다.
'이번에는 정말 관흔의 여동생이 오나? 역사 기록을 보면 이즈음에 견훤이 와야 하는데. 그래! 견훤이 고려로 망명할 때 혼자 온 게 아니었어. 견훤을 시중들던 후비와 막내아들과 함께 왔으니. 그러면 딱 맞군. 바로 견훤이 간다고 하면 난리가 나니 견훤의 후비, 막내아들을 관흔의 일가로 위장한 거야.'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나는 대강 사실을 때려 맞출 수 있었다. 특히 백제 장군 박영규는 역사 속에서 견훤을 따라 백제를 배반하고 고려에 귀부하는 인물이었다.
이 박영규가 움직인 것을 보면 이번에 오는 것은 확실히 견훤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유금필이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 유금필에게도 말해줘야 할까? 아니야. 어떻게 견훤이 오는 줄 알았는지 캐물으면 변명할 말이 없어.'
나는 그런 판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관흔의 여동생 일은 어찌 처리하실 것입니까?"
"기병을 한 100기 정도 보내 그들을 맞이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유금필이 그리 대답했다.
"직접 가실 생각은 없습니까?"
"관흔의 여동생이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닙니다. 관흔 본인이 오면 또 몰라도."
"나는 정윤 전하와 함께 직접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과부가 어린 아들만 데리고 망명을 한다니 그들이 불쌍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그들을 귀부시키는 것도 작지만 공은 공 아닙니까? 군사들을 동원해서 나주까지 와서 그냥 아무 공 없이 개경으로 돌아가면 대호족들이 또 트집을 잡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 망명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공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내가 넌지시 유금필에게 말했다.
사실 나주성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망명한 견훤을 맞이해도 왕무의 공이 되긴 했다.
'그러나 좀 더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야 해! 역사서에 왕무와 견훤의 첫 만남이 기록될 정도로! 그래야 왕무가 그 공로와 위엄으로 왕이 될 수 있어.'
왕무가 직접 나가서 고려 국경에 들어오는 견훤을 맞이해야 뭔가 좋은 그림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나와 왕무가 직접 마중을 나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유금필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외척이고 정치적 감각도 뛰어났다.
내 말을 듣자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생각해 보니 관흔이 백제에서 이름난 용장입니다. 그 여동생을 받아들이면 고려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기병 500기를 동원해서 제가 직접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를 호위하겠습니다."
나와 왕무가 직접 나서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자 유금필은 바로 이리 말해줬다.
그런 유금필을 보며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유금필이 오래 살아주기만 하면 내가 이리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데. 유금필이 곡도로 유배갔을 때 내가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이제는 유금필도 정윤파에 가깝다. 유금필의 힘만 있으면 다른 대호족들도 걱정이 없어. 그런데 문제는 유금필이 왕건이 죽기 전에 죽는다는 거야!'
왕무가 왕위를 계승할 때가 되면 유금필이 없기 때문에 그 힘을 빌릴 수가 없었다. 거기에 유금필은 개인의 능력이 탁월한 거지 그 가문의 힘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그 전까지 최대한 공을 세우고 세력을 모은다.'
나는 다시 한번 그런 다짐을 했다.
"관흔이라. 뭐 적이지만 나는 그에게 그리 나쁜 감정은 없습니다. 그 여동생이 그리 됐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데리러 갈 만 합니다."
관흔의 여동생을 맞이하러 가자는 내 말에 왕무는 그리 대답했다.
그리고 유금필이 동원한 기병 500기의 호위를 받으며 나와 왕무는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국선! 힘들지는 않습니까?"
왕무가 갑자기 나에게 그리 물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왕무의 질문이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딱히 힘들 이유가 없는데 왜 힘드냐고 묻지?'
그런데 그런 나를 보며 왕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날 부석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탈출할 때 관흔의 기병이 우리가 본영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런 관흔을 피할 때 나와 국선이 함께 말을 탔습니다."
"그때야 확실히 제가 무리를 해서……"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때 관흔이 우리를 괴롭혔어. 나도 잊고 있었는데 왕무는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때 일을 떠올리니 나는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처럼 왕무와 같이 말을 타고 갈까?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지금 진지한 일을 하러 가는 거야.'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휘저었다.
"국선 괜찮습니까?"
그런 나를 보고 왕무가 약간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 사이에 마침내 우리는 국경에 이르렀다.
잠시 기다리니 멀리서 20명쯤 사람들이 수레 한대를 호위하며 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을 탄 사람은 5명이고 나머지는 걸어서 수레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유금필이 재빨리 척후 하나에게 명을 내렸다.
"저들에게 우리 쪽에서 귀인이 직접 마중 나왔다는 것을 알려라. 예를 제대로 갖추라고 해라!"
그러면서 유금필은 슬쩍 나와 왕무의 눈치를 봤다.
이윽고 수레를 호위하며 백제인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장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미리 약속을 해놨다고 해도 이렇게 적국에 망명을 오니 쭈뼛쭈뼛할 수밖에 없었다. 수레 안에서 웬 귀부인과 그 아들처럼 보이는 소년이 나왔다.
확실히 얼핏 보면 관흔의 여동생과 그 여동생의 아들이 온 줄 알 것이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께서 너희들은 가엾게 여겨서 직접 나오셨다."
유금필이 백제인들을 바라보며 생색을 냈다. 그 말을 듣고 백제인들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다만 그 말을 듣고도 귀부인과 소년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손하게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백제 국왕의 후비와 왕자니 남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어색하겠지. 세상 물정도 모르고. 그래서 저러는 거야. 그건 그렇고 견훤은 어딨어? 노인을 찾으면 되는데.'
나는 20명쯤 되는 백제인 일행을 꼼꼼히 살폈다. 그들 중 딱 1명이 노인이었다.
덩치가 매우 큰 노인이었는데 허름한 옷을 입고 수레를 정돈하고 수레를 끄는 말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누가 봐도 하인처럼 보였다.
나도 잠시 망설였다.
'저 자가 견훤이 아니면 어쩌지? 그러면 나와 왕무가 망신을 당하는 건데. 아니야. 견훤은 원래 신라의 하급군관 출신이고 직접 온갖 고생을 다 했어. 그래서 저런 일을 하는데 익숙해. 하인으로 위장해도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어. 거기다가……'
노인을 꼼꼼하게 살핀 결과 나는 그가 견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이 너무 겁을 먹어서 그런지 정윤 전하께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좀 달래주고 나서……"
유금필이 왕무를 보며 그런 말을 하는데 나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왕무는 내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따라 말에서 내리더니 외쳤다.
"국선 무슨 일입니까?"
"저기 보이는 저 노인에게 우리 예를 갖추도록 해요."
나는 왕무가 곁에 오자 그렇게 속삭였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정말 멋진 그림이 나오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노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왕무 역시 놀란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갔다. 나와 왕무가 그 노인 쪽을 향해 걷자 백제인들은 모두 혼비백산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감히 우리 앞을 막지는 못했다.
나는 그 노인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길게 읍을 했다. 내 곁에서 왕무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했다. 나와 왕무가 읍을 하자마자 장내에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마마! 왜 이러십니까?"
뒤에서 놀란 유금필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유금필과 함께 온 고려 기병 500기도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것 같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노인이 견훤이 아니라면 고려 정윤과 정윤비가 일개 하인에게 읍을 한 게 된다. 500기의 기병들이 보고 있으니 소문은 반드시 날거고 조롱거리가 되겠지. 하지만……'
우리의 인사를 받은 노인이 놀란 기색으로 손을 휘저었다.
"귀인에서 어찌 저 같은……"
나는 노인의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백제를 건국하신 분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내 말을 듣고 노인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 곁에서 왕무도 놀랐는지 내 손을 꽉 잡았다. 뒤에서 유금필이 뭐라 외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순간 노인의 표정이 변했다.
"어떻게 알았지? 설마 박영규가 그대들에게 이야기를 했나? 분명 박영규는 내 정체를 숨겨준다고 했는데."
"박영규는 폐하의 후비와 왕자님을 관흔의 여동생과 그 여동생의 아들로 꾸몄습니다. 저도 그런 줄 알고 있다가 방금 폐하의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왕무는 나와 견훤의 대화를 듣고 놀랐는지 내 손을 더 꽉 쥐었다.
"관흔이라. 관흔도 참 아깝게 죽었지. 그래 맞다. 내가 백제국왕 견훤이다!"
덩치 큰 노인은 어깨를 쭉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내 뒤에서 들려오던 유금필의 발소리가 끊겨서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유금필은 입을 쩍 벌린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확실히 유금필은 전생자가 아니구나. 그동안 하도 예측을 잘해서 의심을 했는데. 그런데 유금필이 저러는 건 처음 본다.'
그 사이 내 곁에서 왕무가 입을 열었다.
"진, 진짜 폐하라면. 뭘 어떻게?"
말까지 더듬는 왕무를 보고 견훤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면 곧 신검의 군사들이 쫓아올 테니 우선은 나주성으로 가는 것이 좋겠군."
확실히 견훤의 말이 옳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유금필이었다.
"서둘러 대오를 갖춰라! 한시라도 빨리 나주성으로 돌아간다. 척후는 전군에 경계령을 전해라! 백제군이 어찌 나올지 모르니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유금필은 다시 말에 올라 군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왕무도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고려 기병들은 이제 견훤과 백제인들까지 호위하며 나주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주성에 당도한 일행은 겨우 숨을 돌렸다.
견훤을 위한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렸다. 적당한 저택을 구해서 쓸고 닦고 집기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 시간동안 나와 왕무, 유금필이 나주성 전각에서 견훤과 그 일행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내가 온 걸 알았나?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니 그대가 가장 먼저 눈치를 챈 것 같은데. 몹시 궁금하군."
차를 마시면서 견훤이 말했다. 그 곁에서 유금필도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그것이 너무 궁금합니다. 제가 성을 둘러보며 수비태세를 점검해야 하는데 그걸 정윤비 마마께 물어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금필을 바라봤다.
'유금필의 새로운 모습을 나주에서 많이 보네. 하긴 유금필이라도 이 상황에서 놀랄 수밖에 없지.'
왕무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둘러댈지는 이미 다 생각해놨기에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애초에 고려로 망명을 하는 급박한 상황인데 늙은 하인을 데려올 리 있습니까? 젊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하인을 데려오는 법입니다. 폐하께서 하인의 복장을 하고 계셨지만 그 모습을 봤을 때 이미 저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하인이 아니라 극히 중요한 인물이기에 함께 온 것을 눈치챘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어색하긴 해."
견훤이 감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윤 전하께서 직접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 다른 백제인들이 다 놀라는데 폐하께서는 말고삐를 잡고 태연하게 서 계셨습니다."
이건 견훤에 대한 일종의 아부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 곁에서 유금필이 이 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마지막으로 폐하의 신발이 너무 깨끗했습니다. 걸어서 수레를 따라온 다른 백제인들의 신발과 달랐습니다."
이건 진짜 내가 관찰해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막판에 나는 이 사람이 견훤이 아닌데 인사를 하면 망신을 당한다는 생각에 꼼꼼히 견훤을 살폈다. 그러다가 신발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나는 수레를 타고 오다가 국경 가까이에서 걷는 척 했지."
견훤이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나주성의 수비를 위해 나가보겠습니다."
궁금증이 해소된 유금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허겁지겁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