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 망명 >
"우리 때문에 대장군께서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또 나주로 향하게 됐습니다."
나는 예의상 갑판 위에서 유금필에게 그리 말했다. 나주를 평정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유금필은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다시 나주로 가게 됐다. 유금필뿐만 아니라 전선 70척에 군사 1500명이 동원됐다.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나는 속으로는 조금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견훤이 오면 다시 유금필이 내려가야 하는데. 우리 덕에 좀 더 일찍 가고 좋지. 그런데 내가 왜 이러지?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라도 미안함을 느꼈을 텐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뻔뻔해진 것 같아. 왜 이리 됐을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유금필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건 그렇고 몇 년 안에 백제에서 변란이 터질 거라는 정윤비 마마의 예측이 귀신같이 들어맞았습니다. 오늘 이리 정윤비 마마께서 나주로 가시는 것을 보니 나주에서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듭니다."
뜨끔
그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유금필이 눈치가 빠르긴 하구나. 오지수를 앞세워 자연스럽게 일을 꾸몄는데도.'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둘러댔다.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 나주에 가고 싶다고 하시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나주에 무슨 일이 터질까요? 하긴 신검이 왕이 되었으니 백제 내에서 마음이 불편한 대신이나 장군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 한 둘이 나주로 넘어올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내 말을 듣고 유금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30년 넘게 백제를 다스리던 견훤이 하루아침에 그리 됐으니, 필시 백제가 동요할 것입니다. 나주를 통해 고려로 들어오려 하는 사람이 생기겠지요."
다만 유금필도 견훤 본인이 직접 망명하리란 것은 예상도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만 선실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유금필에게 그리 인사를 건네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유금필과의 대화는 항상 부담스러워. 사람이 워낙 예리한 면모가 있어서.'
그러다가 나는 내 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왕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연우야!"
왕무는 나를 보자마자 그대로 껴안았다.
"무야!"
나도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왕무에게 안겼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정윤 전하. 배 안에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가 오지수 공주 마마도 계실텐데."
나주로 가는 배 안에서 나는 오지수와 함께 선실을 쓰고 있었다. 고려 정윤과 정윤비, 공주가 타는 배인만큼 배가 크긴 컸다. 그러나 이 시대 고려의 전선이 크다 해도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군사들이 타고 무기, 식량까지 실으면 공간이 빠듯했다.
'이 좁은 곳에서 나와 왕무가 재밌고 시간 잘 가는 일을 하면 분명 모두가 눈치를 챌 거야! 그럼 군사들 사기에도 악영향을 끼쳐. 거기에 우리가 나주로 가는 명분이 전사한 오씨 일족의 제사를 지내주기 위해서야. 그런데 그런 배 안에서 우리가 이러면 안 돼.'
여러 모로 곤란한 상황이라 우리는 나주로 가는 중에는 서로 떨어져있기로 했다.
"지수는 지금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잠깐 국선을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
청순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왕무를 보니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나는 가볍게 왕무에게 입맞춤을 했다.
"국선!"
왕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여기까지만 해요."
내 말을 듣고 왕무는 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왕무가 이번에는 나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깊은 입맞춤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입술만 대었다가 떼는 건데도 조마조마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언니는 지루한 항해도 잘 참네요."
갑판 위에서 오지수가 나에게 푸념을 했다.
"지루한가요?"
"예. 이렇게 긴 항해는 처음 해보는데 힘드네요. 바다도 계속 보니 똑같네요."
"그래도 지금처럼 지루한 게 좋은 거예요. 백제군이 지금 수군을 운용할 여력이 없어서 우리가 조용히 나주까지 가는 거예요."
나는 오지수를 달랬다. 물론 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좁은 배 안에서 오지수와 사람들 눈을 피해 왕무와 잠깐씩 손도 잡고 입맞춤도 하는데.'
그때마다 오싹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왕무를 만난 이후에는 지루함을 느낀 적이 없어. 오지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지루함을 덜 느낄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자연스레 김장명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지수도 혼인을 해야 할 나이였다.
'김장명에 대해 물어봐도 되나? 이런 건 원래 이런 식으로 묻는 게 아닌데. 그런데 명주 세력과의 혼인은 왕무의 운명에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그래서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었다.
"요새도 명주의 장명이와 연락하고 지내나요?"
내가 묻자 오지수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여전히 서신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장명이도 아직 혼인을 안 했다고 하네요."
그 말을 듣자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김장명은 나이로 봐서 진작 혼인을 했어야 해. 그런데 여태 미루고 있는 것은 명주 세력도 아직 오지수에게 기대를 품고 있는 거야. 하긴 그 사람들도 계속 명주에 머물고 싶지는 않을 거야.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오지수란 끈을 놓칠 수는 없었겠지.'
오지수도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니 김장명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었다.
"공주 마마와 장명이가 잘 되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나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제가 명주에 시집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오지수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오지수도 다 컸구나. 대호족들이 정윤파와 명주의 연결을 방해하려고 온갖 수작을 부릴 것을 다 알고 있어.'
나는 그런 오지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마세요. 제가 무슨 수라도 쓰겠습니다."
"언니만 믿고 있을게요."
오지수는 내 말을 듣고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어찌 해줄 거라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런 오지수를 보니 내 마음은 또 복잡해졌다.
'수군을 장악하고 발해 유민을 포섭하는 일은 내 미래 지식을 이용해 얼렁뚱땅 넘어갔다. 허나 명주와의 혼인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 그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우리를 방해할 텐데. 그런데 나도 이젠 밑천이 다 떨어져 가서. 뭐 쓸만한 거 없나? 잠깐이라도 유긍달 등을 침묵시킬만한 게 있어야 해. 그 틈에 확 오지수와 김장명을 이어주는거지.'
나로서는 또 다른 과제가 생긴 셈이었다.
'정말 나는 심심할 틈이 없네.'
긴 항해 끝에 일행은 나주에 당도했다.
"나주가 비록 다시 우리 고려 땅이 되었지만 백제 잔당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항상 호위들을 데리고 다니십시오."
유금필은 상륙하기 전 우리에게 그런 당부를 했다. 우리는 완전무장을 한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주에 상륙했다.
"무, 무섭네요."
전장의 분위기를 처음 느껴보는 오지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일행은 왕무의 외가인 오씨 집안의 근거지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우리를 안내한 유금필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에 원래 오씨 집안의 성과 저택이 있었습니다. 다만 6년 전에 견훤이 나주를 함락시켰을 때 성과 저택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리 되다니."
나는 흔적도 안 남아있는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있을 왕위계승경쟁에서 나주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겠군. 재건을 하려면 족히 수십 년은 걸리겠어. 왕건이 괜히 나주왕후에게 미안해한 게 아니야. 나주왕후가 안 와서 다행이군. 이걸 직접 봤으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거야.'
그 사이 왕무와 오지수 남매는 멍한 표정으로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이리 놀랐는데 외가가 이리 된 것을 본 왕무 남매는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제가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오씨 일족들을 힘닿는 대로 구해서 나주성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정윤 전하를 본다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멍하니 서있는 왕무 남매를 보기 괴로웠는지 유금필이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왕무가 정신을 차린 듯했다.
"나주성에 가봐야겠습니다."
왕무는 말에 오르며 말했다.
일행은 한달음에 나주성까지 달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유금필의 말대로 겨우 목숨을 건진 오씨 일족들이 모여 있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공주 마마께서 저희들을 잊지 않고 이리 찾아와 주시니……"
오씨 일족들은 우리 앞에 절을 하며 눈물을 흘리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유금필이 이들을 구출해내고 식량이며 의복을 넉넉히 지급했지만 지난 6년간 고초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여러분들이 나주에서 견훤의 후방을 어지럽혀서 고려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나는 고려의 정윤으로서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왕무는 절을 하는 오씨 일족들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와 오지수도 일제히 달려가 그들을 일으켰다.
그렇게 오씨 일족들과 만난 왕무가 유금필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주에 좀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외가를 수습하려면 내가 직접 나서서 일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맞아요. 맞아."
오지수가 왕무를 거들었다.
"정윤 전하 뜻대로 하십시오. 이왕 15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동원해서 나주까지 왔는데 잠깐 있다가 가면 오히려 손해입니다. 저 역시 한동안 머물며 나주를 안정시킬 참이었습니다."
유금필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행은 한동안 나주성에 머무르게 됐는데 확실히 이곳도 막 수복해서 그런지 어수선했다. 왕건이 괜히 오지수를 안 보내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백제군의 대규모 침공은 없었지만 소요사태가 끝없이 일어났다.
섬에 숨어있던 백제 잔당들이 식량을 훔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했다. 또 백제 쪽에서 계속 군관들이며 군졸들이 투항해 오고 있었다. 신검이 백제를 다스리려면 군부를 장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견훤의 직계라 할 만한 사람들이 숙청되고 있었다.
숙청대상이 된 백제 군관들이나 군졸들이 자주 투항해왔다. 이들을 추격하는 백제군이 국경을 넘는 일도 있어서 나주는 소란스러웠다.
견훤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는 이 투항병들의 일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투항해 오는 백제 군관과 군졸들 중 분명 신검의 세작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주는 우리 고려 본토와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백제 쪽이 세작들을 심어놓고 한번 일을 벌이면 다시 뺏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투항해 오는 사람들을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거 참."
그런 내 곁에서 유금필은 입맛을 다시며 나에게 말했다. 유금필도 투항병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세작들을 걸러내느라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저도 장군을 힘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견훤의 망명에 숟가락을 얹으려면 투항병들과 관련된 업무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심을 쓰는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주성에 보고 하나가 들어왔다.
"승주의 박영규가 밀사 하나를 보냈습니다."
"박영규가? 들라고 하라."
유금필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승주는 오늘날의 순천이고 나주와 가까웠다. 나주를 지킬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백제 장군 중 하나가 박영규였다.
그 박영규가 밀사를 보냈다는 소리에 유금필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유금필의 일을 도우며 곁에서 함께 보고를 들었다. 나는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견훤이 드디어 오는구나! 박영규가 움직였다면 필시 견훤의 일이다!'
그리고 군졸들의 감시를 받으며 박영규의 밀사가 유금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 주인 어른께서 대장군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밀사는 서신 하나를 건넸다. 서신을 다 읽은 유금필은 나에게도 그 서신을 보여주었다.
-내가 장군 관흔과 평소에 친했는데 이번 난리 때 그 사람도 죽었소. 그 관흔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과부로 어린 아들을 키우고 있소. 별 위협이 될 사람도 아닌데 연좌되어 죽을 처지구려. 내 이 모자를 고려로 망명시키고 싶은데 대장군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소.
"박 장군을 돕겠다고 전해라."
유금필은 밀사를 향해 그리 말했다. 그러더니 유금필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예측이 이번에도 들어맞았습니다. 하긴 이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긴 합니다. 관흔의 여동생이라.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 고려의 관용을 보여주기에 딱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