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45화 (145/216)

< 145 : 돌아보다 >

-조고각하(照顧脚下)

마후라 대사가 준 주머니 속의 글귀는 짧았다.

"조고각하라. 다리 아래를 밝혀서 돌아보라고? 다리 아래를……"

나는 비로소 왕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 이 글귀를 보면 누구나 상투적인 교훈의 말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가 마후라 대사가 입적하기 전 왕건에게 이 글귀가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 이후 백제수군이 개경을 공격했어."

왕건이 마후라 대사를 마지막으로 만날 때 자신의 다리로 근거지인 개경의 땅을 딛고 있었다. 왕건 입장에서는 마후라가 백제수군이 개경을 습격할 것을 예견하고 그런 경고를 해줬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건은 마후라가 남긴 글귀를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 경우에는……"

나는 손을 벌벌 떨며 고개를 숙여 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딛고 있는 바닥뿐만 아니라 치마를 입고 있는 내 하반신이 보였다.

남자의 몸에서 여자가 된 내 입장에서는 조고각하란 말을 다른 사람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리 아래를 돌아보라는 마후라의 말이 내겐 일종의 암시로 느껴졌다.

'내가 여인이 됐으니 모든 것을 인정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설마 마후라 대사가 모든 것을 알고?'

나는 내가 만든 카레를 맛있게 먹던 천축 고승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야. 조고각하 같은 말은 흔하게 다른 사람에게 남길 수 있는 경구야. 언제든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마후라 대사는 과연 무슨 의도로 이런 글귀를 남긴 건지?'

이미 마후라 대사가 입적했으니 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왕건이 왜 마후라 대사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는지 알 거 같아. 나도 생전의 마후라 대사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면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텐데. 이젠 너무 늦었구나.'

나는 처소에 앉아 탄식만 할 뿐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최치원이 남긴 두 번째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마후라가 남긴 글귀는 심오하기도 했고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이것 하나만 봐서는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주머니도 열어봐야 할 것 같았다.

'마후라 대사가 남긴 글귀를 보고 최치원은 대체 무슨 글을 나에게 남긴 걸까?'

주머니 속의 글은 마후라 대사의 글귀처럼 짧지는 않았다.

-마후라 대사께서 남기신 글귀를 보고 저 역시 정윤비 마마께 조언을 드리고 싶은 바가 있어 적습니다. 일전에 정윤비 마마께서 최승우를 서예로 꺾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이치로 정윤비 마마께서 본인의 이름을 그리 정갈하게 쓰실 수 있었는지 저는 여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마께서 그러실 수 있다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닌 듯합니다. 훗날 마마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민을 만나셨을 때는 반드시 마마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최승우를 꺾었을 때의 필체와 비교해보십시오. 그럼 분명 마마께서 스스로에 대해 깨우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최치원이 남긴 조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나는 손을 떨며 서탁 위에 놓인 붓을 집어들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나서 나는 종이 위에 내 이름을 적었다.

-임연우(林蓮佑)

그리고 나는 방 한쪽에 보관하고 있던 서첩을 꺼냈다. 최승우를 서예로 꺾은 일은 내 일생에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때 내 글씨와 최승우의 글씨를 거둬서 서첩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달라. 지금 쓴 건 서첩의 필체와 달라!"

나는 다시 손을 떨며 중얼거렸다. 지금 쓴 내 이름은 단정한 서첩 속의 글씨와 달리 어딘지 어색하고 부족했다.

'마후라 대사의 글귀를 보고 내가 너무 동요해서 그런거야.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쉬다가 써보자.'

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찻주전자의 차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푹 쉬고 나서 다시 한번 내 이름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초조함을 참으며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내 이름을 써내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이름을 바르게 쓸 수 없었다.

'이럴 리가. 아니 세월이 지나서 내 필체 자체가 변한건가?'

나는 다시 붓을 들어 글을 써내려갔다. 이름만 쓴 게 아니라 최승우와 대결할 때 쓴 글귀 전체를 다시 썼다.

-대고려 학관 학생 상산 임연우

그리고 나서 나는 다시 한 번 서첩의 글씨와 비교해 봤다.

'대고려 학관 학생 상산'까지는 몇 년 전에 쓴 필체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 부분은 여전히 달랐다.

나는 발작적으로 붓을 들어 종이 위에 '임연우'란 내 이름을 수십 번이나 써내려갔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됐어. 너무 멀리 왔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사실이 생생히 체감됐다.

'왕무와 혼인을 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구나! 처음 만난 건 7년 전이었고.'

그 6년간 왕무와 함께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유긍달이 쓴 계략을 분쇄하기 위해 함께 뛰고 백제군에 맞서서 힘을 합쳐 싸우기도 했다. 서로 마음이 안 맞아서 울기도 했고 그러다가 어느새 입맞춤도 하고 껴안고 자는 사이가 됐다.

별로 긴 세월 같지 않았는데 그게 벌써 7년이었다. 그 사이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와버린 것이다.

나는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꼭 슬퍼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마후라 대사와 최치원의 글귀를 보니 시원하기도 해서 흘린 눈물이었다.

'최치원은 아직 살아있는데 여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비밀이었다.

눈물을 닦아내고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붓을 들어 종이 위에 글을 써내려갔다.

-김선우

종이 위의 글씨는 단정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 종이를 구겨서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임연우란 이름을 쓴 종이도 다 태웠다.

나는 마후라 대사와 최치원이 남긴 글귀를 들고 잠시 망설였다. 이 글귀들도 태워버리는 것이 안전했지만 왠지 그럴 수는 없었다.

특히 마후라 대사가 남긴 글귀는 이거 하나 뿐일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글귀를 조심스레 서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

글귀들을 담아두던 주머니들도 버릴까 말까하다가 나는 내 품속에 집어넣었다.

'계속 가지고 다니던 것들인데 그냥 버리면 허전하니.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서 나는 다시 붓을 들어 종이 위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왕무에게 남기는 글이었다.

글을 다 쓴 나는 몸을 일으켰다.

"국선, 국선!"

동굴 안에 왕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등롱을 들고 동굴 벽에 새겨진 글이며 조각을 보고 있던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등롱 하나를 들고 왕무가 달려오고 있었다.

"정윤 전하!"

나는 기쁨을 담아 외쳤다.

"왜 왕가의 비밀통로에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까? 여기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왕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저는 시녀들과 시종들에게 다 말을 해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물때를 보고 들어온 것이라 안전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런 위기는 없을 거예요."

담담한 내 표정을 보고 왕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정윤 전하께서 옆에 계시니 저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등롱을 들어 다시 동굴 벽을 비추었다. 나는 많이 변했지만 역사에 대한 흥미만은 여전했다. 작제건이 당나라 신라방으로 탈출시킨 청해진 사람들이 남긴 글과 조각들은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었다.

왕무도 말없이 내 곁에서 함께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글과 조각들을 잘 볼 수 있게 왕무는 자신이 가지고 온 등롱을 높이 들어 불빛을 비춰주었다.

그 작은 배려 하나로 나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동굴벽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내가 말했다.

"이 동굴에 숨어있던 청해진 사람들이 남긴 글과 조각들은 그동안 이 통로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단서로만 간주되었습니다. 통로의 비밀이 풀린 이후에는 아무도 이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백 년이 지나면 바닷물 때문에 이 글과 조각들이 모두 지워질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그 글과 조각을 새긴 사람들은 무슨 심정이었을까요?"

"국선의 말이 옳습니다. 여기 새겨진 글과 조각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은 동굴에 숨어서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치성광여래의 조각을 새긴 것 같습니다."

왕무는 나름 진지하게 답했다. 뜬금없을 수 있는 내 말에도 성의를 다해 답해주는 왕무의 모습을 보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요 근래 지금처럼 마음이 편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기뻤다.

내가 왕무에게 뭐라 입을 열려할 때 왕무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왕 여기 들어왔으니 증조모 님이 계셨던 석실에도 한번 들러야겠습니다."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나는 나와 왕무의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동굴 벽에 있는 돌횃대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12번째 돌횃대 앞에 당도하자 왕무가 힘을 주어 벽을 밀었다. 벽이 밀리며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선의 지혜가 아니었으면 이 석실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무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정윤 전하가 안 계셨다면 저는 이 비밀을 알리지도 못하고 익사했을 거예요."

나도 왕무에게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국선은 위험한 일에도 거리낌 없이 나서니 두렵습니다."

왕무는 한숨을 쉬며 그리 말하더니 내 손을 잡고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신라 조정의 추격을 피해 왕무의 증조모인 저민의가 숨어 살던 곳이었다.

저민의의 유골은 왕건과 왕평달이 수습해간지 오래였다. 그래도 왕무는 저민의의 유골이 있던 쪽으로 절을 했다. 그런 왕무 곁에서 나도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나와 왕무는 석실 안의 돌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정윤 전하께서는 오늘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마후라와 최치원이 남긴 글귀를 본 나는 예전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왕무도 이상함을 눈치챘을 텐데도 한마디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긴 하지만 결코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왕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한테 그리 말했다. 왕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무야!"

"예?"

왕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야! 너를 사랑해! 우리 이젠……"

나는 용기를 끌어 모아 겨우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굳이 지하 비밀통로에 들어온 것도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나주원에서는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았다.

"국선. 지금 저자거리에 도는 소문 때문입니까?"

왕무는 내 고백을 듣고도 약간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그거야 내가 꾀를 쓰든 돈을 쓰든 해서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어. 좋아해. 무야. 우린 너무 오래……"

용녀의 힘이라도 받았는지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할 수 있었다.

"연우야."

내 말을 듣자마자 왕무는 힘껏 나를 껴안았다. 그러더니 왕무는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어. 마후라 대사에 최치원, 저민의까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왕무의 손이 내 가슴어림에 왔다. 그 순간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었다.

'안녕 김선우.'

그리고 나는 왕무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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