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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44화 (144/216)

< 144 : 열다 >

연등회 날이 되자 개경 거리 곳곳에 화려한 등들이 걸렸다.

'어마어마하군.'

나는 수레를 탄 채로 밖을 내다보며 감탄했다. 이미 여러 번 연등회를 구경했지만 이번 연등회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운주성 전투의 승리로 통일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개경 주민들도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연등을 주렁주렁 달아놓고 있었다.

"법왕사에 다 도착했습니다."

수레를 몰던 하인이 외쳤다. 나와 왕무는 수레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른 수레에서는 대광현이 내렸다.

대광현은 왠지 애잔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천부에서도 때가 되면 이와 비슷한 행사를 열곤 했습니다. 개경의 연등을 바라보니 그때가 떠오릅니다. 어렸을 때는 용천부의 연등을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발해가 불과 9년 전에 멸망했으니 대광현으로서는 여전히 실감이 안 날 것이다.

'수백 년간 이어지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봤으니 그 고통이 어떨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연등을 올려다보는 대광현을 보니 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무도 그런 대광현을 보더니 말했다.

"우리 폐하께서 삼한을 평정하시고 군사를 길러 반드시 발해의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출병하실 겁니다. 태자는 그때를 위해 준비해주십시오. 우리 고려군이 북진할 때 반드시 태자와 유민들이 선봉에 서야 합니다."

왕무의 표정은 결연했다. 삼한통일이 코앞이라는 것을 확신했기에 왕무는 진지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고려에서 군사를 내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대광현도 희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왕무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왕무와 대광현은 거란 야율씨를 상대할 방법에 대해 논하면서 천천히 법왕사 경내로 향했다.

'그러나……'

미래 역사를 훤히 아는 나로서는 왕무와 대광현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과 나란히 걷지 않고 한 걸음 뒤쳐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법왕사 경내는 이미 수많은 개경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손을 잡고 탑을 도는 젊은 남녀들도 많았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무와 대광현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내 목적은 달성됐다. 대광현은 확실히 정윤파로 간주될 거야.'

내가 그런 계산을 하고 있을 때 대광현은 약간 걸음걸이를 늦춰서 나와 나란히 걸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너무 빨리 걸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내가 손사래를 치는데 왕무 역시 재빨리 내 곁에 서서 느릿느릿 걸었다. 내 오른편에는 왕무가 왼편에는 대광현이 나란히 걸었다.

'고려의 정윤과 발해의 태자를 좌우에 거느리게 되다니! 나도 출세했구나.'

다만 이렇게 의기양양한 기분도 잠깐이었다. 나는 곧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쳐다봐? 왕무와 대광현이 엄청 잘생겨서 그렇구나.'

이 두 사람은 현대에 와도 통할만한 외모였다. 그런 만큼 법왕사 경내의 모든 사람이 우리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엄청나다. 정윤 전하의 용모야 가끔씩 봤지만 저쪽은 누구야?"

"얼마 전에 온 발해 태자래. 누가 더 잘생긴 걸까?"

"그래도 정윤 전하?"

"나는 발해 태자 쪽이 더 나아보여."

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왕무가 더 잘생겼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왕무가 물론 잘생기긴 했지만……'

나는 왕무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니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 처음에 대광현을 만났을 때 왕무가 대광현보다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좋았잖아. 근데 왜 다른 사람이 그러니 기분이 불쾌한 건지.'

그때 대광현이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나는 재빨리 잡념을 털어내고 대광현을 바라봤다.

"저기 탑을 도는 사람들은 왜 도는 것입니까? 저도 정윤비 마마와 함께 탑을 돌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곁에서 왕무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

왕무는 손까지 떨며 대광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광현의 멱살이라도 잡을 분위기였다.

나는 일을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고려에서는 연인들끼리 탑을 도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발해에는 그런 풍습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고려 사람들이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대광현도 당황해서 왕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발해가 신라와 대치하며 교류가 많지 않아 풍속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왕무를 보며 재빨리 말했다. 왕무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대광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태자의 말을 믿어보겠습니다."

"하하하."

대광현은 난감한 듯 웃으며 걸었다. 차가워진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말갈 기병들의 도움을 받으면 거란과 싸울 때 유용할 것 같습니다. 우리 고려의 유금필 대장군은 말갈 무리들과도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갈에 대해 태자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북방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까 전처럼 왕무와 대광현 사이가 화기애애해질 것 같았다.

"말갈이라. 그게 또 복잡한 문제입니다. 우리 발해 사람들이야 옛 고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동명왕과 유화부인을 섬기지만, 말갈인들은 우리와 다르지요. 동명왕의 위업도 유화부인의 신성함도 말갈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진군해올 때도 말갈족들은 우리를 돕지 않았습니다."

말갈 이야기가 나오자 대광현은 서운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나는 대광현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런데 곁에서 나와 대광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무가 불쑥 손을 내밀어 대광현의 손을 꽉 쥐더니 말했다.

"어쨌든 태자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반드시 발해를 위해 힘을 쓰겠습니다."

그러더니 왕무가 나와 대광현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자연스레 옆으로 밀려났다. 얼핏 보면 거란 토벌이라는 대의에 뜻을 모은 두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왠지 왕무의 목소리가 가식적인데? 처음의 그 목소리가 아니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왕무가 대광현의 손을 잡는 것을 보고 구경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정윤비 마마를 밀어내고 정윤 전하께서 발해 태자의 손을 잡으셨어!"

"꺄아악 어떡해."

나는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이 보기에는 왕무와 대광현이 의형제쯤 되는 줄 알겠군. 모양새는 참 좋아. 두 미청년이 북진의 대의를 위해 손을 맞잡다니!'

적당히 법왕사 경내를 거닐던 일행은 밤이 되자 헤어졌다. 대광현은 법왕사를 더 구경하겠다고 했다. 나는 피곤해서 왕무와 함께 나주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발해에는 탑돌이 풍습이 없다는 게 진짜일까요? 그리 핑계를 대니 넘어가긴 했지만, 날을 잡아서 다른 발해유민들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왕무는 수레에 올라타자마자 그리 투덜거렸다.

"몰랐으니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왕무를 달랬다.

"국선이 나를 위해 대광현을 보살피는 것을 알지만……"

왕무는 뭐라 말을 하다가 말고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를 품속에 안은 채로 왕무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팔관회 때 우리가 탑을 함께 돌던 일이 생각납니까? 그대가 국선이 되던 그해의 팔관회 때."

"예. 그렇습니다."

"그해 팔관회 때 국선의 모습은 내가 평생 기억할 겁니다."

왕무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어떻게든 왕무와 혼인을 피하려고 국선이 되려고 했어. 그런데 왕무는 그 모습을 저리 아련하게 회상하다니. 미안하네.'

나는 약간 기분이 가라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왕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국선! 피곤합니까?"

"아닙니다."

"오늘은 어쨌든 처소에 들자마자 자야겠습니다. 왠지 국선이 힘이 없어 보입니다."

왕무는 나를 자기 품속에 안은 채 내 이마에 자기 손을 대보기도 하며 나를 살폈다.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니 나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왕무 없이 살 수 있을까? 빨리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2월 중순에 열린 연등회가 끝난 뒤 시간은 금방 갔다.

'벌써 3월 초야. 요새는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매일 고민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무얼 해야 하는 지는 명확했다.

'문제는 나와 왕무 사이의 관계. 그것도 내가 문제야.'

그 생각이 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시원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벌써 3월이 된 것이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매일 한림원에 나갔다. 그리고 요 근래 매일 놀아서 살이 오른 왕건이 한림원에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어전에서 완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완산에 수많은 백제 군사들이 모여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백제에서 신검의 난이 일어났구나.'

다만 멀리서 소식을 받는 고려 조정은 아직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견훤이 운주에서 패했으니 이제는 완산의 방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완산의 수비를 강화하려고 군사를 모은 걸 수도 있습니다."

김악이 헛다리를 짚었다.

"그럴듯하다. 사실 나도 그 생각을 했어."

평소 김악을 구박하던 왕건이 이번에는 김악의 의견에 동조했다.

지금은 고려 측도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백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초조해졌다.

"음 지금 완산을 치면 이길 수 있으려나? 어쨌든 백제의 주력이 완산에 모여 있으니 이때 수군을 내면 나주는 쉽게 수복하겠군."

왕건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내 뇌리에 앞으로 터질 대사건들이 스쳐지나갔다.

'신검의 난 이후에는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와 왕무가 이걸 이용하려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더 이상 없어.'

나는 지금 어쩌면 내 평생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좀 더 고민할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이젠 다한 것이다. 이제는 어찌 됐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왕건이 태평스러운 어조로 나를 향해 물었다.

"연우 너는 이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아 네. 저도 웅진까지 우리 고려가 밀고 내려갔으니 그걸 막으려고 백제가 군사를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길게 이야기할 기력이 없어서 왕건에게 얼버무리듯이 그리 대답했다.

나는 어느새 나주원의 내 처소에 와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한림원에서 왕건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그 사이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서 처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내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왕무를 좋아해. 그런 호의를 받았는데 내가 왕무에게 무심할 수는 없어.'

그리고 나는 나와 왕무를 둘러싼 상황도 떠올렸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루면 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허나 이런 중대사를 정치 상황에 떠밀려 정하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냥 상황에 떠밀려서 결단을 내리면 왕무에게도 도리가 아니야.'

잠시 망설이던 나는 품속에서 두개의 주머니를 꺼냈다. 마후라 대사와 최치원이 나에게 준 주머니들이었다.

'이젠 때가 됐나? 내가 이 시대에 온 이래 이토록 고통스럽고 고민되는 일은 처음이야. 이건 미래 지식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니.'

나는 왕건을 놀라게 한 마후라 대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후라 대사가 건넨 주머니를 열었다. 그동안 참고 보지 않았던 주머니 속을 보려니 아쉬운 마음이 스쳐지나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과감히 주머니 속의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쳤다.

"앗."

종이 위의 글귀를 읽고 나는 신음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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