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43화 (143/216)

< 143 : 해법 >

"저에 대해 개경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습니까?"

나는 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와 왕무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분명 소문이 돌 것이다.

'확실히 이 시대에 혼인을 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없으면 말이 돌 수밖에 없어.'

유긍달, 황보제공이 저런 제안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현실을 자각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봐서 쉬쉬했을 뿐 임신과 관련해 온갖 말이 돌았을 것이다.

"소문이라니 무슨 말이냐? 나는 잘 모르겠구나."

임희가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나에 대해 무슨 소문이 돈다고 해도 아버님이 말해줄 리가 없지.'

나는 임희의 얼굴을 보고 그것을 깨달았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데 임희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저쪽에서 왕태제 건으로 우리를 압박한다고 해도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차차 대책을 세우면 된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연등회로구나! 근래 운주에서 우리 고려가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번 연등회는 그를 기념할 겸 엄청 화려하게 열릴 것이다. 기대가 되는구나!"

임희는 나를 위로하려고 연등회 이야기를 꺼냈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더욱 심란해졌다.

'시간이 진짜 빨리 가는구나.'

운주 전투 이후 그 뒷수습을 하느라 한동안 운주 인근에 머물렀었다. 그리고 개경에 귀환해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나갔다.

"벌써 2월이 다가오는군요."

이후로는 정세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을 고민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기왕 상산저에 온 김에 최 선생도 만나고 가렴. 그럼 기분이 풀릴 거다."

"오늘은 일이 바빠서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속이 복잡해서 그저 빨리 나주원에 돌아가 쉬고 싶었다.

'나주원에 돌아가서도 쉴 수나 있을지? 왕무 얼굴을 보면 더 고민될 텐데. 그런데 그러고 보니 최치원이 나에게 주머니를 하나 줬잖아? 고민이 있을 때 열어보라고. 마후라 대사가 건넨 주머니도 있고.'

문득 그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두 사람이 나에게 준 주머니를 항상 품속에 넣고 다녔다.

'그 주머니를 열어볼까? 그런데 이런 사사로운 고민에 그 주머니를 열어봐도 될지?'

나는 내 품속의 주머니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뗐다. 주머니를 열지 말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을 해볼 작정이었다.

나주원에 돌아온 나는 오지수를 찾았다.

"언니 무슨 일이예요?"

오지수는 황급히 달려온 나를 보고 물었다. 상산저에서 임희는 공주들의 혼인에 대해 거론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오지수는 많이 컸다.

'나주원에서 오지수의 얼굴을 매일 봐서 몰랐어. 정말 시간이 없구나.'

왕실의 공주가 어느 가문과 혼인하는가는 향후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왕건도 딸들의 혼인을 미루며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 삼한통일을 하고 난 뒤에는 공주들의 혼인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나도 결단을 내려야 해.'

그런 다짐을 하며 나는 오지수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이리 찾아왔어요. 나에 대해 개경에서 무슨 소문이 돌고 있죠? 공주 마마라면 알 것 같아서……"

나는 예전에 저자거리의 소문이며 궁안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나에게 다 말해주던 오지수를 떠올렸다.

"저……전 잘 모르겠어요."

오지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만 노련한 임희와 달리 오지수는 확실히 내가 다룰 수 있었다.

내가 계속 붙들고 늘어지자 오지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니가 너무 총명하고 똑똑한 대신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수군대고 있어요. 언니가 혼인을 할 때 돌던 요사스러운 노래와 소문도 있고요. 요새 그 노래를 다시 떠올리는 사람도 많아요. 원래는 혼인을 하면 안 되는데 했다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다 혼을 내줘야 해요."

소문의 실상을 듣자 나는 막막해졌다. 내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사람들이 내 앞에서 말도 못 했으니. 하긴 내 앞에서 이런 말을 누가 하겠어? 그나마 오지수는 순진한 면이 있어서 곧이 곧대로 이야기를 해준 거지.'

다만 지금 정세가 급박한데 여기에만 신경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오지수를 찾아온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래요. 그런 소문이 있었군요. 들려줘서 고마워요. 제가 조만간 조치를 취할 거예요. 그건 그렇고 몇 달 안에 우리 고려 수군이 공주 마마의 외가인 나주를 수복하기 위해 출진할 거예요. 지금 백제는 힘이 다해서 나주는 반드시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정말 잘 됐네요."

오지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공주 마마는 나주에 가 본 적이 있나요?"

"당연히 없죠. 오라버니도 아기 때 나주를 떠난 뒤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약간 기분이 가라앉은 듯한 오지수를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공주 마마께서도 한번 나주에 가보셔야죠. 나주를 수복하고 나서 폐하를 보면 꼭 이 말씀을 하세요. '백제군의 손에 전사한 외가 친척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꼭 한번 나주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분명 폐하께서는 위험하니 삼한이 통일된 뒤 한번 가보라고 할 거예요. 그때는 '여태 미룬 일인데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외가 친척들을 하루라도 빨리 돌보고 싶습니다. 번거롭지만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겠습니다. 백제는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폐하께서도 결국 공주 마마의 말을 들어주실 거예요. 앞으로 몇 달간 폐하께 호소력 있게 이 이야기를 하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내가 오지수에게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나와 왕무는 견훤이 망명하기 전에 나주에 가있어야 했다. 나주에 갈 명분으로 왕무의 외가인 오씨 일족의 제사를 내세울 작정이었다. 그러면 다른 대호족들도 반대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오지수를 통해 왕건에게 부탁을 하면 훨씬 자연스럽고 호소력도 있었다. 오지수가 간다고 하면 자연스레 호위도 해주고 제사도 함께 지내기 위해 나와 왕무가 따라갈 수 있었다.

"듣고 보니 언니 말이 옳아요. 외가의 제사를 신경 썼어야 했어요. 전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언니가 깨우쳐줘서 고마워요."

오지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왕건도 자기 딸이 이런 얼굴로 부탁을 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사서를 보면 왕건은 자기를 따르다가 박살 난 나주 호족들에 대해 미안한 심정을 갖고 있었어. 왕건이 결국 우리를 나주에 보내줄 거야.'

나는 한동안 오지수와 왕건에게 호소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점점 연등회가 다가와서 오지수는 연습에 집중을 못 했다. 거기에 아직 나주가 수복된 것도 아니었다.

'4월은 돼야 나주가 수복된다. 시간이 2달 정도 남아있으니 시간은 넉넉해.'

그래서 나는 오지수에게 말했다.

"연등회가 끝난 이후에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럴까요?"

오지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등회가 다가와서 온 개경이 떠들썩한데 나주원에 틀어박혀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연습을 하니 지루했을 것이다.

밝아진 오지수의 얼굴이 보기 좋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등회 날이 다가오자 나도 바빠졌다.

"발해 태자가 우리 고려에 와서 처음으로 연등회를 보게 됐다.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니 정윤과 정윤비가 발해 태자를 잘 보살펴 줘. 여기저기 안내도 해주고. 나이가 엇비슷하니."

왕건은 그런 명을 나와 왕무에게 내렸다. 그래서 그 준비도 해야 했다.

나는 나주원의 처소에 앉아 개경 지도를 펼쳐놓고 대광현을 어디로 데리고 다닐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법왕사가 볼 것도 많고 거리도 가깝겠죠?"

나는 왕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국선. 그 대아무개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왕무는 나를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그리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낯설어서 나는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항상 의젓하더니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야. 그런데 이 모습도 매력 있어.'

나는 약간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왕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표정이 약간 달라진 것만으로 왕무는 또 새로운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말했다.

"폐하의 어명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대광현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세요."

"오해라니?"

왕무가 약간 뚱한 어조로 되물었다.

'왕무가 지금 나를 두고 대광현에게 질투하고 있는 거 맞지?'

나도 어느 정도는 눈치가 생겼다. 그래도 그런 말을 대놓고 왕무에게 할 수는 없었다.

"대광현이 짐짓 정윤 전하께 기싸움을 거는 이유는 고려 조정 내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된 자신의 처지를 눈치챘기 때문이예요. 제가 근 몇 달 발해유민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며 느꼈어요. 물론 발해 유민들은 나와 정윤 전하가 대는 돈에 의지하는 바가 크죠. 우리 부부 말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호락호락 휘둘리지는 않겠다는 거죠. 그래서 좀 튕기는 거예요. 전하께서 대광현의 고단한 처지를 이해하시고 잘 보살펴주세요. 그래야 그 세력을 우리가 거둘 수 있어요."

"음 그 이유라면 왜 대아무개가 국선에게는 그리 친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대광현도 우리와 아예 척을 질 수 없으니 나에게는 친절한 거죠. 나에게 친절한 건 결국 정윤 전하를 따르겠다는 의미예요. 그게 대광현의 정치력을 보여주죠. 괜히 발해가 망한 이후에도 그만한 유민들을 이끌며 버틴 게 아니예요."

나는 내 치밀한 정세 분석을 왕무에게 들려주었다.

"국선의 생각이 이번에도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왕무는 그렇게 말하더니 의자에 앉아있는 내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왕무가 그러니 자연스레 손이 내 가슴어림에 오게 되었다. 왕무가 의도하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서로 껴안는 건 평소에도 자주 했어. 다만 왕무가 뒤에서 껴안으니 이런 일이. 어쨌든 의식하지 않으면 별 거 아니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왕만세 장군을 끌어들인 것처럼 대광현도 그리 대해주세요. 우리가 대광현을 자주 만나서 그 친분을 개경의 대호족들에게 과시해야 해요. 그래요. 마치 정윤 전하가 대광현과 의형제인 것처럼."

왕무는 의형제 소리를 듣고 몸서리를 쳤다.

"의형제라. 국선이 그것을 원하면 대아무개를 친절하게 대하겠지만 과연 그게 될지는……"

그러면서 왕무는 더 세게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계속 대아무개라고 부르다가 대광현 앞에서 실수를 할까봐 걱정됩니다. 그냥 이름을……"

"국선이 그리 명한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대광현은 국선과 함께 다니면 어디를 가든 기뻐할 거예요. 굳이 고심해서 어디에 갈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어명이니 같이 다닐 수밖에 없지만."

왕무가 평소와는 다른 말투로 말했다. 왕무가 너무 힘껏 끌어안아서 나는 탁자 위에 펼쳐진 개경 지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 왕무를 우선 달래주고 일을 하자.'

그 생각에 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서 왕무에게 입을 맞추었다. 왕무도 쓸데없는 소리를 더 이상 안 하고 입맞춤에 집중했다.

왕무는 입맞춤을 시작하자 재빨리 내 가슴팍에 가 있던 손을 떼려고 했다. 원래 왕무는 입맞춤을 할 때 항상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만 이번에는 나는 앉아있고 왕무는 서 있어서 허리를 껴안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왕무의 손이 꼴보기 싫어서 나는 그 손을 끌어다가 내 가슴팍에 놓았다.

'그냥 의식을 안 하면 괜찮아. 이게 자세로 보면 자연스럽기도 하고.'

내가 왕무의 손을 끄는 순간 왕무의 입술이 더 뜨거워진 것 같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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