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 왕태제 >
"축하드려요. 여기 왕후 마마께서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이건 제 선물이예요."
나는 올케에게 그리 말했다. 그러면서 부랴부랴 준비한 예물을 내밀었다. 나는 내 조카가 생긴다는 이야기에 날을 잡아 상산저까지 달려왔다.
"이런 선물까지. 정말 황송합니다."
올케는 그리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예를 차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맞아, 맞아. 연우한테 굳이 인사를 안해도 돼."
곁에 있던 임연객이 재빨리 올케의 어깨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명성이 드높으신 정윤비 마마께서 오셨는데."
올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와서 불편한가? 그러고 보니 올케와는 딱히 친해질 시간이 없었어. 내가 정윤비가 되고 나서 임연객과 혼인을 했으니. 내 지위 때문에 부담을 느끼겠지. 임연객이 결혼을 늦게 해가지고 이리 됐네. 괜히 온 건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임연객에게 말했다.
"그럼 나는 부모님을 뵙고 올게."
"응. 그래라."
임연객은 여전히 올케를 껴안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연우 너에게 이 소식을 안 알릴 수도 없고 해서 알렸다. 너무 신경쓰지는 말거라."
임희가 착잡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래 연우야. 너무 부담 갖지 말아라."
곁에서 상산부인도 약간 울먹이며 말했다.
'부모님의 반응도 나주왕후와 똑같아.'
나는 나주원에서 올케의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나주왕후가 보인 모습을 떠올렸다. 나주왕후 역시 깜짝 놀라서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병부경에게 기쁜 일이 생겼구나. 인척이기도 하고. 적당한 예물을 마련해서 보내야겠다. 연우 네가 나 대신 전해주렴."
나는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임신 이야기를 조심스레 피하고 있어.'
임희나 상산부인만 해도 그랬다. 왕무와 혼인을 한 직후에는 외손주를 봐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던 부모님이었다. 특히 임희는 왕무에게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다가 요새는 일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임희와는 긴히 논의할 일이 있어서 근래 몇 번이나 만났는데 그랬다.
'부모님은 나나 왕무가 문제가 있어서 애를 못 갖는 거라고 생각하고 계시겠지. 그래서 요새는 오히려 내 눈치를 보고 계셔. 나주 왕후 마마도 마찬가지고.'
임신 이야기가 나오자 내 앞에서 엄청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던 나주왕후를 생각하니 나는 더 갑갑해졌다.
'며느리 눈치를 보는 시어머니라니! 나를 구박하기에는 내가 지닌 재력이나 세력이 막강하긴 하지. 나주 왕후가 남을 구박할 성격도 못 되고.'
이 상황이 어떤 면에서는 구박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신체적으로는 나나 왕무나 아무 문제가 없어. 결단만 내리면 아이가 생길텐데. 그러나,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내가 왕무를 좋아하긴 해.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내가 왕무와 잠자리를 하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생각을 하기 싫어서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휘저은 것을 후회했다.
내가 고뇌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산 부인은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그동안 애써 미뤄왔던 문제가 올케의 임신으로 다 터져 나오는구나.'
나보다도 혼인을 늦게 한 임연객과 올케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그러나 나와 왕무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너무 도드라져보였다.
그렇게 나와 부모님이 서로 난감해하고 있을 때 밖에서 하인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잡찬 유긍달과 대상 황보제공이 찾아와 주인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임희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정윤파와 대립하는 두 사람이 상산저에 방문한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여태까지는 그쪽에서 상산과 협의할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항상 보냈다. 유긍달과 황보제공이 직접 상산저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둘러 모셔라. 연우야. 함께 나가봐야겠구나."
임희는 다급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눈을 번뜩였다.
'내가 온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인데 음. 이건 내 예상대로군.'
"병부경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그 소문이 상산저 앞을 지나는데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축하도 드릴 겸 이리 찾아왔습니다."
유긍달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황보제공도 그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연객과 올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임희는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마침 상산저에 계시니 다행입니다. 허허."
유긍달은 이제 내쪽도 슬쩍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유긍달은 차를 마시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축하만 건네고 그냥 자리를 뜨는 것도 예는 아닌 것 같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가고 싶습니다. 정윤비 마마나 상산백이나 학문이 깊으시니 옛 고려의 고사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옛 고려는 고구려를 의미했다.
"제 학문이 깊지는 않지만 옛 고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긴 합니다."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자 유긍달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옛 고려의 역사를 보면 어린 아우가 형을 부모처럼 섬기는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암 그렇고 말고. 나이 많은 큰형님은 아버님이나 다름이 없지."
황보제공이 유긍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유긍달은 황보제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소수림왕이 옛 고려의 기틀을 세우고 그 아우인 고국양왕이 그 뜻을 이어받아 영토를 넓혔습니다. 또한 수나라를 물리친 영양왕도 자식같은 아우인 영류왕에게 왕위를 물려줬습니다. 참 아름다운 고사 아닙니까?"
여기까지 듣고 나자 나는 유긍달과 황보제공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충주왕후가 낳은 왕요 태자는 나이가 어려. 왕무와는 11살 차이가 난다. 결국 왕요 태자를 왕무의 후계로 삼아달라는 것 아닌가? 그러면 뭐 더 이상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하게 있겠다는 건가?'
내 심정은 복잡해졌다.
"허허허. 뭐 옛 고려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뭐라 말을 덧붙이기는 어렵겠습니다."
임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운주에서 패한 견훤이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곧 우리 고려가 삼한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이 고려를 잘 이끌어 폐하께 보답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정윤 전하께서는 장보고를 기용해 사해를 평정하고 신라를 중흥시킨 명군 흥덕왕의 풍모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정윤 전하를 도와 힘을 보태고 싶은 심정입니다."
유긍달은 내 얼굴을 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전장에서 정윤 전하의 용맹을 봐왔습니다. 정윤 전하의 뛰어남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보제공도 그런 유긍달을 거들었다.
"잡찬께서 옛 사서를 많이 읽으셨습니다. 하하하."
나는 억지로 여유 있는 척 웃었다.
"옛 고사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유긍달은 나와 임희를 보며 그런 말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황보제공도 그런 유긍달의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긍달이 흥덕왕을 운운한 건 그 의도가 뻔해. 흥덕왕은 신라를 중흥시킨 사람이지만, 평생 왕후를 1명만 뒀어. 왕후가 죽은 뒤에는 혼자 살며 끝내 후계를 남기지 않았어. 유긍달이 그런 흥덕왕을 굳이 거론한 건 왕무더러 그리 살아달라고 하는 것 아닌가?'
유긍달과 황보제공이 떠나자 임희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이 사실상 왕요 태자를 왕태제로 삼아달라고 요구하는구나. 정윤 전하의 즉위에 협력하는 대신 그 다음 왕위는 자기들에게 달라는 것이지."
"아버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얼핏 보면 서로 대립하는 호족들 사이의 갈등을 끝낼 묘수 같지만. 과연 약속이 지켜지겠느냐? 정윤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 왕요 태자를 왕태제로 삼으시면, 저들에게 왕위를 요구할 명분을 주는 셈이다. 왕태제 자리를 얻어낸 다음에는 저들의 태도가 반드시 달라질 것이다."
임희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아버님도 경험이 많으셔서 저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셔.'
미래 역사를 아는 나는 당연히 이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긍달이 옛 고려에서 아우가 형의 뒤를 이은 사례를 거론했지만 태조대왕의 이야기는 딱 빼놓았습니다. 태조대왕의 동생 차대왕은 형인 태조대왕이 오래 살자 못 참고 반란을 일으켜 찬탈을 했습니다."
나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실제 역사에서 왕무는 30살에 왕이 된다. 왕무가 오래 살면 왕요는 왕태제 상태에서 20~30년을 기다려야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어. 그런데 왕요나 주변의 대호족들이 순리대로 20~30년을 기다릴까? 역사를 봐도 왕건이 죽고 왕무가 즉위하자마자 정권을 흔들기 시작해서 2년 만에 왕위를 빼앗는데.'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내가 왕무의 세력을 엄청 키워놨다. 그래서 왕무가 왕위에 올라도 대호족들이 실제 역사에서처럼 그리 쉽게 정권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쪽도 나름 양보를 하겠다고 왕요를 왕태제로 삼자는 타협안을 내놓은 거야. 허나 저 사람들은 절대 20~30년 혹은 그 이상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어. 왕태제란 정통성을 얻고 나서 그걸 바탕으로 일을 꾸밀ㅠ거야.'
미래역사를 아는 내 눈에 저들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래서 더 우울해졌다.
'저들이 저런 황당한 제안을 할 수 있는 것도 왕무에게 후계가 없기 때문이야. 사실상 나와 왕무 사이에서 후계자가 나올 확률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긴 저들이 저리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여태 나와 왕무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저들이 알면 어찌 반응할까 궁금했다.
"연우 네 말대로 절대 받으면 안 되는 안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폐하의 반응이다."
"폐하의 반응이라면."
"저들이 이 안을 잘 가다듬어서 폐하께 올리면 폐하께서는 솔깃해하시지 않겠느냐? 폐하께서는 확실히 정윤 전하와 나주 왕후 마마를 아끼신다. 하지만 다른 태자들도 아끼시지. 왕태제가 여러 호족들 사이의 대립을 끝내고 형제들의 우애를 지킬 묘안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지."
임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헉."
그 말을 듣자 그럴듯해서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왕건 입맛에 맞을 만한 구상이었다. 왕건이 왕무에게 이대로 하라고 요구하면 왕무는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어쩌지? 이제 나 때문에 역사가 뒤틀리게 생겼어. 왕무에게 끝까지 후계가 없다면 이렇게 일이 흘러갈 텐데.'
그런 나를 향해 임희가 말했다.
"너무 다급해하진 말거라. 폐하께서 바로 결단을 내리시진 않을 거다. 조만간 백제가 무너질 분위기니 그쪽에 신경을 쓰시고 다른 일은 제쳐두실 거다. 여러 공주 마마들께서 여전히 혼인을 하지 않으신 것도 그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그제서야 정리를 하시겠지."
임희의 말을 듣고도 나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통일 자체가 머지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