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 구명 >
마침내 전투가 끝난 것 같았다. 고려군의 승리였다. 백제군의 깃발은 모두 무너졌다. 고려군의 깃발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전장에 머물러 있었다. 뒷수습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서히 고려군의 깃발이 군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망루에서 내려와 나와 왕무가 함께 쓰는 막사로 달려갔다. 막사에서 발을 동동구르며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왕무가 들어왔다.
"전하."
왕무는 상당히 피곤해보였지만 멀쩡했다.
"국선, 확실히 국선의 말대로 쉽게 이겼습니다. 국선의 판단력은 항상 정확하군요."
왕무는 투구를 벗으면서 그리 나를 칭찬했다.
"전하. 머리칼이……"
나는 왕무의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투구를 쓴 채 한참 전투를 하고 와서 그런지 머리가 떡져있었다.
'그래도 잘생겼다. 원래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가?'
나는 떡 진 왕무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듣자마자 왕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큰 전투가 아니면 머리칼이 이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국선을 만나기 전엔 항상 머리칼을 정리했는데 오늘은 경황이 없어서."
그러더니 왕무는 민망한 듯 내 손을 피하며 스스로 머리칼을 매만졌다.
"……"
왕무가 내 손을 피한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왕무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내 손을 피한 건 아니야.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서 그런 건데. 내 마음은 왜?'
나는 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울거나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에게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왕무는 예민하게 그런 내 기분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국선!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더니 왕무는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갑옷을 입은 왕무에게 안기니 솔직히 좀 아팠다. 그래도 왕무의 두 팔이 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으니 안심이 됐다.
다만 왕무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갑옷을 먼저 벗었어야 했는데."
그러더니 왕무는 잠시 나를 떼놓고 허둥지둥 갑옷 끈을 풀었다. 떡진 머리를 하고 그러는 왕무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났다.
뭔가 어벙한 느낌도 주고 왕무가 너무 귀여웠다. 어쨌든 왕무가 갑옷을 벗자 나는 그대로 왕무를 껴안고 왕무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그동안 나와 왕무가 입맞춤을 나눈 일은 많았지만 내가 이리 주도적으로 나선 것은 처음 같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힘든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왕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다.
'내가 왕무보다 나이도 많은데. 항상 왕무가 먼저 나서주기만을 바랐어. 그러면 안 됐는데.'
왕무는 내가 먼저 입을 맞추자 어느새 눈을 감고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무는 잠시 입술을 떼더니 말했다.
"지금 내가 땀냄새가 나서."
"괜찮습니다. 전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나는 왕무의 땀냄새를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체취가 강해진 것 같긴 해. 근데 청량한 느낌을 주는데? 평소에 왕무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그래서 땀냄새가 청량한 거지. 과학적으로 말이 되나? 나도 잘 모르겠네.'
그리고 나는 침을 삼키며 다시 왕무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우선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남자끼리 이래도 되나? 아니야 이젠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왕무도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그런데 입술이 닿기 전에 막사 밖에서 군졸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두 분 모두 부르십니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신다고 합니다."
"정윤! 선봉에서 유금필과 함께 잘 싸웠다."
왕건은 왕무를 바라보며 그렇게 칭찬을 했다. 그러더니 왕무 곁에 서있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정윤비는 내가 옳은 결단을 내릴 수 있게 좋은 조언을 했다. 내가 후퇴했으면 정말 억울할 뻔했다. 이런 대승리를 거뒀는데."
나는 약간 양심에 찔렸다.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어서 졸지에 공을 세운 격이었다. 왕건은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에게도 한명씩 칭찬을 건넸다.
그런데 조용히 서있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비 마마! 정윤비 마마!"
왕무의 목소리도 아니고 낯선 목소리라서 나는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살펴보니 포박당한 채 막사 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백제포로 하나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새 장내의 시선은 모두 그쪽으로 쏠려있었다.
"무엄하다. 감히 정윤비 마마를!"
박술희가 호통을 쳤다. 나도 좀 당혹스러웠다.
'백제인이 나를 왜 불러?'
그런데 백제포로는 박술희를 보며 벌벌 떨면서도 나를 향해 외쳤다.
"소인이 부석사에서 정윤비 마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술사 종훈이라 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기억이 났다. 부석사에서 화엄종 남악파의 관혜를 종정으로 만들기 위해 왔던 백제인들 중 하나가 종훈이었다.
"나를 왜 불렀느냐?"
"정윤비 마마. 제발 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정윤비 마마께서는 부석사에서 선묘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제발 의상 대사와 선묘 아가씨를 생각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종훈은 벌벌 떨며 말했다.
"저, 저는 그저 의원입니다. 저도 좀."
종훈의 뒤에서 다른 중년인 하나가 외쳤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애잔해졌다.
'하긴 지금 저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울까? 당장 참수당하거나 무슨 일을 당할 판이니. 부석사에서 딱 하루 본 나한테 애걸을 하네. 내가 진짜 선묘 아가씨랑 만났다고 믿고 저러는 거야. 불가의 자비라도 베풀어 줄 거라 생각하고…… 왕무도 부석사에서 봤지만 왕무는 딱 봐도 무장처럼 보이니 호소해도 소용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다만 나는 종훈을 외면하며 왕건의 눈치를 살폈다. 불쌍하긴 해도 왕건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왕건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윤비의 명성이 진짜였구나! 백제인들도 알 정도니. 그래 정윤비는 저들을 어찌 처리할 것이냐?"
왕건의 말을 듣고 나는 약간 떨떠름해졌다.
'왕건은 그럼 그동안 내 명성을 가짜라고 생각했나? 다만 포로로 잡힌 백제인마저 나를 아니 확실히 왕건도 그렇고 장수들도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긴 했네.'
장수들도 하나같이 놀란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약간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리고 내 체면을 세워준 종훈 등을 위해 약간의 인심을 베풀기로 했다.
"폐하께서는 이들을 어찌 처리하실 작정이셨습니까?"
"이미 큰 승리를 거뒀는데 저들을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변방에 유배 보내려고 했다. 의원같은 경우엔 특히 변방에 보내면 쓸모가 많을 거고."
왕건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종훈 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들을 개경에 붙들어 두면 나중에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경에 데려가십시오."
내가 권하자 왕건이 웃으며 말했다.
"정윤비가 자비롭긴 하구나. 그러나 저자들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개경에도 뛰어난 술사, 의원들이 많은데?"
"1년 안에 제 말뜻을 이해하실 겁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왕건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다. 허허허. 뭐 이런 포로야 유배를 보내도 되고 안 보내도 되지. 이젠 거의 다 끝났으니."
왕건은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야전에서 왕건이 견훤을 격파하는 것을 본 운주성은 즉시 항복했다.
'운주성뿐만 아니라 앞으로 30개성이 왕건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백제에서도 난리가 나지. 결국 견훤이 폐위 당하고 고려에 망명한다. 이게 앞으로 9개월 안에 다 일어난다.'
내가 술사 종훈 등을 살리려하는 것도 견훤의 망명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견훤이 오면 백제 출신 사람들을 붙여서 시중들게 하는 게 편해. 종훈 등을 살려두면 그때 써먹으면 된다. 지금 막사의 장수들도 내 말을 다 들었다. 나중에 견훤이 오면 모두가 내 통찰력에 놀랄 거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와 왕무가 견훤을 데려와야 한다는 거야.'
나는 이를 악물며 그런 결의를 다졌다.
'결국 소소한 공을 아무리 세워봤자 소용이 없고 큰 공 하나가 절실해. 견훤을 데려오는 것만큼 큰 공이 어디 있어? 견훤이 항복하는 게 내년 6월이니 그 전에 어떻게든 나와 왕무가 나주에 가있어야 해. 견훤은 먼저 나주로 도망친 뒤 배를 타고 고려에 온다. 참 공교로운 건 왕무의 외가가 나주라는 거야. 그러니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서 나주에 가기도 좋지. 이 일은 반드시 된다.'
운주에서 엄청난 대승리를 거둔 왕건은 개경으로 귀환했다.
"음, 요새 또 살이 쪄서 걱정이야."
한림원에 앉아서 왕건은 자신의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더니 하품을 하며 한림원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요새 왕건은 일을 하는 척도 안 했다. 고창 전투 이후에는 호족들을 설득한다고 편지라도 열심히 썼지만 이제는 그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왕건이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니 한림원도 한가했다. 멍하니 있던 왕건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연우 너도 편하게 노니 좋지? 참 예전에 고생했던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구나. 그때는 견훤에게 연전연패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일이 있으면 얻어내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지. 연우 너도 그래서 이리저리 뛰어다녔어. 이제 우리는 좀 쉬어야지. 대장군이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해줄 거다. 그래 연우야. 나주원에 가면 왕후에게 전해라. 봄이 되면 유금필을 시켜서 나주를 회복할거라고. 지금 유금필이 수군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참 이제야 이게 되는군."
나는 유금필이 약간 불쌍해졌다.
'사탄 전투 이후 유금필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깨닫고 마구 부려먹네.'
왠지 고창 전투 전까지 왕건의 명을 받고 온갖 일을 처리해야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그래도 유금필 덕에 내 몸이 편해져서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나주 이야기가 왕건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는군. 여기에 숟가락을 적절히 올려야 해.'
우선 내년 4월 출진한 유금필은 나주를 다시 고려 땅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미 백제는 패배후유증으로 나주까지 수비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나주가 고려 땅이 된 것을 본 견훤이 그쪽으로 도망쳐온다. 이게 6월. 그러니 4월에서 6월 사이에 나와 왕무가 나주에 가서 시간을 끌며 견훤을 기다려야 해. 나와 왕무가 나주에 가있을 때 견훤이 오면 왕건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견훤을 호위하라고 할테니.'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부부의 운명이 여기에 걸려있었다. 다른 대호족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유긍달이 신라를 귀부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나와 왕무가 이 일을 성사시키기만 하면 공으로 유긍달도 누를 수 있다.'
어쨌든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왕건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왕건을 바라보는데 왕건은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주원에 돌아온 나는 왕건의 지시대로 나주왕후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냐? 정말 나주가. 내 친정이."
나주왕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씨 집안 사람들도 아마 섬에 많이 피신해있을 것입니다. 지난 수년간 백제가 나주를 점령했다고는 하나 그 인근의 수백 개나 되는 섬을 모두 살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섬들에 숨어있으면……"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나주 출신인 나주왕후가 인근 지리는 더 잘 알 것이다.
"그래. 어쨌든 그건 그렇고 오늘 상산저에서 소식이 왔단다. 상산저에서 사람이 와서 고맙게도 예물을 바치고 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이 서신을 너에게 전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나주 왕후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러더니 서탁에 놓인 서신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서신을 들어 읽었다.
"무슨 소식이니?"
나주왕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에게 조카가 생길 것 같습니다. 오라버니와 올케 사이에 애가 생겼다네요."